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왜 ‘산업 위안부’를 취재하려고 하죠?”

입력 2018.08.29 (14:43) 수정 2018.08.3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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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갱도를 나온 후 따뜻한 차 접대’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홋카이도 유바리 지역사 조사실에서 나온 사진으로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산업 위안부를 취재하려고 하죠?"

홋카이도 강제 징용 취재 과정에서 홋카이도 아시베츠 탄광에 있던 '위안소' 시설을 취재하려고 일정을 짜던 중 지인으로부터 들은 질문이다.

질문의 취지는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탄광 등의 위안소는 술집 형태가 많아 일본 우익들이 '위안소'의 성격 자체를 참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라고 트집잡는 경우가 많다. 즉 위안소라 하지만 결국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간 곳이라고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소개해본들 한국 측에 불리하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강제 징용'이라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의 무차별적 인력 동원, 그 가혹한 정책 아래서, 강제징용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행정 기관의 암묵적 장려 속에 설치한 것이 '산업 위안소'입니다. 결국,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아직 그 실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적극적으로 그 실상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 ‘조선 요리점’의 진실

'산업 위안소'에 대한 오해를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는 과거 그 명칭이 '조선 요리점'이라고 불렸던 데 있다.

홋카이도 ‘오타루 신문’ 1940년 1월 21일 기사홋카이도 ‘오타루 신문’ 1940년 1월 21일 기사

1940년 1월 21일 홋카이도 '오타루 신문'의 기사를 보면 "조선 요리점 개업 허가...노동자 5백 명에 1칸 할당"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한반도 출신 광부를 대상으로 한 시설인데, 이 제목만 봐서는 향수를 달래주는 고향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처럼 보인다.

홋카이도 ‘유바리 타임스’ 1940년 2월 25일 기사홋카이도 ‘유바리 타임스’ 1940년 2월 25일 기사

하지만 또 다른 기사, 1940년 2월 25일, 역시 홋카이도 지역지인 유바리 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반도 채광 전사의 위안소 개설'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또 다른 신문에서는 휴식의 집(憩いの家)이라는 표현도 나오는 데 모두 탄광 등에 설치된 위안소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허가'라는 대목.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1939년 이른바 '요리점'에 대해 허가제를 시행하고 식당도 신고하도록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쓸데 없는 소비를 줄이자는 목적이다. 그러나 유독 탄광 등에서는 '요리점'이라는 이름으로 '위안소'의 설치가 가능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이를 관리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 기업이 요청하고 행정 기관이 ‘허가’했던…

한반도 출신자들이 강제 동원되기 직전인 1939년 10월, 탄광 연합체인 '홋카이도 석탄 광업회'는 홋카이도 도청 보안과에 조선인 노동자를 위로할 목적으로 조선 요리점 개설 허가를 요청한다. 숫자는 18개 탄광에 26개소에 이르렀다.

당시 홋카이도 도청 보안과는 '전면적인 허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면서도 결국 26개 전체에 대해 '위안부 고용'을 허가한다는 답을 한다. 근거는 "해당 업종 영업이 특히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적었다.

□ ‘위안부’를 요청한 돗토리 현 지사

돗토리현 지사가 위안부 동원을 요청한 공문돗토리현 지사가 위안부 동원을 요청한 공문

1944년 돗토리 현 지사는 내무대신에게 한 장의 공문서를 발송한다.

"현 내 비행기 공장 건설이 시작돼 조선인 노무자 약 1천 명을 투입하게 됐다. 그러나 현장의 지리적 환경이 주변에 오락시설도 없고 주말이면 이들이 돗토리 시내의 술집으로 나오게 돼 술집 관계자들로부터 민원이 있다. 그들의 이른바 '성 문제'는 이번 공사의 수행뿐 아니라 치안에도 영향을 준다."라며 20명의 조선 여성, 문서의 표현으로는 '반도인 작부'를 데려오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이 문서에 의해 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됐는지에 대한 추가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위안소 설치를 추진했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지역별, 군별로 인원까지 할당해 조선 총독부가 강제 징용을 실시했던 당시 상황에 미뤄보면, 위안소로 오게 된 조선의 여성들이 과연 우익들의 주장처럼 돈을 벌기 위해 자발성을 가지고 왔는지에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된다.

□ 자살로 삶을 마감했던 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국내에서 산업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였다. 배우 이정현은 이 영화에서 군함도 내에 설치된 위안소에서 일하는 조선 여성의 역으로 열연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해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실제 군함도 위안부, '노치선'의 이야기를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다.

