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카슈끄지 암살’ 뒤에 숨긴 에르도안의 야심

입력 2018.10.2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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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르도안, '정의의 사도'로 나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에 공식적으로 맞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자신이 소속된 여당 '정의개발당' 의원 총회에서 "카슈끄지가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면서 이번 살해가 "사전에 계획됐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발적으로 살해됐다'는 사우디 당국의 발표를 강력히 부인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발적으로 살해됐다면 시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사우디 당국을 몰아붙이면서,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을 방문하기 전날 사우디인 3명으로 구성된 팀이 부스포루스해협 남동쪽 얄로바시 등 현장을 답사했다는, 계획 암살을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사실도 제시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어,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인 독립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진실 은폐에 맞서,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죽음의 진실 규명에 앞장서는 '정의의 사도'로 나선 모양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터키의 '찔끔찔끔 흘리기' 전략 의도는?

그런데 언론인 카슈끄지가 지난 10월 2일 터키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 들어갔다 사라진 지 벌써 3주째다. 이제야 에르도안 대통령이 공식적인 입장을 천명했다는 것은, 터키 역시 입장을 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거다.

세계의 언론들은 그간 터키의 입장을 크게 2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처음부터 터키 당국이 (터키 언론, 터키 당국자 등의 말을 통해) "카슈끄지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증거를 "시간을 두고 찔끔찔끔 흘렸다"는 것이다.

터키가 일관되게 '사우디 당국에 의한 암살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자신들이 확보할 수 있는 증거들을 가지고 사우디 또는 미국 등과 거래를 시도하며, 어떤 방향으로 갈지 저울질을 계속한 흔적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터키 수사팀은 사건 직후 "카슈끄지가 사우디 요원들에 의해 숨졌다"고 결론을 냈지만, 터키 정부는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 사우디의 이른바 암살조들이 터키로 입국하는 장면과 사건 당일 총영사관과 총영사관저 주변의 CCTV 등 정황 증거들만을 먼저 공개했다.

그러다 카슈끄지의 죽음이 국제적 주목을 받는 가운데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 죽음에 대해 계속 부인하자, 지난 17일 결정적 증거인 녹취록의 내용을 흘렸다. 암살요원들이 총영사관 내에서, 카슈끄지를 손가락들을 절단하며 고문하다 7분 만에 살해한 뒤 음악을 들으며 시신을 토막 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고 터키언론은 전했다.

그제서야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자, 22일 이번에는 계획 살인 혐의를 뒷받침할 근거가 보도된다. 사우디 암살요원들이 카슈끄지와 용모가 비슷한 대역까지 미리 준비해,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을 멀쩡히 나간 것처럼 연출했음을 보여주는 CCTV 영상이 나온 것이다.

그리곤 에르도안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번 사건이 계획된 살인"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3주가 걸렸다.

