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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상처입은 내 마음은 누가 구조해 주나요?” 소방관 감정노동 첫 조사
입력 2018.09.23 (10:05) 수정 2018.09.27 (17:48) 취재후
[취재후] “상처입은 내 마음은 누가 구조해 주나요?” 소방관 감정노동 첫 조사
여러분은 '감정노동자' 입니까?

'감정노동'이라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1983년 미국의 사회학자 러셀 훅실드가 저서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인데요.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억누르고, 업무상 정해진 감정만 표현하는 일을 말합니다.

고용노동부는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활동이 직무의 50%를 넘을 경우를 감정 노동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전체 임금 근로자의 31~41%에 해당하는 560만~740만 명 정도가 감정 노동자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노동자는 항공기 승무원, 전화상담사, 호텔 종사자와 백화점 판매업자 등 서비스직 종사자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요양 보호사나 보육교사, 민원 업무 담당자까지 감정 노동 직업군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감정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은?

그렇다면 감정노동 강도가 가장 센 직업은 무엇일까요? 2012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 종사자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항공기 승무원이 심각도 5점 만점에 4.7점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홍보도우미(4.6점), 휴대전화 판매원(4.5점), 장례지도사(4.49점)가 뒤를 이었습니다.

2015년 한국고용정보원이 730개 직업 종사자 2만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는 텔레마케터의 감정노동 강도가 15점 만점에 12.51점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호텔관리자·네일아티스트(12.26점), 중독치료사(11.97점), 창업컨설턴트(11.94점) 순이었습니다.

서비스직보다 심각한 소방관 '감정노동'

하지만 여기에 빠진 직업이 하나 있습니다. 화재나 사고 현장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입니다.

소방청과 분당서울대병원이 2018년 2월 중순부터 4주간 전국의 소방관 45,719명을 대상으로 한 정신 건강을 전수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우선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부당하거나 막무가내식 민원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물었는데요. 감정 노동에 심각하게 노출된 관리 필요군이 전체 소방관의 45.5%인 20,822명에 달했습니다. 서비스직 등 일반 감정노동 직군의 관리 필요군 비율(25%)보다 1.82배나 높았습니다.

감정노동으로 심리적 손상을 당했다는 소방관들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전체 소방관의 29.1%인 13,284명이 민원인을 대할 때 자존감이 떨어져 마음의 상처를 받았거나, 감정적으로 힘들었다고 답했습니다. 일반 감정노동 직군의 관리 필요군 비율(25%)보다 1.16배 높은 수치입니다.


전문가들은 소방관들은 긴박한 재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고객을 상대하는 일반 서비스직 감정노동자들보다 감정노동 과부하가 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취재진이 만난 7년 차 구급대원 역시 취객의 폭행과 폭언이 일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신고자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응급조치해야 하기 때문에 꾹 참고 감정을 누그러뜨린다고 말했습니다.

한 23년 차 구조대원도 현장에서 무리한 민원 요구를 거절했다가 욕설이나 폭언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사고 피해를 본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듣고 참는다고 말합니다.

"사자에 쫓기는 얼룩말"

이번 조사를 진행한 분당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박혜연 임상 심리전문가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초원에서 얼룩말이 평화롭게 달려가고 있는데, 저쪽에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러 뛰어온단 말이죠. 그때 얼룩말 몸에서는 시스템이 막 활성화되면서 스트레스 호르몬도 나오고 심장박동 변이도 생기는데요. 그런 반응이 감정노동을 겪은 사람한테 일어나요."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노동이 소방관들이 겪는 정신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감정노동으로 심리적 고갈 상태가 되면 퇴근을 해도 헤어나오기 쉽지 않고,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해 우울증이나 수면장애, 알코올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감정노동은 또 참혹한 외상 사건에 노출되면 겪을 수 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소방관들의 외상사건 노출경험은 연평균 7.7회, 15번 이상 외상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15.2%에 달하는데요. 이런 외상사건 노출 경험에 감정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 PTSD 증상이 악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PTSD 증상이 심각할수록 극단적인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어 더 문제입니다. 이번 조사에서도 지난 1년 동안 한 번 이상 극단적인 생각을 해봤다고 답한 소방관이 전체의 10.7%인 4,874명이었습니다. 2016년 일반인 5,1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같은 질문에 2.9%만 답했으니까, 소방관들의 마음의 병이 심각한 수준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소방관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상담과 치료도 중요하겠지만, 국민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나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니까", "내가 낸 세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라는 생각에 소방관들을 너무 쉽게 대하고 과도한 요구를 하진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연관기사] [뉴스9] [단독] “참는 게 일상”…소방관 감정노동 ‘서비스업의 2배’
  • [취재후] “상처입은 내 마음은 누가 구조해 주나요?” 소방관 감정노동 첫 조사
    • 입력 2018.09.23 (10:05)
    • 수정 2018.09.27 (17:48)
    취재후
[취재후] “상처입은 내 마음은 누가 구조해 주나요?” 소방관 감정노동 첫 조사
여러분은 '감정노동자' 입니까?

