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추석 대작 4편 중 3편 손해봤다…영화계에 주는 신호는?

입력 2018.10.12 (10:39) 수정 2018.10.12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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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도박이었다. 지난 추석 한국영화 경쟁작 4편 중 3편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내려가는 분위기다. '안시성' 1편만 가까스로 손실을 면한 정도다.


현재 '암수살인' '베놈' 등 10월 개봉작들이 선전하고 있고 '퍼스트맨' 등 기대작들도 줄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황이다. 추석 개봉작들에 유의미한 수치가 더해지기는 어렵다. '안시성'은 앞으로 해외 판권과 VOD 판매 등을 합쳐 본전 정도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연관기사] 추석 겨냥 대작 영화 ‘봇물’…“관객 못 끌면 망한다”

개봉 전, 기자와 만난 제작자·감독 등 4편 관계자들의 말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결 같았다. "상대 경쟁작이 한 주라도 개봉 시기를 피해 줄 줄 알았다"며 "맞붙는다면 우리가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성적표가 나온 지금 "매일 같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며 "관객이 분산된 영향이 치명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추석 시즌 한 주 앞서 개봉한 '물괴'가 일찌감치 외면받으면서 경쟁이 덜했다는 게 다른 작품들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재 4편의 누적 관객 총합은 1천만 명 남짓. 열흘 연휴가 이어진 지난해 추석의 경우, 경쟁작 3편('범죄도시', '아이 캔 스피크', '남한산성')이 나눠 가진 관객이 약 1,300만 명이다. 한국 인구와 연휴 기간을 감안할 때 추석 개봉작의 티켓을 끊을 인구가 더 늘어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관객으로부터 일찌감치 외면받으며 관객 72만 명에 그친 '물괴'


왜 이런 도박을 했을까. 최근 몇 해 사이 추석 개봉작, 특히 시대극의 실적이 제작·투자자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준 영향이 크다.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1,230만)를 비롯해 이듬해 '관상'(913만), 2016년 '밀정'(750만) 등이 투자시장에 호루라기를 불었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지갑 잘 여는 50~60대 인구 층이 두꺼워진 것도 상품으로서 사극에 돈이 몰린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다 인건비, 장비, 특수효과 등 제작비 상승 요인이 한둘이 아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명당' '협상' 정도의 영화는 총제작비 70억~80억 원이면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고 했다. 손익분기점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소들이 압축된 결과물이 올 추석 시장이다.

그 결과 감독의 창의력보다 제작자의 기획력에 무게를 실은 사극 3편이 추석 시장 한 라운드에서 맞부딪혔다. 작가 정신보다 돈의 입김이 작품 곳곳에 스몄다. 조선 시대에 괴수가 등장하는 설정, 20만 대 5천이 싸워 우리 편 5천이 이긴다는 설정, 영화 '관상'의 흥행을 이어받아 땅의 관상을 본다는 설정…. '컨셉트 승부'였다. 이들 3편에 투입된 제작비를 합치면 약 465억 원이다. 지난해 흥행·비평 양면에서 성공한 '아이 캔 스피크'를 10편쯤 만들 수 있는 돈이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그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문화 다양성에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4편 중 유일한 현대극인 '협상'이 '범죄 오락 영화'를 표방하며 상투적인 설정을 이어간 점도 예외는 아니다. 첫 장면부터 미니스커트에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 경찰이, 얼굴에 악당이라고 써있는 청와대 권력자와 맞서는 뼈대로는 눈높이 올라간 관객들의 긴장감을 잡아당길 수가 없었다. 물론 상품 기획으로서 관객 수준을 얕잡아본 사례로는 '물괴'가 금메달이다.


'안시성'은 올해 한국영화 흥행 2위지만 아직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한국 영화사에 기이한 사례로 기록될 또 한 가지가 있다. '안시성'이 올해 한국영화 흥행 2위에 오르고도 손익분기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빈약한 서사 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의 상품성이 손익분기점에 턱걸이할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CG로 도배하다시피 한 흥행 1위 '신과 함께-인과 연'에 비교해도 '안시성'은 대규모 보조 출연자와 오프라인 장비를 동원해 상대적으로 정교한 전투 액션을 연출한 성과가 있다. 제작비 220억 원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의 이번 본전치기는, 훌쩍 올라간 손익분기점이 대작들의 과당 경쟁과 만난 결과다. 앞으로 제작·투자자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시그널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대형 프로젝트들이 흔들리면 업계 전체가 요동치는 게 한국 영화산업이다. 위험 감수를 회피하기 마련인 자본은 실패 경험이 쌓일수록 안정적인 흥행 코드에 기대게 된다. 창의적인 작가·감독의 자리는 좁아진다. 초대형 아니면 초저예산 영화만 남는 길이다. 이미 그 길에 접어든 사례로는 가까운 일본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성수기·비수기 가리지 않고 고른 득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가는 한국영화의 퇴행 신호가 안타까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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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추석 대작 4편 중 3편 손해봤다…영화계에 주는 신호는?
    • 입력 2018-10-12 10:39:13
    • 수정2018-10-12 16:55:47
    취재후·사건후
애초에 도박이었다. 지난 추석 한국영화 경쟁작 4편 중 3편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내려가는 분위기다. '안시성' 1편만 가까스로 손실을 면한 정도다.


