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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日공항 ‘폭탄’소동과 ‘투쟁’의 추억
입력 2018.09.16 (10:43)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日공항 ‘폭탄’소동과 ‘투쟁’의 추억
최근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이 발칵 뒤집혔다. 활주로 부근에서 폭탄 불발탄처럼 보이는 물체가 발견돼, 활주로 한 곳이 일시 폐쇄됐다. 의심 물체는 실질적인 위협 없이 서둘러 제거됐다. 갑작스러운 폭발물 소동은 나리타 공항의 ‘아픈 가시’로 남아 있는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의 기억을 현재로 다시 소환했다.

국제공항을 발칵 뒤집은 ‘사제 폭탄 불발탄’?

나리타 공항 A활주로 외곽에서는, 착륙한 항공기가 신속하게 활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유도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항공기 이착륙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다.

13일 새벽 3시 반쯤, 활주로 바깥쪽에서 굴착작업 중이던 공사업체로부터 공항 운영사인 나리타국제공항공사 측에 긴급 보고가 전달됐다. 활주로 북쪽 녹지대에서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제의 물체는 원통형으로 일부가 흙에 묻힌 상태로 50cm가량 드러나 있었다.


B활주로가 정상 가동돼 아침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운항 편수가 늘어나면 공항이 정상 운영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벽 5시 반 무렵부터 해당 활주로가 전면 폐쇄됐다. 경찰이 긴급 출동해 회수 작업에 나섰다. 위험 추정 물체가 무사히 제거된 뒤, 아침 8시 20분 무렵부터 공사도, 활주로 이용도 재개됐다.

국제선 한 편이 행선지를 인천공항으로 변경했지만, 항공편 전체 운항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공항 이용객들은 불발탄 소동에 대해, 2020년 도쿄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을 거론하며 놀라움과 불안감을 나타냈다.

‘나리타 투쟁’과 ‘사제 폭탄’의 기억

공항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던 문제의 물체는 금속 통 형태로 녹이 슬어 있었다. 지바 현 경찰본부 등은 과거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 당시 과격파가 사용했던 이른바 ‘비상탄’의 일종으로 추정했다. 쇠파이프 등에 화약을 채워 넣어 날리는 것으로, 일종의 사제폭탄이다. 과거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에 참가했던 일부 극렬 세력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공항을 노리고 날아드는 사례가 있었다.

2008년 3월에는 공항회사 관리하는 부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과격파를 자처하는 단체가 범행을 과시하듯 시인하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살상이나 파괴 목적이 아닌 정치적 선전 성격이 다분했다.


도쿄 도심에서 북동쪽 60km에 위치한 나리타 공항은 일본 수도권, 간토 지방의 관문이다. 1966년 착공해, 진통 끝에 1978년 개항했다. 지난 5월 개항 40돌을 맞았다. 나리타 공항이 역사는 일본 민중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가 이익’에 밀려난 ‘농촌 마을’의 비극

1966년 일본 정부는 기존 하네다 공항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나리타 신공항을 건설 계획을 밝혔다. 예정지는 치바 현의 ‘산리즈카’ 농촌 마을. 충분한 사전 설명은 없었다. 대를 이어 땅을 지켜온 농민과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러했듯이, 일본 정부도 민주적 공론화 과정과 설득 절차를 거칠 만큼 인내심을 갖지 못했다. 토지 수용과 철거 등의 절차가 일방적으로 추진됐다. 시민단체, 학생, 진보 정당, 그리고 좌익 세력까지 반대운동에 가담하면서, ‘운동’은 ‘저항’을 거쳐 ‘투쟁’이 됐다. ‘망루’, ‘점거’, ‘바리케이드’ 등이 등장했다.

1971년 9월 경찰병력과 저항세력이 무력 충돌했다. 양측에서 수백 명이 다쳤다. 경찰 3명이 숨졌고, 농민 1명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다. 마을 공동체는 파괴됐다. 여느 대규모 개발 사업에서 으레 그러하듯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갈라섰다.

가장 처절했던 日민중저항의 기록

공항건설은 예정보다 8년이 늦어졌다. 활주로는 국제공항 이름이 무색하게 한 개만 건설됐다. 농민 3명이 토지수용을 거부하며 버텼다. 시민단체는 마을 토지를 공동 구매해 농사를 지으며 버텼다.


1978년 극렬세력이 공항관제탑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대대적인 형사 처벌로 이어졌다. 다수의 외면 속에 소수로 고립된 사람들은 항공기 소음 속에 유기농 농사 등을 지으며 땅을 지켰다.

공항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1990년대에야 본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토지수용 시도를 중단했다. 1995년엔 일본 총리가 뒤늦게 사과했다. 정부는 ‘항공기 소음방지 특별지구’를 지정했다. 공항 인근 마을 인구는 계속 줄었다.

2002년 두 번째 활주로가 계획보다 짧은 거리로 들어섰다. 올해 3월에는 국가와 공항회사, 지자체 등이 국제공항 확대를 위한 세 번째 활주로 건설에 합의했다.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한 산리즈카 마을의 투쟁은 일본 현대 민중운동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저항의 기록으로 꼽힌다.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일본 고단샤의 주간 잡지에 ‘다큐멘터리 만화’로 연재돼 화제를 모았다. 2012년엔 국내에도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됐다.

