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독극물 공포에 떠는 영국…러시아 발뺌 속 ‘신냉전’ 국면

입력 2018.09.2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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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가 발칵 뒤집혔다. 남녀 2명이 독극물 중독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것이다.

이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 갑자기 몸에 이상을 호소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솔즈베리는 지난 3월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경찰은 만일에 있을 사태에 대비해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구급대가 출동한 데 이어 경찰과 소방대까지 현장에 나타났다. 문제의 식당 주변에는 방호복을 입은 특수 요원들도 목격됐다.

하지만 검사 결과 신경작용제인 '노비촉(novichok)' 중독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성명을 통해 이번 일을 '의료 사건'이라고 밝혔다.

특정 마약을 과다복용하면 노비촉 중독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다.

영국 솔즈베리 지역을 조사하고 있는 특수 요원들영국 솔즈베리 지역을 조사하고 있는 특수 요원들

사실 영국 정부가 놀란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지난 3월 러시아 스파이였던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솔즈베리의 한 식당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3개월 뒤인 6월 말에는 솔즈베리에서 10여 km 떨어진 에임즈버리에서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40대인 찰리 폴리와 던 스터지스 커플이 노비촉에 노출돼 쓰러진 것이다.

이들은 노비촉이 담긴 향수병을 우연히 주었다가 중독됐다.

스터지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난 7월 숨졌고, 롤리는 퇴원했다가 최근 수막염과 시력 문제로 다시 입원했다.

이 일 말고도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 이후 위급 상황으로 오인한 사건들이 몇 번 발생했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 월드컵 때는 독극물 주의보(?)도 내려졌다.

잉글랜드 대표팀에게 월드컵 기간 호텔 룸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겉으로는 식단 관리와 선수 건강 보호를 이유로 들었지만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사고를 우려한 조치였다.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 용의자들의 모습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 용의자들의 모습

영국 정부는 스크리팔 부녀와 롤리 커플에게서 러시아가 과거 군사용으로 개발한 '노비촉'이 검출된 사실을 근거로 러시아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최근에는 러시아 군 정보기관인 GRU(총정찰국) 소속 장교 2명을 살인공모 등의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영국의 주장을 사실과 다르다며 일축했고 용의자들의 행방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의자 2명이 러시아 관영 방송인 RT에 나온 것이다.

이들은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군 정보기관 요원들이 아니라 사업가이며 솔즈베리에는 관광차 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이들의 해명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고 보도했다.

우선 용의자들은 인터뷰에서 친구들이 오래 전부터 솔즈베리에 가보라고 권해 여행을 갔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비행기 표는 모스크바 출발 하루 전에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의 여권 관련 서류에는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 2009년 이전과 관련한 아무런 정보가 담겨있지 않았다.

특히 가디언이 용의자 한 명의 여권 관련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 결과 러시아 국방부로 연결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인터뷰가 푸틴 대통령의 발언 직후 행해진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들이 언론사에 직접 가서 자신들에 관해 이야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독극물에 중독돼 입원한 전직 러시아 정보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독극물에 중독돼 입원한 전직 러시아 정보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실 러시아 전직 스파이 스크리팔 부녀에 대한 독살시도 사건을 보면 기시감(deja vu)을 느낀다.

2006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소속 요원이었던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아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러시아 비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2006년 11월 돌연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조사 결과 한달 전 그가 옛 동료인 안드레이 루고보이를 만나 녹차를 마셨는데 그 녹차 속에 방사성 독극물 '폴로늄(polonium)'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루고보이는 이후 러시아 하원 의원이 됐으며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았다.

총리와 질의 응답을 벌이는 영국 하원 의원들총리와 질의 응답을 벌이는 영국 하원 의원들

영국 정부는 주권 국가인 자국의 땅에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이 또다시 발생한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즉각 러시아 외교관 수 십 명을 추방했다. 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규칙에 입각한 국제 질서를 확고히 해야 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계속 자신들의 연루 의혹에 대해 부인할 뿐이다. 오히려 영국이 없는 일을 만든다며 발뺌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원래부터 앙숙이었던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최근 들어 더욱 악화일로를 겪고 있다.

