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성희롱’ 용어 정착시킨 애니타 힐 사건을 아십니까?

입력 2018.09.22 (08:01) 수정 2018.09.2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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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법관 후보 성폭력 의혹 ... 27년 전 '애니타 힐'사건 소환

미 정가가 배렛 캐버노 대법관 후보의 성폭력 의혹으로 격랑에 휩싸였다.
'36년 전 고등학교 시절 캐버노가 자신에게 성폭행 시도를 했다'고 주장하는 고교 동창 여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초 신원을 공개하지 않은 채 문제를 제기했던 해당 여성은 팔로알토대학 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틴 블래시 포드로 알려졌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면서 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진행하고 있는 상원 법사위는 결국 포드의 증언을 듣겠다며 예정돼있던 인준 투표를 연기한 상태다.

그런데, 이 사건이 1991년 '애니타 힐' 사건과 닮아 있다. 1991년 애티나 힐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이 자신의 상사였을 때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자행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그를 증언했다.

사회적으로 명망을 유지해온 대법관 후보에 대한 오래된 성폭력 의혹 제기, 강경 보수 대법관 후보로 9명 연방대법관의 지형을 보수 우세로 바꿔놓을 인물, 또 선거를 앞두고 파문이 벌어졌다는 점 등, 2사건은 여러 모로 빼닮았다.

27년 전 사건은, 애니타 힐의 용기있는 증언과 여성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후보가 상원에서 역대 최저 표 차인 찬성 52 대 반대 48로 종신 연방대법관에 인준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당시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의 토마스 인준은, 다음해인 1992년 선거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캐버노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까? 인준 여부와 11월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이 미 정치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베렛 캐버노 미 대법관 후보베렛 캐버노 미 대법관 후보

"직장 내 성희롱" 개념 정착시킨 기념비적 사건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보수 성향 흑인 대법관 후보 클래런스 토마스에 대한 상원 인준 청문회는 순조로와보였다. 그런데 인준투표만을 남겨둔 시점, 그에 대해 사전 검증을 실시한 FBI가 애니타 힐과 했던 짧은 인터뷰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힐이 말한 내용은 충격적이었고 논란에 휩싸인 상원 법사위는 인준 투표를 미루고 힐의 증언을 듣기로 했다.

1991년 10월 11일부터 3일이나 진행된, 미 전역에 TV 생중계되는 공개 증언을 수락한 용기있는 여성, 35살 애니타 힐의 증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저는 조용히 있는 게 더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을 말해달라는 위원회의 요청을 받고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과거 토마스가 정부 위원회 등에서 자신의 상관일 때 했던 성희롱 사례들을 증언했다.
힐은 "토마스가 내게 데이트를 나가자고 계속 요구했고 내가 답을 주지 않자 지속적으로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힐은 토마스가 "콜라 캔 속에 음모를 넣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성기 크기와 정력을 노골적으로 자랑하고, 각양각색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포르노 영상 장면들을 세세히 묘사했다는 등의 구체적인 증언을 내놨다.

토마스가 직속 상관이었기에 그런 발언들을 그저 참아낼 수밖에 없었던 전형적인 "직장 내 성희롱"이었다. 여성들이 일상적 성희롱 발언으로 어떤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힐의 증언이 일으킨 엄청난 사회적 관심과 논란으로,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상관 남성들의 부하 직원 여성에 대한 성적 희롱 문제가 미국에서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칼럼니스트 패트 라일리는 미 의회전문매체 <힐>에 기고한 글에서 "24살 때 TV를 통해 애니타 힐의 증언을 듣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그 때 모든 여성이 그런 성희롱을 경험했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던 것을 애니타 힐이 말했다"고 회고했다.

작가 레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부터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지만, 바로 이 애니타 힐의 '직장 내 성희롱' 증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야 미국에서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1991년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애니타 힐1991년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애니타 힐

전원 백인 남성 법사위 의원들, 오히려 애니타를 성희롱

그러나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 의원들은 오히려, 어려운 증언을 이어가고 있던 애니타 힐에게 더 큰 고통을 줬다고, 미국 언론들은 당시를 회상했다.

의원들은 힐이 "토마스가 '콜라 캔 발언' 같은 것을 했다"고 하자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겠어요, 나한테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되묻는 등 힐에게 성적인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힐의 심각한 증언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는 등 흑인여성인 힐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상원 법사위가, "힐의 증언은, 흑인 남성에 대한 편견을 이용한 고도의 공격"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한 토마스 후보의 주장에 무게를 싣고, 애니타를 적극적으로 반박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한 의원은 힐의 '콜라 캔'증언에 대해 "그게 꼭 데이트를 하자는 것이냐?"라고 토마스를 편들면서, 힐이 "과거 성희롱 관련 대법원 판결에 나온 포르노 배우 이름을 일부러 언급했다. 의도가 불순하다"고 공격했다.

