[취재후] 독립선언서 낭독된 보신각, 99년 뒤 ‘임신중단권’ 선언 장소로

입력 2018.08.28 (11:03) 수정 2018.08.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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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2일. 종로 보신각 앞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기독교계, 유림계 등 각계 인사들이 '제2의 독립선언서'로 불리는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조선 독립은 2천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낭독한 이들은, 출동한 일제 경관에 체포됐습니다.

1919년 종로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동아일보사1919년 종로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동아일보사


그로부터 99년이 흐른 2018년 8월 26일. 보신각 앞에 여성 125명이 모였습니다. 검은 옷을 맞춰 입은 이들의 손에는 또 다른 선언문이 들려 있었습니다.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제목이 달린 이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임신중단'은 금기도 죄악도 아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임신중단이 불법인 한국에서 한 시간 동안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여성들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낸다. …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하루 평균 임신중단 수술 건수를 약 3천 건으로 추정한다. 이는 정부 추정치의 약 세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지금, 이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한 시간 동안 임신중단을 하는 한국 여성의 수는 125명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함을 선언한다." (2018년 8월 26일, 임신중단 125인 선언 중)

이들은 이어 "국가가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우고 있다"면서, 국가는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누구나 안전하게 임시중단(낙태)을 할 수 있도록 '임신중단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보신각 앞에서 ‘임신중단 125인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들.보신각 앞에서 ‘임신중단 125인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들.

"언제까지 여성들이 자책해야 하나"

선언문 낭독에 참여한 조소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닷페이스' 대표)의 자유 발언은, 이번 선언문의 행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여성들이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면서, "정말 이 여성들이 국가가 불법이라고 비난할 만한 시술대 위에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써야 할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냐"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강간이 아니었으니 내 잘못이다, 피임에 실패했으니 내 잘못이다, 성관계를 했으니 내 잘못이다, 어찌됐든 이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언제까지 여성들이 이렇게 자책해야 합니까?"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자유 발언에 나선 조소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자유 발언에 나선 조소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

조 씨는 이어 국가의 편의에 따라 낙태가 선택적으로 금지돼 왔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성은 소외돼 왔다며 이는 '국가의 위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발언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국은 정말 위선적인 나라입니다. 국가가 권장할 때는 낙태는 가족계획의 똑똑한 수단이었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때는 쉬쉬해야 할 범죄였습니다. 이 나라는 인구관리가 필요할 때에만 여성에게 낙태할 권리를 허용해 왔습니다. 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 아래 '낙태 버스'가 전국 방방곡곡의 마을을 돌았습니다. 태아의 성감별 기술이 가장 발달한 이 나라에서 여아들은 일찍 뱃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살아남은 여아들은 아이를 낳아야 할 성숙한 자궁이 되었고, 우리는 아직도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위선적인 나라입니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동의없이 여성이 임신중절을 선택하면 고발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아닙니다. 임산부를 오랜 기간 때린 배우자여도, 헤어진 연인이어도, '내 씨'를 함부로 다룬 여성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임부에게 장애가 있는 경우 낙태가 허용되기 때문에, 장애 여성은 주변에서 낙태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내가 '낙태'한 여성이다"

이날 자유 발언에는 실제 임신중절 수술 경험이 있는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동안 일기에만 썼던 이야기를, 가난하고 혼자 사는 여성들을 대변해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한 여성은 "학창시절 태아가 등장하는 '낙태 반대 교육 영상'을 보고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앞으로 낙태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말았다"면서 "나는 너무 가난했고, 인생을 책임질 수 없었다. 그 이후 꾸준히 악몽에 시달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나를 임신시킨 그 남자가 꿈에 나온다. 이곳(보신각)에 오는 길에도 불안증약을 복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여성은 "임신한 지 5개월하고 4주째 되던 시점에 수술을 받았다"면서 "자궁문이 열리지 않자 의료진이 양수를 억지로 터뜨렸다. 스테인리스 용기에 제 양수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제 아기는 의사 손에 의해 억지로 자궁에서 꺼내졌다. 이후 두 달 내내 하혈이 있었고, 여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발언을 듣던 다른 여성들은 박수를 치며 "임신중단권을 요구한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주최 측이 나눠준 약 상자를 참가자들이 높이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임신중단 약물인 '미프진(미페프리스톤)'이고, 일부는 미프진과 비슷하게 생긴 비타민이라고 주최 측은 설명했다.주최 측이 나눠준 약 상자를 참가자들이 높이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임신중단 약물인 '미프진(미페프리스톤)'이고, 일부는 미프진과 비슷하게 생긴 비타민이라고 주최 측은 설명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참가자 125명이 동시에 알약을 먹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정부는 임신중단 약물을 도입하라"는 요구 사항을 표현한 겁니다. 1시간 동안의 자유 발언과 선언문 낭독, 퍼포먼스까지 마친 뒤 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99년 전 봄, 보신각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들의 소망은 끝내 현실이 됐습니다. 2018년 여름, 같은 장소에서 임신중단 125인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국가의 첫 공식 답변은 오는 9월 이후 구성될 6기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을 통해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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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독립선언서 낭독된 보신각, 99년 뒤 ‘임신중단권’ 선언 장소로
    • 입력 2018-08-28 11:03:51
    • 수정2018-08-28 11:06:15
    취재후·사건후
1919년 3월 12일. 종로 보신각 앞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기독교계, 유림계 등 각계 인사들이 '제2의 독립선언서'로 불리는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조선 독립은 2천만 동포의 요구다. 우리들은 손병희 등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관철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낭독한 이들은, 출동한 일제 경관에 체포됐습니다.