숨진 언론인 카슈끄지숨진 언론인 카슈끄지

터키, '증거 까기' 대신 '국제 위원회' 제안

로이터통신은 22일 터키 당국이 사건 당일의 스카이프 통화 내용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사건 당일 사우디 총영사관에 있던 카슈끄지에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고문인 사우드 알 카흐타니가 스카이프를 통해 욕설을 퍼붓고, 끝내는 파견조에 살해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 스카이프 통화 녹음 파일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손에 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파일을 공개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터키 당국이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우디당국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진상을 규명할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는 건 터키 뿐이다. 어쩌면 국제적이고 독립적인 진상 규명 위원회 같은 걸 구성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터키 당국이 갖고 있는 증거들만 다 공개해도 결론은 나버릴 수도 있다. 사우디 왕세자가 단번에 KO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사우디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울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사우디가 왕세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국제적 요구도 불거졌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미국과의 거래나 사우디 왕세자를 단번에 KO 시키는 것보다 더 큰 걸 노리는 것 같다. 이번 판이 이슬람권 내 외교적 패권 경쟁에서 자신이 우위에 올라설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젊은 사우디 왕세자와의 경쟁으로만 판을 좁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우디에 이미 외교적 판정승 거둔 에르도안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의 외교적 갈등은 2011년 '아랍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왕정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며 혁명에 나선 이슬람의 젊은이들은, 나름의 정치적 제도를 확립한 터키의 선출직 총리로서 터키의 경제개혁을 이끌던 에르도안 총리를 선망했다. 에르도안은 '아랍의 봄'으로 '이슬람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들이 탄생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2013년 에르도안이 지원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첫 이집트 직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압델 타파 엘시시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아랍의 봄'을 교훈으로 삼은 아랍권 왕정들은 반대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바닥 민심의 지지를 받는 무슬림형제단 등을 왕정의 치명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등 왕정국가와 이집트의 엘시시 등이 무슬림형제단을 적대시하는 동맹을 형성한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집트에서 피난 온 무슬림형제단에 도피처를 제공하는 등 엘시시 정부와 맞서고, 카타르와 연대해 '사우디 동맹'과 대립했다.

이슬람의 전통적 강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슬람의 신흥 강자를 자처하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치외교 노선에서도 맞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33살의 젊은 왕세자는 왕정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에 개방적인 경제사회 개혁을 추구해야 했다. 특히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은 트럼프 대통령 집안의 지원 아래 미국과의 유대 강화는 물론 이스라엘까지 규합하는 새로운 동맹을 형성하며 지역에서 재부상하는 이란을 제어하는 등 패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랜 세속주의(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유지해오던 터키에 국가적 차원의 이슬람 규율을 부활시키는 등 종교의 정치화로 사우디 등과 반대노선을 걸었다. 과거의 터키는 나토에 가입해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기 미국의 우방으로서 이슬람권을 제어하는 역할도 맡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꿈꾸는 에르도안의 외교는 달랐다. 서방과 동방, 러시아, 중국 등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독자적 세력화를 꾀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과 이집트까지 합류시킨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드넓은 동맹에 비해, 터키는 힘이 달렸다. 그렇게 외교적으로 분루를 삼키던 에르도안이, 이번 카슈끄지 사건으로, 전세를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또다른 독재자' 에르도안의 달갑지 않은 외교적 승리?

사우디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의 지난 3년간의 전횡, 그의 독재자적 면모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지만, 에르도안 역시 서방국가들에 의해 '21세의 술탄'이란 별칭으로 즉 또 다른 독재자로 불려 왔다.

내각제의 터키에서 2003년부터 무려 11년간 총리를 지낸 뒤, 대통령 선출제도를 직선제로 바꿔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르도안은 장기 집권을 위해 2017년 대통령 5년 중임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그런데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이 예산과 행정, 사법권을 장악하고 의회 해산권까지 갖도록 하고 있다. 삼권 분립이 아니라 3권 완전 장악 수준의 무소불위 권력을 에르도안이 갖게 된 것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번 카슈끄지 사건으로 에르도안이 '터키가 사우디보다는 훨씬 나은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슬람권 국가의 야권과 난민들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이슬람권의 적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그러면서 서방과 이슬람권을 잇는 외교적 핵심이 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동시에 러시아 중국 등과 연계하며 동방으로의 개척도 추구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터키 땅에서 벌어진 사우디 언론인 암살 사건'을 기화로, 자신에게 따라다니던 '독재자 술탄'의 꼬리표를 성공적으로 떼버리고, 이슬람권 외교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고자 하는 것이다.

'64살 정치의 달인'이 보기엔 풋내기에 불과한 '33살의 왕세자 길들이기'만으론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기가 성에 안 찬 듯 보인다.