또 다른 의원은, 힐이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한 데 대해 "한 검사가 '과대망상 증세'가 심각하면 거짓말을 하는데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힐을 정신병자로 몰아붙였는데, 그 검사라는 사람은 토마스의 변호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상원 법사위는 토마스 후보에 대해 유리한 발언을 하는 남성 동료는 추가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토마스에게 비슷한 성희롱을 당했다며 증언을 해주겠다고 나선 다른 여성들은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타임스지는 일부 의원들이 그 여성들을 어떻게 믿냐며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1992년 여성 정계 진출의 기폭제

3일 동안 진행된 애니타 힐의 청문회가 텔레비젼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미국 여성들은 전원 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원들이 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힐을 오히려 괴롭히고 비웃는 모습 등을 모두 지켜봤다.
100명 중 단 2명 뿐이던 여성 상원의원들은 청문회에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토마스 낙마를 요구하던 여성들의 집회는, 애니타 힐을 비난하는 거센 역풍 속에, 토마스를 엄호하는 거대한 기독교인들의 시위에 묻혔다.

미국 언론들은, '애니타 힐'사건이 미국 여성들에게, 여성들의 힘이 얼마나 취약한지,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웠다고 분석했다. 그 다음해에 치러진 중간 선거에는 사상 최대의 여성후보들이 출마했고, 여성 유권자들의 자각 속에 여성후보들이 사상 최대의 성과를 냈다. 28명이던 여성 연방하원 의원의 수가 47명으로, 2명이던 여성 상원의원의 수가 6명으로 늘어, 1992년은 '미 의회 여성의 해'라고 명명되기에 이른다.


"1992년 재연되나?" 캐버노 엄호하면서도 불안한 공화당

캐버노 대법관 후보는 포드의 성폭력 의혹 제기 전에도 이미 여성계로부터, 과거 미성년자 낙태에 반대 의견을 냈던 전력 등으로, 여성에 불리한 판결을 내릴 인물로 지목돼왔다. 미 여성계는, 연방대법원의 이념적 지형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뒤 진보 우세에서 보수 우세로 뒤바뀌면서, 향후 연방대법원이 이미 여성에게 유리하게 정착된 판결들을 뒤집을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여성계는 의회 구성 만큼은 진보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중간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과거 여성 관련 이슈들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검증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 관련 혐의를 공개 제기한 10여명의 여성 중 1명인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가 다음달 초 트럼프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 전모를 폭로하는 '완전한 폭로'를 출간하겠다고 예고했다. CNN 이달 여론조사에서 미국 여성 유권자의 67%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호의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이처럼 여성 유권자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으로부터 돌아서는 경향이 뚜렸하다. 공화당이 캐버노 후보를 엄호하면서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가 부각되는 게 불안한 이유다.

일각에서는 과거 애니타 힐 사건과 달리, 캐버노 후보 관련 성폭력 의혹은 캐버노와 포드 모두 '미성년자'일 때 벌어졌던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대법관 후보에 대한 인준 판단에서 과거 미성년자 시절에 일어난 일까지 들추어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미국인들이 캐버노 사건으로부터 애니타 힐 사건을 떠올리고 있고, '당시 미국 사회가 애니타 힐 사건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는 반성도 튀어나오고 있다. "1991년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며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그 결과를 캐버노 인준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물론 포드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포드 교수가 살해 협박 등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심 끝에 포드는, 상원 청문회 증언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익명 제보를 의도했던 터라 공개 증언은 준비가 안됐다며 FBI 조사를 받겠다던 포드가, 사회적 논란이 가중되면서 상원 증언에 나서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포드 측은 안전 강화, 언론 접근 보장, 증인 추가 등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다음 주 중 청문회에서 증언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비공개 증언 조건은 없었다. 과거 한 역사를 바꿀 정도의 파문을 일으킨 애니타 힐의 증언처럼 포드의 증언도 생중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36년 전 고등학교 시절 성폭행 시도 혐의'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간선거를 한달 반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강경 보수 대법관 후보의 성폭력 혐의 논란이 커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공화당에 불리해보인다. 특히 '애니타 힐 사건의 실수'를 반성하는 기류까지 더해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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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8-09-22 15: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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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법관 후보 성폭력 의혹 ... 27년 전 '애니타 힐'사건 소환

미 정가가 배렛 캐버노 대법관 후보의 성폭력 의혹으로 격랑에 휩싸였다.
'36년 전 고등학교 시절 캐버노가 자신에게 성폭행 시도를 했다'고 주장하는 고교 동창 여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초 신원을 공개하지 않은 채 문제를 제기했던 해당 여성은 팔로알토대학 심리학과 교수 크리스틴 블래시 포드로 알려졌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면서 대법관 인준 청문회를 진행하고 있는 상원 법사위는 결국 포드의 증언을 듣겠다며 예정돼있던 인준 투표를 연기한 상태다.