21세기에 '새로운 냉전(冷戰)'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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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독극물 공포에 떠는 영국…러시아 발뺌 속 ‘신냉전’ 국면
    • 입력 2018-09-21 19:36:28
    특파원 리포트
지난 16일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가 발칵 뒤집혔다. 남녀 2명이 독극물 중독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것이다.

이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 갑자기 몸에 이상을 호소해 병원으로 급히 후송됐다.

솔즈베리는 지난 3월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경찰은 만일에 있을 사태에 대비해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구급대가 출동한 데 이어 경찰과 소방대까지 현장에 나타났다. 문제의 식당 주변에는 방호복을 입은 특수 요원들도 목격됐다.

하지만 검사 결과 신경작용제인 '노비촉(novichok)' 중독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성명을 통해 이번 일을 '의료 사건'이라고 밝혔다.

특정 마약을 과다복용하면 노비촉 중독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다.

영국 솔즈베리 지역을 조사하고 있는 특수 요원들
사실 영국 정부가 놀란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지난 3월 러시아 스파이였던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 율리아가 솔즈베리의 한 식당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3개월 뒤인 6월 말에는 솔즈베리에서 10여 km 떨어진 에임즈버리에서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40대인 찰리 폴리와 던 스터지스 커플이 노비촉에 노출돼 쓰러진 것이다.

이들은 노비촉이 담긴 향수병을 우연히 주었다가 중독됐다.

스터지스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지난 7월 숨졌고, 롤리는 퇴원했다가 최근 수막염과 시력 문제로 다시 입원했다.

이 일 말고도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 이후 위급 상황으로 오인한 사건들이 몇 번 발생했다.

이러다 보니 러시아 월드컵 때는 독극물 주의보(?)도 내려졌다.

잉글랜드 대표팀에게 월드컵 기간 호텔 룸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겉으로는 식단 관리와 선수 건강 보호를 이유로 들었지만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를 사고를 우려한 조치였다.

러시아 스파이 독살 시도 사건 용의자들의 모습
영국 정부는 스크리팔 부녀와 롤리 커플에게서 러시아가 과거 군사용으로 개발한 '노비촉'이 검출된 사실을 근거로 러시아를 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

최근에는 러시아 군 정보기관인 GRU(총정찰국) 소속 장교 2명을 살인공모 등의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영국의 주장을 사실과 다르다며 일축했고 용의자들의 행방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의자 2명이 러시아 관영 방송인 RT에 나온 것이다.

이들은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군 정보기관 요원들이 아니라 사업가이며 솔즈베리에는 관광차 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이들의 해명에는 많은 의문이 있다고 보도했다.

우선 용의자들은 인터뷰에서 친구들이 오래 전부터 솔즈베리에 가보라고 권해 여행을 갔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비행기 표는 모스크바 출발 하루 전에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의 여권 관련 서류에는 개인 신상정보는 물론 2009년 이전과 관련한 아무런 정보가 담겨있지 않았다.

특히 가디언이 용의자 한 명의 여권 관련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 결과 러시아 국방부로 연결됐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인터뷰가 푸틴 대통령의 발언 직후 행해진 점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들이 언론사에 직접 가서 자신들에 관해 이야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독극물에 중독돼 입원한 전직 러시아 정보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사실 러시아 전직 스파이 스크리팔 부녀에 대한 독살시도 사건을 보면 기시감(deja vu)을 느낀다.

2006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독살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소속 요원이었던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당국의 탄압을 받아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러시아 비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2006년 11월 돌연 눈썹과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조사 결과 한달 전 그가 옛 동료인 안드레이 루고보이를 만나 녹차를 마셨는데 그 녹차 속에 방사성 독극물 '폴로늄(polonium)'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루고보이는 이후 러시아 하원 의원이 됐으며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받았다.

총리와 질의 응답을 벌이는 영국 하원 의원들
영국 정부는 주권 국가인 자국의 땅에서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이 또다시 발생한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즉각 러시아 외교관 수 십 명을 추방했다. 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규칙에 입각한 국제 질서를 확고히 해야 한다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계속 자신들의 연루 의혹에 대해 부인할 뿐이다. 오히려 영국이 없는 일을 만든다며 발뺌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원래부터 앙숙이었던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최근 들어 더욱 악화일로를 겪고 있다.

21세기에 '새로운 냉전(冷戰)'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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