‘나리타 투쟁’은 ‘국가’와 ‘다수’의 이름으로 국책 사업을 추진할 때 ‘소수’의 생존권과 인권 문제는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그 숙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그렇다.
  • [특파원리포트] 日공항 ‘폭탄’소동과 ‘투쟁’의 추억
    • 입력 2018.09.16 (10:43)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日공항 ‘폭탄’소동과 ‘투쟁’의 추억
최근 일본 나리타 국제공항이 발칵 뒤집혔다. 활주로 부근에서 폭탄 불발탄처럼 보이는 물체가 발견돼, 활주로 한 곳이 일시 폐쇄됐다. 의심 물체는 실질적인 위협 없이 서둘러 제거됐다. 갑작스러운 폭발물 소동은 나리타 공항의 ‘아픈 가시’로 남아 있는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의 기억을 현재로 다시 소환했다.

국제공항을 발칵 뒤집은 ‘사제 폭탄 불발탄’?

나리타 공항 A활주로 외곽에서는, 착륙한 항공기가 신속하게 활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유도로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항공기 이착륙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다.

13일 새벽 3시 반쯤, 활주로 바깥쪽에서 굴착작업 중이던 공사업체로부터 공항 운영사인 나리타국제공항공사 측에 긴급 보고가 전달됐다. 활주로 북쪽 녹지대에서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문제의 물체는 원통형으로 일부가 흙에 묻힌 상태로 50cm가량 드러나 있었다.


B활주로가 정상 가동돼 아침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겠지만, 운항 편수가 늘어나면 공항이 정상 운영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새벽 5시 반 무렵부터 해당 활주로가 전면 폐쇄됐다. 경찰이 긴급 출동해 회수 작업에 나섰다. 위험 추정 물체가 무사히 제거된 뒤, 아침 8시 20분 무렵부터 공사도, 활주로 이용도 재개됐다.

국제선 한 편이 행선지를 인천공항으로 변경했지만, 항공편 전체 운항에는 큰 영향이 없었다. 공항 이용객들은 불발탄 소동에 대해, 2020년 도쿄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을 거론하며 놀라움과 불안감을 나타냈다.

‘나리타 투쟁’과 ‘사제 폭탄’의 기억

공항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던 문제의 물체는 금속 통 형태로 녹이 슬어 있었다. 지바 현 경찰본부 등은 과거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 당시 과격파가 사용했던 이른바 ‘비상탄’의 일종으로 추정했다. 쇠파이프 등에 화약을 채워 넣어 날리는 것으로, 일종의 사제폭탄이다. 과거 나리타 공항 반대 투쟁에 참가했던 일부 극렬 세력이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공항을 노리고 날아드는 사례가 있었다.

2008년 3월에는 공항회사 관리하는 부지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과격파를 자처하는 단체가 범행을 과시하듯 시인하는 성명을 내놓기도 했다. 살상이나 파괴 목적이 아닌 정치적 선전 성격이 다분했다.


도쿄 도심에서 북동쪽 60km에 위치한 나리타 공항은 일본 수도권, 간토 지방의 관문이다. 1966년 착공해, 진통 끝에 1978년 개항했다. 지난 5월 개항 40돌을 맞았다. 나리타 공항이 역사는 일본 민중의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국가 이익’에 밀려난 ‘농촌 마을’의 비극

1966년 일본 정부는 기존 하네다 공항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나리타 신공항을 건설 계획을 밝혔다. 예정지는 치바 현의 ‘산리즈카’ 농촌 마을. 충분한 사전 설명은 없었다. 대를 이어 땅을 지켜온 농민과 지역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러했듯이, 일본 정부도 민주적 공론화 과정과 설득 절차를 거칠 만큼 인내심을 갖지 못했다. 토지 수용과 철거 등의 절차가 일방적으로 추진됐다. 시민단체, 학생, 진보 정당, 그리고 좌익 세력까지 반대운동에 가담하면서, ‘운동’은 ‘저항’을 거쳐 ‘투쟁’이 됐다. ‘망루’, ‘점거’, ‘바리케이드’ 등이 등장했다.

1971년 9월 경찰병력과 저항세력이 무력 충돌했다. 양측에서 수백 명이 다쳤다. 경찰 3명이 숨졌고, 농민 1명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다. 마을 공동체는 파괴됐다. 여느 대규모 개발 사업에서 으레 그러하듯 주민들은 찬반으로 나뉘어 갈라섰다.

가장 처절했던 日민중저항의 기록

공항건설은 예정보다 8년이 늦어졌다. 활주로는 국제공항 이름이 무색하게 한 개만 건설됐다. 농민 3명이 토지수용을 거부하며 버텼다. 시민단체는 마을 토지를 공동 구매해 농사를 지으며 버텼다.


1978년 극렬세력이 공항관제탑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대대적인 형사 처벌로 이어졌다. 다수의 외면 속에 소수로 고립된 사람들은 항공기 소음 속에 유기농 농사 등을 지으며 땅을 지켰다.

공항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1990년대에야 본격화됐다. 일본 정부는 토지수용 시도를 중단했다. 1995년엔 일본 총리가 뒤늦게 사과했다. 정부는 ‘항공기 소음방지 특별지구’를 지정했다. 공항 인근 마을 인구는 계속 줄었다.

2002년 두 번째 활주로가 계획보다 짧은 거리로 들어섰다. 올해 3월에는 국가와 공항회사, 지자체 등이 국제공항 확대를 위한 세 번째 활주로 건설에 합의했다.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한 산리즈카 마을의 투쟁은 일본 현대 민중운동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절했던 저항의 기록으로 꼽힌다. 1992년부터 2년에 걸쳐 일본 고단샤의 주간 잡지에 ‘다큐멘터리 만화’로 연재돼 화제를 모았다. 2012년엔 국내에도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됐다.

‘나리타 투쟁’은 ‘국가’와 ‘다수’의 이름으로 국책 사업을 추진할 때 ‘소수’의 생존권과 인권 문제는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겼다. 그 숙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일본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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