그런데, 이 사건이 1991년 '애니타 힐' 사건과 닮아 있다. 1991년 애티나 힐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이 자신의 상사였을 때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자행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그를 증언했다.

사회적으로 명망을 유지해온 대법관 후보에 대한 오래된 성폭력 의혹 제기, 강경 보수 대법관 후보로 9명 연방대법관의 지형을 보수 우세로 바꿔놓을 인물, 또 선거를 앞두고 파문이 벌어졌다는 점 등, 2사건은 여러 모로 빼닮았다.

27년 전 사건은, 애니타 힐의 용기있는 증언과 여성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후보가 상원에서 역대 최저 표 차인 찬성 52 대 반대 48로 종신 연방대법관에 인준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당시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의 토마스 인준은, 다음해인 1992년 선거에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캐버노 사건은 어떻게 전개될까? 인준 여부와 11월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이 미 정치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베렛 캐버노 미 대법관 후보
"직장 내 성희롱" 개념 정착시킨 기념비적 사건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온 보수 성향 흑인 대법관 후보 클래런스 토마스에 대한 상원 인준 청문회는 순조로와보였다. 그런데 인준투표만을 남겨둔 시점, 그에 대해 사전 검증을 실시한 FBI가 애니타 힐과 했던 짧은 인터뷰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힐이 말한 내용은 충격적이었고 논란에 휩싸인 상원 법사위는 인준 투표를 미루고 힐의 증언을 듣기로 했다.

1991년 10월 11일부터 3일이나 진행된, 미 전역에 TV 생중계되는 공개 증언을 수락한 용기있는 여성, 35살 애니타 힐의 증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저는 조용히 있는 게 더 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경험을 말해달라는 위원회의 요청을 받고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과거 토마스가 정부 위원회 등에서 자신의 상관일 때 했던 성희롱 사례들을 증언했다.
힐은 "토마스가 내게 데이트를 나가자고 계속 요구했고 내가 답을 주지 않자 지속적으로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힐은 토마스가 "콜라 캔 속에 음모를 넣었다"는 등의 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성기 크기와 정력을 노골적으로 자랑하고, 각양각색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포르노 영상 장면들을 세세히 묘사했다는 등의 구체적인 증언을 내놨다.

토마스가 직속 상관이었기에 그런 발언들을 그저 참아낼 수밖에 없었던 전형적인 "직장 내 성희롱"이었다. 여성들이 일상적 성희롱 발언으로 어떤 정신적 상처를 입을 수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힐의 증언이 일으킨 엄청난 사회적 관심과 논란으로,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상관 남성들의 부하 직원 여성에 대한 성적 희롱 문제가 미국에서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칼럼니스트 패트 라일리는 미 의회전문매체 <힐>에 기고한 글에서 "24살 때 TV를 통해 애니타 힐의 증언을 듣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며 "그 때 모든 여성이 그런 성희롱을 경험했지만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던 것을 애니타 힐이 말했다"고 회고했다.

작가 레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부터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지만, 바로 이 애니타 힐의 '직장 내 성희롱' 증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야 미국에서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1991년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애니타 힐
전원 백인 남성 법사위 의원들, 오히려 애니타를 성희롱

그러나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 의원들은 오히려, 어려운 증언을 이어가고 있던 애니타 힐에게 더 큰 고통을 줬다고, 미국 언론들은 당시를 회상했다.

의원들은 힐이 "토마스가 '콜라 캔 발언' 같은 것을 했다"고 하자 "구체적으로 묘사해주겠어요, 나한테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라고 되묻는 등 힐에게 성적인 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고, 힐의 심각한 증언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는 등 흑인여성인 힐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고 언론들은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상원 법사위가, "힐의 증언은, 흑인 남성에 대한 편견을 이용한 고도의 공격"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한 토마스 후보의 주장에 무게를 싣고, 애니타를 적극적으로 반박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한 의원은 힐의 '콜라 캔'증언에 대해 "그게 꼭 데이트를 하자는 것이냐?"라고 토마스를 편들면서, 힐이 "과거 성희롱 관련 대법원 판결에 나온 포르노 배우 이름을 일부러 언급했다. 의도가 불순하다"고 공격했다.

