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0 to 8,848’…김창호 대장을 추억하며

입력 2018.10.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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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인도, 자전거 질주하는 김창호 대장

무동력으로 바다에서 에베레스트까지

2013년 3월 중순 김창호 대장은 인도 벵골만 갠지스 강 하류에서 카약 노를 젓고 있었다. 바다 수면이니 당연히 위치는 해발은 0m다. 서성호, 전푸르나 등과 팀을 이룬 김 대장은 닷새 동안 160여km를 노를 저어 인도 북동부 도시 콜카타에 도달했다. 그리고 거기부터는 자전거를 타며 북진해 갔다. 그리고 1,000km쯤 달린 끝에 네팔 국경지대 툼링타르에 도착했다. 이어 트레킹으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마침내 5월 20일 정상에 오르며 무산소(산소 공기통을 휴대하지 않음) 14좌(히말라야 산맥 8천m급 자이언트 봉우리 14개)를 모두 등정했다. 해발 0m에서 출발해 지구 꼭대기 8,848m를 밟은 것이다(당시 등반 기치: From 0 to 8,848). 전기나 석유 동력에 의존하지 않고 무동력, 즉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만 해내겠다는 그의 말을 실천한 것이다.

[연관 기사] [스포츠9] ‘무산소 14좌의 조건’ 김창호, 색다른 원정 (2013년 3월 28일)

(좌) 김창호 (우) 박영석(좌) 김창호 (우) 박영석

김창호를 추억하면 박영석 대장이 생각난다.

2005년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히말라야 14좌 완등+남북극점 도달+7대륙 최고봉 등정)을 달성한 박영석 대장은 2011년 10월, 14좌 중의 하나인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서 코리안 신 루트를 개척하다가 대원 2명(강기석, 신동민)과 실종됐다. 대형 눈사태로 인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세 사람을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이 펼쳐졌다. 수십m 깊이의 ‘악마의 입’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 아래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 세 사람을 찾는 수색도 진행됐다. 그 작업의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김 대장이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 산악인의 실종 사건에 자처해서 한국에서 네팔로 서둘러 날아가 초기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크레바스 상층부 또는 내부의 얼음이 깨지거나 무너질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김 대장은 이를 무릅쓰고 크레바스 아래로 내려가 수색을 진행했다. 그러나 박 대장 등 세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등정주의 아닌 등로주의를 추구한 김창호

산악인 중 몇몇은 탐험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히말라야 등 고산을 등반하는 데 머물지 않고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산맥 동서 횡단, 노를 저어 베링해 횡단, 자전거로 유라시아 횡단, 바이칼호 단독종주 등 다양한 도전을 시도하는 산악인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고산 등반할 때도 잘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일반적인 루트(Normal Route)를 통해 정상을 밟는 데 주력하는 ‘등정주의’보다 '등로주의’를 선호한다. 등로주의란 장비를 최소화하고 자신만의 기술을 앞세워 등반하거나 아예 새로운 루트(New Route)를 개척해 오르는 방식이다. 결국 ‘어떻게 올라갔는지’에 가치를 더 두는 것인데 현대 산악계에서 다시 중시되고 있는 고전적인 등반 방식이다.

등로주의에서는 정통 알파인 스타일의 고난도 등반 기술이 필수적인데 김 대장이 바로 세계 산악계에서도 인정하는 등로주의 추구자였다. 김 대장이 2012년 ‘아시아 황금 피켈상’, 그리고 지난해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황금 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이유다. 김 대장은 이번에도 일반 산악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구르자히말(7,193m)의 수직 벽에서 신 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늘 연구했던 등반기술 이사

한국 산악계에서 가장 학술적인 연구를 많이 하는 사람이 김 대장이었다. 여기엔 산악계 선후배 모두 이론을 달지 않는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장기간 히말라야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해외 등반 사례들도 연구했다. 특정 산악인에 대한 등정 시비가 불거질 때는 김 대장이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김 대장은 비극이 된 이번 원정을 떠나기 직전까지 대한산악연맹 등반기술 이사직도 수행했다. 대중적인 산악인을 지양하고, 도전 정신 등 등반 고유의 가치를 전파하는 ‘산사람’으로 생활해 선후배로부터 존경받았던 김창호 대장. 한국 산악계는 지금 2011년 박영석 대장에 이어 또 한 명의‘산악 거목’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다. 취재할 때마다 아니 사적으로 만날 때도 늘 보여준 특유의 선한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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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rom 0 to 8,848’…김창호 대장을 추억하며
    • 입력 2018-10-15 11:20:22
    취재K
▲2013년 3월 인도, 자전거 질주하는 김창호 대장