[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사우디 왕세자-트럼프 사위’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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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에르도안, '정의의 사도'로 나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드디어 사우디아라비아 당국에 공식적으로 맞섰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자신이 소속된 여당 '정의개발당' 의원 총회에서 "카슈끄지가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면서 이번 살해가 "사전에 계획됐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발적으로 살해됐다'는 사우디 당국의 발표를 강력히 부인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발적으로 살해됐다면 시신은 어디에 있느냐?"고 사우디 당국을 몰아붙이면서,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을 방문하기 전날 사우디인 3명으로 구성된 팀이 부스포루스해협 남동쪽 얄로바시 등 현장을 답사했다는, 계획 암살을 뒷받침할 만한 새로운 사실도 제시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어,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국제적인 독립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진실 은폐에 맞서, 사우디 언론인 카슈끄지 죽음의 진실 규명에 앞장서는 '정의의 사도'로 나선 모양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터키의 '찔끔찔끔 흘리기' 전략 의도는?

그런데 언론인 카슈끄지가 지난 10월 2일 터키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 들어갔다 사라진 지 벌써 3주째다. 이제야 에르도안 대통령이 공식적인 입장을 천명했다는 것은, 터키 역시 입장을 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는 거다.

세계의 언론들은 그간 터키의 입장을 크게 2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처음부터 터키 당국이 (터키 언론, 터키 당국자 등의 말을 통해) "카슈끄지가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했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된 증거를 "시간을 두고 찔끔찔끔 흘렸다"는 것이다.

터키가 일관되게 '사우디 당국에 의한 암살 의혹'을 제기하면서도, 자신들이 확보할 수 있는 증거들을 가지고 사우디 또는 미국 등과 거래를 시도하며, 어떤 방향으로 갈지 저울질을 계속한 흔적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터키 수사팀은 사건 직후 "카슈끄지가 사우디 요원들에 의해 숨졌다"고 결론을 냈지만, 터키 정부는 그들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 사우디의 이른바 암살조들이 터키로 입국하는 장면과 사건 당일 총영사관과 총영사관저 주변의 CCTV 등 정황 증거들만을 먼저 공개했다.

그러다 카슈끄지의 죽음이 국제적 주목을 받는 가운데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 죽음에 대해 계속 부인하자, 지난 17일 결정적 증거인 녹취록의 내용을 흘렸다. 암살요원들이 총영사관 내에서, 카슈끄지를 손가락들을 절단하며 고문하다 7분 만에 살해한 뒤 음악을 들으며 시신을 토막 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고 터키언론은 전했다.

그제서야 사우디 당국이 카슈끄지의 죽음을 인정하고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자, 22일 이번에는 계획 살인 혐의를 뒷받침할 근거가 보도된다. 사우디 암살요원들이 카슈끄지와 용모가 비슷한 대역까지 미리 준비해,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을 멀쩡히 나간 것처럼 연출했음을 보여주는 CCTV 영상이 나온 것이다.

그리곤 에르도안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번 사건이 계획된 살인"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3주가 걸렸다.

숨진 언론인 카슈끄지
터키, '증거 까기' 대신 '국제 위원회' 제안

로이터통신은 22일 터키 당국이 사건 당일의 스카이프 통화 내용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사건 당일 사우디 총영사관에 있던 카슈끄지에게,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고문인 사우드 알 카흐타니가 스카이프를 통해 욕설을 퍼붓고, 끝내는 파견조에 살해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 스카이프 통화 녹음 파일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손에 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파일을 공개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터키 당국이 얼마나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우디당국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한 진상을 규명할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는 건 터키 뿐이다. 어쩌면 국제적이고 독립적인 진상 규명 위원회 같은 걸 구성할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터키 당국이 갖고 있는 증거들만 다 공개해도 결론은 나버릴 수도 있다. 사우디 왕세자가 단번에 KO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드러난 것만으로도 사우디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울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사우디가 왕세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국제적 요구도 불거졌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미국과의 거래나 사우디 왕세자를 단번에 KO 시키는 것보다 더 큰 걸 노리는 것 같다. 이번 판이 이슬람권 내 외교적 패권 경쟁에서 자신이 우위에 올라설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젊은 사우디 왕세자와의 경쟁으로만 판을 좁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사우디에 이미 외교적 판정승 거둔 에르도안