또 다른 의원은, 힐이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한 데 대해 "한 검사가 '과대망상 증세'가 심각하면 거짓말을 하는데도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 힐을 정신병자로 몰아붙였는데, 그 검사라는 사람은 토마스의 변호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상원 법사위는 토마스 후보에 대해 유리한 발언을 하는 남성 동료는 추가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토마스에게 비슷한 성희롱을 당했다며 증언을 해주겠다고 나선 다른 여성들은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타임스지는 일부 의원들이 그 여성들을 어떻게 믿냐며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1992년 여성 정계 진출의 기폭제

3일 동안 진행된 애니타 힐의 청문회가 텔레비젼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미국 여성들은 전원 백인 남성들로 구성된 상원 법사위원들이 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힐을 오히려 괴롭히고 비웃는 모습 등을 모두 지켜봤다.
100명 중 단 2명 뿐이던 여성 상원의원들은 청문회에 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토마스 낙마를 요구하던 여성들의 집회는, 애니타 힐을 비난하는 거센 역풍 속에, 토마스를 엄호하는 거대한 기독교인들의 시위에 묻혔다.

미국 언론들은, '애니타 힐'사건이 미국 여성들에게, 여성들의 힘이 얼마나 취약한지, 여성들의 정계 진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웠다고 분석했다. 그 다음해에 치러진 중간 선거에는 사상 최대의 여성후보들이 출마했고, 여성 유권자들의 자각 속에 여성후보들이 사상 최대의 성과를 냈다. 28명이던 여성 연방하원 의원의 수가 47명으로, 2명이던 여성 상원의원의 수가 6명으로 늘어, 1992년은 '미 의회 여성의 해'라고 명명되기에 이른다.


"1992년 재연되나?" 캐버노 엄호하면서도 불안한 공화당

캐버노 대법관 후보는 포드의 성폭력 의혹 제기 전에도 이미 여성계로부터, 과거 미성년자 낙태에 반대 의견을 냈던 전력 등으로, 여성에 불리한 판결을 내릴 인물로 지목돼왔다. 미 여성계는, 연방대법원의 이념적 지형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뒤 진보 우세에서 보수 우세로 뒤바뀌면서, 향후 연방대법원이 이미 여성에게 유리하게 정착된 판결들을 뒤집을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여성계는 의회 구성 만큼은 진보적으로 바꿔야 한다며 중간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과거 여성 관련 이슈들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검증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성 관련 혐의를 공개 제기한 10여명의 여성 중 1명인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가 다음달 초 트럼프 대통령과의 부적절한 관계 전모를 폭로하는 '완전한 폭로'를 출간하겠다고 예고했다. CNN 이달 여론조사에서 미국 여성 유권자의 67%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호의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30%에 불과했다.

이처럼 여성 유권자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으로부터 돌아서는 경향이 뚜렸하다. 공화당이 캐버노 후보를 엄호하면서도,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문제가 부각되는 게 불안한 이유다.

일각에서는 과거 애니타 힐 사건과 달리, 캐버노 후보 관련 성폭력 의혹은 캐버노와 포드 모두 '미성년자'일 때 벌어졌던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대법관 후보에 대한 인준 판단에서 과거 미성년자 시절에 일어난 일까지 들추어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미국인들이 캐버노 사건으로부터 애니타 힐 사건을 떠올리고 있고, '당시 미국 사회가 애니타 힐 사건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는 반성도 튀어나오고 있다. "1991년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며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그 결과를 캐버노 인준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물론 포드가 거짓말을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포드 교수가 살해 협박 등 비난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심 끝에 포드는, 상원 청문회 증언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다. 익명 제보를 의도했던 터라 공개 증언은 준비가 안됐다며 FBI 조사를 받겠다던 포드가, 사회적 논란이 가중되면서 상원 증언에 나서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포드 측은 안전 강화, 언론 접근 보장, 증인 추가 등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다음 주 중 청문회에서 증언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비공개 증언 조건은 없었다. 과거 한 역사를 바꿀 정도의 파문을 일으킨 애니타 힐의 증언처럼 포드의 증언도 생중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36년 전 고등학교 시절 성폭행 시도 혐의'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한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간선거를 한달 반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강경 보수 대법관 후보의 성폭력 혐의 논란이 커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공화당에 불리해보인다. 특히 '애니타 힐 사건의 실수'를 반성하는 기류까지 더해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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