군함도는 징용자들이 숨질 경우 그 옆의 섬으로 옮겨 화장했는데, 당시 화장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남아 있어 희생자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되고 있다.

화장 기록 속에는 '노치선'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 고향은 황해도 신주, 사망 원인은 화공 약품인 크레솔을 마신 때문으로 돼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화장을 의뢰한 사람이 군함도안에 설치된 위안소의 영업자였던 점으로 미뤄, '노치선'이 위안부였음을 알 수 있다. 10대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길을 택했다는 점이 이 '위안소'라는 곳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무겁다.

군함도에는 위안소가 3곳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조선 여성 9명이 군함도 진료소에 왔다는 증언이 남아 있는 상태다.

위안소가 특별히 회사와 관계가 없고 조선 여성 동원이라는 '특수성'을 띤 곳이 아니었다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의 탄광에 계속 존속해야 했을 테지만, 군함도 탄광을 운영했던 미쓰비시는 해방 이후 위안소 건물을 헐고는 다른 건물을 세워 버린다. 마치 어두운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

□ 나는 왜 산업 위안소 취재를 계속하는가?

2년 남짓의 도쿄 특파원 생활 동안 내가 산업 위안소를 정규 뉴스를 통해 보도한 것은 KBS 9시 뉴스에 2차례, 그리고 7시 뉴스에 1차례 등 모두 3차례다. 그리고 '특파원 보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했다. 홋카이도 등 현장 취재를 3차례 행했고, 상당수의 관계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만, 나로서는 계속 취재를 지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분야이기도 하다.

홋카이도 아시베츠 탄광 마을에 남아 있는 옛 위안소 건물홋카이도 아시베츠 탄광 마을에 남아 있는 옛 위안소 건물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의 그 어떤 사안보다도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당사자의 너무도 아픈 과거를 들추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다른 사안보다 뒤늦게야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군 위안부와 달리 아직 산업 위안부에 끌려갔던 이의 직접 증언이나 피해 증언은 없는 상태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 밖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도 일부 양심적 연구자들에 의해 이제 최근에야 조금씩 연구가 체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겐 아직 더 알아야 할 과거의 진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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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9 14:43:38
    • 수정2018-08-30 09:24:00
    특파원 리포트
▲ ‘갱도를 나온 후 따뜻한 차 접대’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홋카이도 유바리 지역사 조사실에서 나온 사진으로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산업 위안부를 취재하려고 하죠?"

홋카이도 강제 징용 취재 과정에서 홋카이도 아시베츠 탄광에 있던 '위안소' 시설을 취재하려고 일정을 짜던 중 지인으로부터 들은 질문이다.

질문의 취지는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탄광 등의 위안소는 술집 형태가 많아 일본 우익들이 '위안소'의 성격 자체를 참여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간 곳이라고 트집잡는 경우가 많다. 즉 위안소라 하지만 결국 조선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간 곳이라고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소개해본들 한국 측에 불리하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강제 징용'이라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본의 무차별적 인력 동원, 그 가혹한 정책 아래서, 강제징용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행정 기관의 암묵적 장려 속에 설치한 것이 '산업 위안소'입니다. 결국,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아직 그 실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만큼 더욱 적극적으로 그 실상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 ‘조선 요리점’의 진실

'산업 위안소'에 대한 오해를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는 과거 그 명칭이 '조선 요리점'이라고 불렸던 데 있다.

홋카이도 ‘오타루 신문’ 1940년 1월 21일 기사
1940년 1월 21일 홋카이도 '오타루 신문'의 기사를 보면 "조선 요리점 개업 허가...노동자 5백 명에 1칸 할당"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한반도 출신 광부를 대상으로 한 시설인데, 이 제목만 봐서는 향수를 달래주는 고향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처럼 보인다.

홋카이도 ‘유바리 타임스’ 1940년 2월 25일 기사
하지만 또 다른 기사, 1940년 2월 25일, 역시 홋카이도 지역지인 유바리 타임스의 기사를 보면 '반도 채광 전사의 위안소 개설'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또 다른 신문에서는 휴식의 집(憩いの家)이라는 표현도 나오는 데 모두 탄광 등에 설치된 위안소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허가'라는 대목.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1939년 이른바 '요리점'에 대해 허가제를 시행하고 식당도 신고하도록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쓸데 없는 소비를 줄이자는 목적이다. 그러나 유독 탄광 등에서는 '요리점'이라는 이름으로 '위안소'의 설치가 가능했는데 이는 일본 정부가 이를 관리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 기업이 요청하고 행정 기관이 ‘허가’했던…

한반도 출신자들이 강제 동원되기 직전인 1939년 10월, 탄광 연합체인 '홋카이도 석탄 광업회'는 홋카이도 도청 보안과에 조선인 노동자를 위로할 목적으로 조선 요리점 개설 허가를 요청한다. 숫자는 18개 탄광에 26개소에 이르렀다.