사우디아라비아와 터키의 외교적 갈등은 2011년 '아랍의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슬람 왕정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며 혁명에 나선 이슬람의 젊은이들은, 나름의 정치적 제도를 확립한 터키의 선출직 총리로서 터키의 경제개혁을 이끌던 에르도안 총리를 선망했다. 에르도안은 '아랍의 봄'으로 '이슬람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자신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새로운 정부들이 탄생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2013년 에르도안이 지원하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첫 이집트 직선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가, 압델 타파 엘시시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아랍의 봄'을 교훈으로 삼은 아랍권 왕정들은 반대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바닥 민심의 지지를 받는 무슬림형제단 등을 왕정의 치명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등 왕정국가와 이집트의 엘시시 등이 무슬림형제단을 적대시하는 동맹을 형성한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집트에서 피난 온 무슬림형제단에 도피처를 제공하는 등 엘시시 정부와 맞서고, 카타르와 연대해 '사우디 동맹'과 대립했다.

이슬람의 전통적 강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슬람의 신흥 강자를 자처하는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정치외교 노선에서도 맞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33살의 젊은 왕세자는 왕정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에 개방적인 경제사회 개혁을 추구해야 했다. 특히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은 트럼프 대통령 집안의 지원 아래 미국과의 유대 강화는 물론 이스라엘까지 규합하는 새로운 동맹을 형성하며 지역에서 재부상하는 이란을 제어하는 등 패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슬람 국가주의를 내세우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랜 세속주의(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유지해오던 터키에 국가적 차원의 이슬람 규율을 부활시키는 등 종교의 정치화로 사우디 등과 반대노선을 걸었다. 과거의 터키는 나토에 가입해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기 미국의 우방으로서 이슬람권을 제어하는 역할도 맡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꿈꾸는 에르도안의 외교는 달랐다. 서방과 동방, 러시아, 중국 등과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독자적 세력화를 꾀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과 이집트까지 합류시킨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드넓은 동맹에 비해, 터키는 힘이 달렸다. 그렇게 외교적으로 분루를 삼키던 에르도안이, 이번 카슈끄지 사건으로, 전세를 반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또다른 독재자' 에르도안의 달갑지 않은 외교적 승리?

사우디 왕세자 모함마드 빈 살만의 지난 3년간의 전횡, 그의 독재자적 면모가 이번 사건으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지만, 에르도안 역시 서방국가들에 의해 '21세의 술탄'이란 별칭으로 즉 또 다른 독재자로 불려 왔다.

내각제의 터키에서 2003년부터 무려 11년간 총리를 지낸 뒤, 대통령 선출제도를 직선제로 바꿔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된 에르도안은 장기 집권을 위해 2017년 대통령 5년 중임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그런데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이 예산과 행정, 사법권을 장악하고 의회 해산권까지 갖도록 하고 있다. 삼권 분립이 아니라 3권 완전 장악 수준의 무소불위 권력을 에르도안이 갖게 된 것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이번 카슈끄지 사건으로 에르도안이 '터키가 사우디보다는 훨씬 나은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슬람권 국가의 야권과 난민들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이슬람권의 적자는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그러면서 서방과 이슬람권을 잇는 외교적 핵심이 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동시에 러시아 중국 등과 연계하며 동방으로의 개척도 추구하고 싶어하는 에르도안이, '터키 땅에서 벌어진 사우디 언론인 암살 사건'을 기화로, 자신에게 따라다니던 '독재자 술탄'의 꼬리표를 성공적으로 떼버리고, 이슬람권 외교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고자 하는 것이다.

'64살 정치의 달인'이 보기엔 풋내기에 불과한 '33살의 왕세자 길들이기'만으론 이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기가 성에 안 찬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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