현재 '암수살인' '베놈' 등 10월 개봉작들이 선전하고 있고 '퍼스트맨' 등 기대작들도 줄줄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상황이다. 추석 개봉작들에 유의미한 수치가 더해지기는 어렵다. '안시성'은 앞으로 해외 판권과 VOD 판매 등을 합쳐 본전 정도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연관기사] 추석 겨냥 대작 영화 ‘봇물’…“관객 못 끌면 망한다”

개봉 전, 기자와 만난 제작자·감독 등 4편 관계자들의 말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결 같았다. "상대 경쟁작이 한 주라도 개봉 시기를 피해 줄 줄 알았다"며 "맞붙는다면 우리가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성적표가 나온 지금 "매일 같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며 "관객이 분산된 영향이 치명적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추석 시즌 한 주 앞서 개봉한 '물괴'가 일찌감치 외면받으면서 경쟁이 덜했다는 게 다른 작품들 입장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현재 4편의 누적 관객 총합은 1천만 명 남짓. 열흘 연휴가 이어진 지난해 추석의 경우, 경쟁작 3편('범죄도시', '아이 캔 스피크', '남한산성')이 나눠 가진 관객이 약 1,300만 명이다. 한국 인구와 연휴 기간을 감안할 때 추석 개봉작의 티켓을 끊을 인구가 더 늘어나기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관객으로부터 일찌감치 외면받으며 관객 72만 명에 그친 '물괴'


왜 이런 도박을 했을까. 최근 몇 해 사이 추석 개봉작, 특히 시대극의 실적이 제작·투자자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를 준 영향이 크다.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1,230만)를 비롯해 이듬해 '관상'(913만), 2016년 '밀정'(750만) 등이 투자시장에 호루라기를 불었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지갑 잘 여는 50~60대 인구 층이 두꺼워진 것도 상품으로서 사극에 돈이 몰린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다 인건비, 장비, 특수효과 등 제작비 상승 요인이 한둘이 아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명당' '협상' 정도의 영화는 총제작비 70억~80억 원이면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고 했다. 손익분기점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요소들이 압축된 결과물이 올 추석 시장이다.

그 결과 감독의 창의력보다 제작자의 기획력에 무게를 실은 사극 3편이 추석 시장 한 라운드에서 맞부딪혔다. 작가 정신보다 돈의 입김이 작품 곳곳에 스몄다. 조선 시대에 괴수가 등장하는 설정, 20만 대 5천이 싸워 우리 편 5천이 이긴다는 설정, 영화 '관상'의 흥행을 이어받아 땅의 관상을 본다는 설정…. '컨셉트 승부'였다. 이들 3편에 투입된 제작비를 합치면 약 465억 원이다. 지난해 흥행·비평 양면에서 성공한 '아이 캔 스피크'를 10편쯤 만들 수 있는 돈이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그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문화 다양성에 아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4편 중 유일한 현대극인 '협상'이 '범죄 오락 영화'를 표방하며 상투적인 설정을 이어간 점도 예외는 아니다. 첫 장면부터 미니스커트에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 경찰이, 얼굴에 악당이라고 써있는 청와대 권력자와 맞서는 뼈대로는 눈높이 올라간 관객들의 긴장감을 잡아당길 수가 없었다. 물론 상품 기획으로서 관객 수준을 얕잡아본 사례로는 '물괴'가 금메달이다.


'안시성'은 올해 한국영화 흥행 2위지만 아직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한국 영화사에 기이한 사례로 기록될 또 한 가지가 있다. '안시성'이 올해 한국영화 흥행 2위에 오르고도 손익분기점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빈약한 서사 등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의 상품성이 손익분기점에 턱걸이할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CG로 도배하다시피 한 흥행 1위 '신과 함께-인과 연'에 비교해도 '안시성'은 대규모 보조 출연자와 오프라인 장비를 동원해 상대적으로 정교한 전투 액션을 연출한 성과가 있다. 제작비 220억 원이라는 초대형 프로젝트의 이번 본전치기는, 훌쩍 올라간 손익분기점이 대작들의 과당 경쟁과 만난 결과다. 앞으로 제작·투자자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시그널을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대형 프로젝트들이 흔들리면 업계 전체가 요동치는 게 한국 영화산업이다. 위험 감수를 회피하기 마련인 자본은 실패 경험이 쌓일수록 안정적인 흥행 코드에 기대게 된다. 창의적인 작가·감독의 자리는 좁아진다. 초대형 아니면 초저예산 영화만 남는 길이다. 이미 그 길에 접어든 사례로는 가까운 일본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성수기·비수기 가리지 않고 고른 득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로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가는 한국영화의 퇴행 신호가 안타까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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