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성소수자’를 ‘치한’에 빗댄 日잡지, 역풍에 휴간

입력 2018.09.27 (11:16) 수정 2018.09.27 (16:2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최근 일본의 유명 월간지가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논리적 비판이 아니라 원색적인 비난이 포함된 글이라서 문제가 커졌다. 여론의 반발이 커지자, 출판사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휴간을 선언했다.

여당 의원, “성적소수자는 생산성 없다”주장

유명 출판사 ‘신초(新潮社)'의 시사월간지 ‘신초45’는 지난 7월 발간한 '8월호'에 집권 자민당 스기타 미오 중의원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스기타 의원은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로 불리는 성적소수자에 대해 "그들은, 그녀들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 즉, 생산성이 없다. 그쪽에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폭발성 강한 이슈를 건드린 셈이다.


관련 단체들이 자민당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성명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들은 정치쟁점화에 나섰고, 여당에서는 옹호와 우려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무지, 몰이해, 악의, 차별, 편견, 무자격, 인권무시’등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자민당은 이례적으로 ‘주의하도록 지도했다’고 공표했다. 스기타 의원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서도 발언을 번복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성소수자처럼 치한 권리도 보호하라'는 궤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던 논란은 잡지사 측이 2차 공격에 나서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확대됐다. 9월 18일 발매된 '신조45, 10월호'는 ‘그렇게 이상한가, 스기타 미오의 논문’이라는 제목의 특별기획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스기타 의원의 집필 의도를 옹호하고 비난을 논박하는 선에 그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극우인사 등이 포함된 필진은 7명. 특히 '오가와'라는 문예평론가의 난폭한 기고문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는 '(LGBT의 권리를 옹호한다면), 치한 행위는 제어 불가능한 뇌 유래 증상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지는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치한의 권리를 보장해야...LGBT가 논단을 활보하는 풍경은 나에게 죽을 만큼의 충격"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공중변소의 낙서다" "왜 저런 비열한 차별에 가담하나" 등 작가들의 실명 비판이 잇따랐다. 서점가에서는 불매운동 분위기가 퍼졌다. 같은 출판사의 문예서적 편집부는 트윗을 통해, 최신호에 대한 작가의 비판 등을 리트윗했다.

21일‘사토 다카노부' 신초사 사장은 문제의 기사에 대해 “상식을 너무 벗어난 편견과 인식 부족의 표현이 있었다. 차별적 표현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파문은 더 커졌다. 도쿄 본사 앞 대형 광고판에 조롱하는 낙서까지 등장했다.

상업적 발상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다뤘나?

결국 신초사는 25일 백기를 들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한 뒤, 잡지를 휴간한다고 발표했다. 회사 측은 사과문을 통해 “당사가 발행하는 '신초45' 는 1985년 창간 이후, 수기·일기·자서전 등의 논픽션과 다양한 의견을 게재하는 종합 월간지로서 언론 활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최근 몇 년간 판매부수 침체에 직면해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편집에 무리가 생겼습니다. 기획의 엄격한 검증과 충분한 원고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또 “편집 체제를 충분히 정비하지 않고 '신초 45'를 계속 간행해온 데 대해 깊은 반성을 담아 이번에 휴간을 결정했습니다. 향후 사내 편집 체제를 재검토하고 신뢰할만한 출판 활동을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특별히 이념적 정체성의 발로라기보다는 판매 부수 확장이라는 경제적 목적으로 자극적 소재를 다루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잡지는 다음 달부터 당분간 발간되지 않는다. 사장과 편집 담당 임원에 대해서는, 석 달 동안 감봉 10%의 처분을 내려졌다. '신초45'가 휴간을 발표하던 날 밤, 도쿄 신주쿠 신초사 본사 앞에서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깔의 우산을 든 시민 100여 명이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다.

성소수자 담론, '개방됐다'는 일본도 난제

일본에서 성소수자 관련 담론은 서구사회에 버금갈 만큼 개방적이다. 성소수자 문제는 대중문화 속에서도 낯설지 않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적극 옹호하지도, 구태여 부인하지도 않고, 그냥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를 마케팅 등 기업 경영에 어떻게 반영할까 고민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대도시 유통매장에는 남녀가 아닌 ‘제3의 성’을 상징하는 화장실이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결혼제도 등 법제에서만큼은 다르다. 일본에서 법적으로 혼인은 여전히 ‘남녀의 만남'이다. 일부 지자체 또는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동성혼에 대해 혼인에 준하는 혜택을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다양성의 극단적 존중',‘고도의 개인주의'등 일본 특유의 문화적 흐름을 타고 성적소수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 역풍을 부르는 극단적 투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법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건 성소수자에 대한 담론은 열려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지 않다. 화두를 섣불리 꺼내는 순간, 특정 방향에 대한 찬반의 선택을 강요받기 쉽다. 자칫 하면 사상 검증, 혹은 성적 정체성 검증을 요구받기도 한다. 논의를 피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체적 존재’와 ‘법적 지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는 일본은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시간 진통을 겪어오고 있다. 정답이 있을까? '인권'이라는 단어 만으로 해답을 낼 수 있을까? 예산 지원의 적절성과 형평성 논란까지 더해지면 성소수자 담론은 일본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난제이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리포트] ‘성소수자’를 ‘치한’에 빗댄 日잡지, 역풍에 휴간
    • 입력 2018-09-27 11:16:18
    • 수정2018-09-27 16:26:24
    특파원 리포트
최근 일본의 유명 월간지가 성소수자를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가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논리적 비판이 아니라 원색적인 비난이 포함된 글이라서 문제가 커졌다. 여론의 반발이 커지자, 출판사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휴간을 선언했다.