당시 홋카이도 도청 보안과는 '전면적인 허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라면서도 결국 26개 전체에 대해 '위안부 고용'을 허가한다는 답을 한다. 근거는 "해당 업종 영업이 특히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다"고 적었다.

□ ‘위안부’를 요청한 돗토리 현 지사

돗토리현 지사가 위안부 동원을 요청한 공문
1944년 돗토리 현 지사는 내무대신에게 한 장의 공문서를 발송한다.

"현 내 비행기 공장 건설이 시작돼 조선인 노무자 약 1천 명을 투입하게 됐다. 그러나 현장의 지리적 환경이 주변에 오락시설도 없고 주말이면 이들이 돗토리 시내의 술집으로 나오게 돼 술집 관계자들로부터 민원이 있다. 그들의 이른바 '성 문제'는 이번 공사의 수행뿐 아니라 치안에도 영향을 준다."라며 20명의 조선 여성, 문서의 표현으로는 '반도인 작부'를 데려오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이 문서에 의해 위안부가 어떻게 동원됐는지에 대한 추가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위안소 설치를 추진했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지역별, 군별로 인원까지 할당해 조선 총독부가 강제 징용을 실시했던 당시 상황에 미뤄보면, 위안소로 오게 된 조선의 여성들이 과연 우익들의 주장처럼 돈을 벌기 위해 자발성을 가지고 왔는지에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된다.

□ 자살로 삶을 마감했던 어느 위안부의 이야기

국내에서 산업 위안부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것은 사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군함도'였다. 배우 이정현은 이 영화에서 군함도 내에 설치된 위안소에서 일하는 조선 여성의 역으로 열연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해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실제 군함도 위안부, '노치선'의 이야기를 취재해 보도한 적이 있다.

군함도는 징용자들이 숨질 경우 그 옆의 섬으로 옮겨 화장했는데, 당시 화장한 이들에 대한 기록이 그나마 남아 있어 희생자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되고 있다.

화장 기록 속에는 '노치선'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 고향은 황해도 신주, 사망 원인은 화공 약품인 크레솔을 마신 때문으로 돼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화장을 의뢰한 사람이 군함도안에 설치된 위안소의 영업자였던 점으로 미뤄, '노치선'이 위안부였음을 알 수 있다. 10대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길을 택했다는 점이 이 '위안소'라는 곳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무겁다.

군함도에는 위안소가 3곳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조선 여성 9명이 군함도 진료소에 왔다는 증언이 남아 있는 상태다.

위안소가 특별히 회사와 관계가 없고 조선 여성 동원이라는 '특수성'을 띤 곳이 아니었다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의 탄광에 계속 존속해야 했을 테지만, 군함도 탄광을 운영했던 미쓰비시는 해방 이후 위안소 건물을 헐고는 다른 건물을 세워 버린다. 마치 어두운 역사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

□ 나는 왜 산업 위안소 취재를 계속하는가?

2년 남짓의 도쿄 특파원 생활 동안 내가 산업 위안소를 정규 뉴스를 통해 보도한 것은 KBS 9시 뉴스에 2차례, 그리고 7시 뉴스에 1차례 등 모두 3차례다. 그리고 '특파원 보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관련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했다. 홋카이도 등 현장 취재를 3차례 행했고, 상당수의 관계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지만, 나로서는 계속 취재를 지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분야이기도 하다.

홋카이도 아시베츠 탄광 마을에 남아 있는 옛 위안소 건물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의 그 어떤 사안보다도 비극적인 일이었지만, 당사자의 너무도 아픈 과거를 들추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다른 사안보다 뒤늦게야 그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군 위안부와 달리 아직 산업 위안부에 끌려갔던 이의 직접 증언이나 피해 증언은 없는 상태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 밖에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도 일부 양심적 연구자들에 의해 이제 최근에야 조금씩 연구가 체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겐 아직 더 알아야 할 과거의 진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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