'감정노동'이라는 말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1983년 미국의 사회학자 러셀 훅실드가 저서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에서 처음 언급한 개념인데요. 노동자가 자신의 감정 상태를 억누르고, 업무상 정해진 감정만 표현하는 일을 말합니다.

고용노동부는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활동이 직무의 50%를 넘을 경우를 감정 노동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전체 임금 근로자의 31~41%에 해당하는 560만~740만 명 정도가 감정 노동자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감정노동자는 항공기 승무원, 전화상담사, 호텔 종사자와 백화점 판매업자 등 서비스직 종사자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요양 보호사나 보육교사, 민원 업무 담당자까지 감정 노동 직업군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감정노동' 강도가 높은 직업은?

그렇다면 감정노동 강도가 가장 센 직업은 무엇일까요? 2012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3개 직업 종사자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항공기 승무원이 심각도 5점 만점에 4.7점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홍보도우미(4.6점), 휴대전화 판매원(4.5점), 장례지도사(4.49점)가 뒤를 이었습니다.

2015년 한국고용정보원이 730개 직업 종사자 2만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는 텔레마케터의 감정노동 강도가 15점 만점에 12.51점으로 가장 높았습니다. 호텔관리자·네일아티스트(12.26점), 중독치료사(11.97점), 창업컨설턴트(11.94점) 순이었습니다.

서비스직보다 심각한 소방관 '감정노동'

하지만 여기에 빠진 직업이 하나 있습니다. 화재나 사고 현장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입니다.

소방청과 분당서울대병원이 2018년 2월 중순부터 4주간 전국의 소방관 45,719명을 대상으로 한 정신 건강을 전수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우선 소방관들이 현장에서 부당하거나 막무가내식 민원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물었는데요. 감정 노동에 심각하게 노출된 관리 필요군이 전체 소방관의 45.5%인 20,822명에 달했습니다. 서비스직 등 일반 감정노동 직군의 관리 필요군 비율(25%)보다 1.82배나 높았습니다.

감정노동으로 심리적 손상을 당했다는 소방관들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전체 소방관의 29.1%인 13,284명이 민원인을 대할 때 자존감이 떨어져 마음의 상처를 받았거나, 감정적으로 힘들었다고 답했습니다. 일반 감정노동 직군의 관리 필요군 비율(25%)보다 1.16배 높은 수치입니다.


전문가들은 소방관들은 긴박한 재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고객을 상대하는 일반 서비스직 감정노동자들보다 감정노동 과부하가 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취재진이 만난 7년 차 구급대원 역시 취객의 폭행과 폭언이 일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선 신고자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고, 응급조치해야 하기 때문에 꾹 참고 감정을 누그러뜨린다고 말했습니다.

한 23년 차 구조대원도 현장에서 무리한 민원 요구를 거절했다가 욕설이나 폭언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건·사고 피해를 본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듣고 참는다고 말합니다.

"사자에 쫓기는 얼룩말"

이번 조사를 진행한 분당서울대병원 공공의료사업단 박혜연 임상 심리전문가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초원에서 얼룩말이 평화롭게 달려가고 있는데, 저쪽에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러 뛰어온단 말이죠. 그때 얼룩말 몸에서는 시스템이 막 활성화되면서 스트레스 호르몬도 나오고 심장박동 변이도 생기는데요. 그런 반응이 감정노동을 겪은 사람한테 일어나요."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노동이 소방관들이 겪는 정신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감정노동으로 심리적 고갈 상태가 되면 퇴근을 해도 헤어나오기 쉽지 않고,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해 우울증이나 수면장애, 알코올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감정노동은 또 참혹한 외상 사건에 노출되면 겪을 수 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소방관들의 외상사건 노출경험은 연평균 7.7회, 15번 이상 외상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15.2%에 달하는데요. 이런 외상사건 노출 경험에 감정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더해지면 PTSD 증상이 악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PTSD 증상이 심각할수록 극단적인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어 더 문제입니다. 이번 조사에서도 지난 1년 동안 한 번 이상 극단적인 생각을 해봤다고 답한 소방관이 전체의 10.7%인 4,874명이었습니다. 2016년 일반인 5,1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같은 질문에 2.9%만 답했으니까, 소방관들의 마음의 병이 심각한 수준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소방관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상담과 치료도 중요하겠지만, 국민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나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니까", "내가 낸 세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니까"라는 생각에 소방관들을 너무 쉽게 대하고 과도한 요구를 하진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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