여당 의원, “성적소수자는 생산성 없다”주장

유명 출판사 ‘신초(新潮社)'의 시사월간지 ‘신초45’는 지난 7월 발간한 '8월호'에 집권 자민당 스기타 미오 중의원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스기타 의원은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로 불리는 성적소수자에 대해 "그들은, 그녀들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 즉, 생산성이 없다. 그쪽에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비판에서 가장 폭발성 강한 이슈를 건드린 셈이다.


관련 단체들이 자민당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성명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야당들은 정치쟁점화에 나섰고, 여당에서는 옹호와 우려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무지, 몰이해, 악의, 차별, 편견, 무자격, 인권무시’등 날 선 비난이 쏟아졌다. 자민당은 이례적으로 ‘주의하도록 지도했다’고 공표했다. 스기타 의원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서도 발언을 번복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성소수자처럼 치한 권리도 보호하라'는 궤변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듯했던 논란은 잡지사 측이 2차 공격에 나서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확대됐다. 9월 18일 발매된 '신조45, 10월호'는 ‘그렇게 이상한가, 스기타 미오의 논문’이라는 제목의 특별기획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스기타 의원의 집필 의도를 옹호하고 비난을 논박하는 선에 그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극우인사 등이 포함된 필진은 7명. 특히 '오가와'라는 문예평론가의 난폭한 기고문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는 '(LGBT의 권리를 옹호한다면), 치한 행위는 제어 불가능한 뇌 유래 증상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지는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치한의 권리를 보장해야...LGBT가 논단을 활보하는 풍경은 나에게 죽을 만큼의 충격"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공중변소의 낙서다" "왜 저런 비열한 차별에 가담하나" 등 작가들의 실명 비판이 잇따랐다. 서점가에서는 불매운동 분위기가 퍼졌다. 같은 출판사의 문예서적 편집부는 트윗을 통해, 최신호에 대한 작가의 비판 등을 리트윗했다.

21일‘사토 다카노부' 신초사 사장은 문제의 기사에 대해 “상식을 너무 벗어난 편견과 인식 부족의 표현이 있었다. 차별적 표현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 파문은 더 커졌다. 도쿄 본사 앞 대형 광고판에 조롱하는 낙서까지 등장했다.

상업적 발상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다뤘나?

결국 신초사는 25일 백기를 들었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한 뒤, 잡지를 휴간한다고 발표했다. 회사 측은 사과문을 통해 “당사가 발행하는 '신초45' 는 1985년 창간 이후, 수기·일기·자서전 등의 논픽션과 다양한 의견을 게재하는 종합 월간지로서 언론 활동을 계속해 왔습니다. 최근 몇 년간 판매부수 침체에 직면해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편집에 무리가 생겼습니다. 기획의 엄격한 검증과 충분한 원고 검사를 소홀히 한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또 “편집 체제를 충분히 정비하지 않고 '신초 45'를 계속 간행해온 데 대해 깊은 반성을 담아 이번에 휴간을 결정했습니다. 향후 사내 편집 체제를 재검토하고 신뢰할만한 출판 활동을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밝혔다.


특별히 이념적 정체성의 발로라기보다는 판매 부수 확장이라는 경제적 목적으로 자극적 소재를 다루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잡지는 다음 달부터 당분간 발간되지 않는다. 사장과 편집 담당 임원에 대해서는, 석 달 동안 감봉 10%의 처분을 내려졌다. '신초45'가 휴간을 발표하던 날 밤, 도쿄 신주쿠 신초사 본사 앞에서는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색깔의 우산을 든 시민 100여 명이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다.

성소수자 담론, '개방됐다'는 일본도 난제

일본에서 성소수자 관련 담론은 서구사회에 버금갈 만큼 개방적이다. 성소수자 문제는 대중문화 속에서도 낯설지 않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적극 옹호하지도, 구태여 부인하지도 않고, 그냥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를 마케팅 등 기업 경영에 어떻게 반영할까 고민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대도시 유통매장에는 남녀가 아닌 ‘제3의 성’을 상징하는 화장실이 이미 등장했다.


그러나 결혼제도 등 법제에서만큼은 다르다. 일본에서 법적으로 혼인은 여전히 ‘남녀의 만남'이다. 일부 지자체 또는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동성혼에 대해 혼인에 준하는 혜택을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다양성의 극단적 존중',‘고도의 개인주의'등 일본 특유의 문화적 흐름을 타고 성적소수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사회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됐다. 역풍을 부르는 극단적 투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법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건 성소수자에 대한 담론은 열려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지 않다. 화두를 섣불리 꺼내는 순간, 특정 방향에 대한 찬반의 선택을 강요받기 쉽다. 자칫 하면 사상 검증, 혹은 성적 정체성 검증을 요구받기도 한다. 논의를 피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체적 존재’와 ‘법적 지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는 일본은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시간 진통을 겪어오고 있다. 정답이 있을까? '인권'이라는 단어 만으로 해답을 낼 수 있을까? 예산 지원의 적절성과 형평성 논란까지 더해지면 성소수자 담론은 일본 사회에서도 쉽지 않은 난제이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