무동력으로 바다에서 에베레스트까지

2013년 3월 중순 김창호 대장은 인도 벵골만 갠지스 강 하류에서 카약 노를 젓고 있었다. 바다 수면이니 당연히 위치는 해발은 0m다. 서성호, 전푸르나 등과 팀을 이룬 김 대장은 닷새 동안 160여km를 노를 저어 인도 북동부 도시 콜카타에 도달했다. 그리고 거기부터는 자전거를 타며 북진해 갔다. 그리고 1,000km쯤 달린 끝에 네팔 국경지대 툼링타르에 도착했다. 이어 트레킹으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고 마침내 5월 20일 정상에 오르며 무산소(산소 공기통을 휴대하지 않음) 14좌(히말라야 산맥 8천m급 자이언트 봉우리 14개)를 모두 등정했다. 해발 0m에서 출발해 지구 꼭대기 8,848m를 밟은 것이다(당시 등반 기치: From 0 to 8,848). 전기나 석유 동력에 의존하지 않고 무동력, 즉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만 해내겠다는 그의 말을 실천한 것이다.

[연관 기사] [스포츠9] ‘무산소 14좌의 조건’ 김창호, 색다른 원정 (2013년 3월 28일)

(좌) 김창호 (우) 박영석
김창호를 추억하면 박영석 대장이 생각난다.

2005년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히말라야 14좌 완등+남북극점 도달+7대륙 최고봉 등정)을 달성한 박영석 대장은 2011년 10월, 14좌 중의 하나인 안나푸르나(8,091m) 남벽에서 코리안 신 루트를 개척하다가 대원 2명(강기석, 신동민)과 실종됐다. 대형 눈사태로 인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세 사람을 찾기 위한 수색 작업이 펼쳐졌다. 수십m 깊이의 ‘악마의 입’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 아래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 세 사람을 찾는 수색도 진행됐다. 그 작업의 선봉에 선 사람이 바로 김 대장이다. 평소 존경하던 선배 산악인의 실종 사건에 자처해서 한국에서 네팔로 서둘러 날아가 초기 수색 작업에 동참했다. 크레바스 상층부 또는 내부의 얼음이 깨지거나 무너질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김 대장은 이를 무릅쓰고 크레바스 아래로 내려가 수색을 진행했다. 그러나 박 대장 등 세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등정주의 아닌 등로주의를 추구한 김창호

산악인 중 몇몇은 탐험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히말라야 등 고산을 등반하는 데 머물지 않고 패러글라이딩으로 히말라야 산맥 동서 횡단, 노를 저어 베링해 횡단, 자전거로 유라시아 횡단, 바이칼호 단독종주 등 다양한 도전을 시도하는 산악인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고산 등반할 때도 잘 나타난다.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일반적인 루트(Normal Route)를 통해 정상을 밟는 데 주력하는 ‘등정주의’보다 '등로주의’를 선호한다. 등로주의란 장비를 최소화하고 자신만의 기술을 앞세워 등반하거나 아예 새로운 루트(New Route)를 개척해 오르는 방식이다. 결국 ‘어떻게 올라갔는지’에 가치를 더 두는 것인데 현대 산악계에서 다시 중시되고 있는 고전적인 등반 방식이다.

등로주의에서는 정통 알파인 스타일의 고난도 등반 기술이 필수적인데 김 대장이 바로 세계 산악계에서도 인정하는 등로주의 추구자였다. 김 대장이 2012년 ‘아시아 황금 피켈상’, 그리고 지난해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황금 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이유다. 김 대장은 이번에도 일반 산악인들이 가기를 꺼리는 구르자히말(7,193m)의 수직 벽에서 신 루트를 개척하려고 했다.

늘 연구했던 등반기술 이사

한국 산악계에서 가장 학술적인 연구를 많이 하는 사람이 김 대장이었다. 여기엔 산악계 선후배 모두 이론을 달지 않는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장기간 히말라야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해외 등반 사례들도 연구했다. 특정 산악인에 대한 등정 시비가 불거질 때는 김 대장이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김 대장은 비극이 된 이번 원정을 떠나기 직전까지 대한산악연맹 등반기술 이사직도 수행했다. 대중적인 산악인을 지양하고, 도전 정신 등 등반 고유의 가치를 전파하는 ‘산사람’으로 생활해 선후배로부터 존경받았던 김창호 대장. 한국 산악계는 지금 2011년 박영석 대장에 이어 또 한 명의‘산악 거목’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다. 취재할 때마다 아니 사적으로 만날 때도 늘 보여준 특유의 선한 웃음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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