1919년 종로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 ⓒ동아일보사

그로부터 99년이 흐른 2018년 8월 26일. 보신각 앞에 여성 125명이 모였습니다. 검은 옷을 맞춰 입은 이들의 손에는 또 다른 선언문이 들려 있었습니다.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제목이 달린 이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임신중단'은 금기도 죄악도 아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는 임신중단이 불법인 한국에서 한 시간 동안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여성들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낸다. …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하루 평균 임신중단 수술 건수를 약 3천 건으로 추정한다. 이는 정부 추정치의 약 세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지금, 이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한 시간 동안 임신중단을 하는 한국 여성의 수는 125명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임신중단을 선택하는 다양한 여성들이 존재함을 선언한다." (2018년 8월 26일, 임신중단 125인 선언 중)

이들은 이어 "국가가 원치 않은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지우고 있다"면서, 국가는 형법상 낙태죄를 폐지하고 누구나 안전하게 임시중단(낙태)을 할 수 있도록 '임신중단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보신각 앞에서 ‘임신중단 125인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들.
"언제까지 여성들이 자책해야 하나"

선언문 낭독에 참여한 조소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닷페이스' 대표)의 자유 발언은, 이번 선언문의 행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임신중절 수술을 받는 여성들이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면서, "정말 이 여성들이 국가가 불법이라고 비난할 만한 시술대 위에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써야 할 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냐"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강간이 아니었으니 내 잘못이다, 피임에 실패했으니 내 잘못이다, 성관계를 했으니 내 잘못이다, 어찌됐든 이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 언제까지 여성들이 이렇게 자책해야 합니까?"라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자유 발언에 나선 조소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
조 씨는 이어 국가의 편의에 따라 낙태가 선택적으로 금지돼 왔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여성은 소외돼 왔다며 이는 '국가의 위선'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의 발언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국은 정말 위선적인 나라입니다. 국가가 권장할 때는 낙태는 가족계획의 똑똑한 수단이었고, 여성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때는 쉬쉬해야 할 범죄였습니다. 이 나라는 인구관리가 필요할 때에만 여성에게 낙태할 권리를 허용해 왔습니다. 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 아래 '낙태 버스'가 전국 방방곡곡의 마을을 돌았습니다. 태아의 성감별 기술이 가장 발달한 이 나라에서 여아들은 일찍 뱃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살아남은 여아들은 아이를 낳아야 할 성숙한 자궁이 되었고, 우리는 아직도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위선적인 나라입니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성의 목소리는 반영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의 동의없이 여성이 임신중절을 선택하면 고발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임신한 순간부터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 아닙니다. 임산부를 오랜 기간 때린 배우자여도, 헤어진 연인이어도, '내 씨'를 함부로 다룬 여성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임부에게 장애가 있는 경우 낙태가 허용되기 때문에, 장애 여성은 주변에서 낙태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내가 '낙태'한 여성이다"

이날 자유 발언에는 실제 임신중절 수술 경험이 있는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동안 일기에만 썼던 이야기를, 가난하고 혼자 사는 여성들을 대변해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한 여성은 "학창시절 태아가 등장하는 '낙태 반대 교육 영상'을 보고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앞으로 낙태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말았다"면서 "나는 너무 가난했고, 인생을 책임질 수 없었다. 그 이후 꾸준히 악몽에 시달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나를 임신시킨 그 남자가 꿈에 나온다. 이곳(보신각)에 오는 길에도 불안증약을 복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여성은 "임신한 지 5개월하고 4주째 되던 시점에 수술을 받았다"면서 "자궁문이 열리지 않자 의료진이 양수를 억지로 터뜨렸다. 스테인리스 용기에 제 양수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제 아기는 의사 손에 의해 억지로 자궁에서 꺼내졌다. 이후 두 달 내내 하혈이 있었고, 여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발언을 듣던 다른 여성들은 박수를 치며 "임신중단권을 요구한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와 같은 구호를 외쳤습니다.

주최 측이 나눠준 약 상자를 참가자들이 높이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임신중단 약물인 '미프진(미페프리스톤)'이고, 일부는 미프진과 비슷하게 생긴 비타민이라고 주최 측은 설명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참가자 125명이 동시에 알약을 먹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정부는 임신중단 약물을 도입하라"는 요구 사항을 표현한 겁니다. 1시간 동안의 자유 발언과 선언문 낭독, 퍼포먼스까지 마친 뒤 이들은 다시 일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99년 전 봄, 보신각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들의 소망은 끝내 현실이 됐습니다. 2018년 여름, 같은 장소에서 임신중단 125인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들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요? 국가의 첫 공식 답변은 오는 9월 이후 구성될 6기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을 통해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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