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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오도독] 2018년 11월 20일자 조선일보
입력 2018.11.21 (07:05) 사회
[한국언론 오도독] 2018년 11월 20일자 조선일보
1970년대 말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허버트 간스 (Herbert Gans)는 미 지상파 방송사인 CBS와 NBC의 메인뉴스, 그리고 뉴스위크(Newsweek)와 타임지(Time)등에 실린 방대한 뉴스를 분석한 뒤 이들 언론사의 기사에는 ‘자국 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 ‘책임감 있는 자본주의’(Responsible Capital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중도주의’(Moderatism) 등과 같은 ‘가치'들(Values)이 포함되어 있음을 논증했다.

간스의 말대로 언론이 아무리 객관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기사에 배어 있는 가치들은 뉴스의 선정, 헤드라인, 단어의 선택, 편집의 순서 등을 통해 읽혀진다. 100% 객관적인 언론은 없다. 그건 마치 100% 객관적인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 언론의 중요한 문제는 팩트의 진위 여부만큼이나 언론사가 추구하는 가치의 보편성, 공익성에도 있다. 언론사가 지향하는 가치는 보편적이고 공익적이어야 한다. 기자는 최소한 그렇게 배웠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어제 조선일보는 독보적이었다. 독보적으로 고루했다. 1면 중앙에 박힌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이다. 제목이 “동료 판사 탄핵 촉구한 판사들”. 이른바 ‘조중동’으로 분류되는 중앙일보의 제목(법관대표 105명, 초유의 현직 판사 탄핵 요구)이나 동아일보의 제목(‘사법농단 판사’ 탄핵 요구한 판사들)과도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바로 “동료”라는 단어다. 저 단어 하나를 1면 제목에 집어 넣음으로써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독자에게 강요하듯 심어주려 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저 ‘동료’라는 단어에는 ‘동료를 팔아먹은 놈들’이라는 비난의 뉘앙스가 숨겨져 있다. 또 ‘동료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나름의 가치관이 배어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와 유착해서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한, 그래서 사법 독립의 최대 위기를 불러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일보가 배신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를 담아 실은 저 ‘동료’들 가운데에 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실현하고 제대로 된 사법부의 독립을 견인하는 것이 공적인 가치라면 ‘동료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기껏해야 사적 의리에 따른 개인적 감정일뿐이다. 그러니까 조선일보는 자사 신문 1면에 민주적이고 공적인 가치인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것보다는 법관들이 개인 감정에 얽매어 사적 의리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부르짖고 있는 격이 된다. 황당하다.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조선일보는 이날자 2면에서 다시 “야간고 출신 대법관 신화, 검찰 포토라인에 서다”라는 제목을 달아 사적인 성취와 사회적 정의를 뒤섞어 버렸다. 조선일보가 정의한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정의, 즉 “야간고를 나와 대법관 신화를 이룬 사람”이라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즉 야간고를 나와 대법관이 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 출석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검찰 포토라인에는 절대 서서는 안되는가? 대체 박근혜 정부의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전직 고위 법관들에 대한 검찰 조사와 야간고 출신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지금 조선일보는 독자들에게 함께 신파극을 찍자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2018년 11월 20일자 자사 신문의 얼굴인 1면과 2면을 통해 조선일보는 사적 의리가 공적 정의보다 중시되고, 야간고를 나온 대법관 출신이라는 경력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적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사회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그게 조선일보가 하고 싶었던 말, 믿고 있는 가치관이라면 조선일보는 오래된 사시인 '정의 옹호'를 과감히 버리고 '의리 옹호'를 선택하는게 낫다. 현재의 격에는 그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 [한국언론 오도독] 2018년 11월 20일자 조선일보
    • 입력 2018.11.21 (07:05)
    사회
[한국언론 오도독] 2018년 11월 20일자 조선일보
1970년대 말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허버트 간스 (Herbert Gans)는 미 지상파 방송사인 CBS와 NBC의 메인뉴스, 그리고 뉴스위크(Newsweek)와 타임지(Time)등에 실린 방대한 뉴스를 분석한 뒤 이들 언론사의 기사에는 ‘자국 문화 중심주의’(Ethnocentrism), ‘책임감 있는 자본주의’(Responsible Capital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중도주의’(Moderatism) 등과 같은 ‘가치'들(Values)이 포함되어 있음을 논증했다.

간스의 말대로 언론이 아무리 객관주의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기사에 배어 있는 가치들은 뉴스의 선정, 헤드라인, 단어의 선택, 편집의 순서 등을 통해 읽혀진다. 100% 객관적인 언론은 없다. 그건 마치 100% 객관적인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 언론의 중요한 문제는 팩트의 진위 여부만큼이나 언론사가 추구하는 가치의 보편성, 공익성에도 있다. 언론사가 지향하는 가치는 보편적이고 공익적이어야 한다. 기자는 최소한 그렇게 배웠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어제 조선일보는 독보적이었다. 독보적으로 고루했다. 1면 중앙에 박힌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이다. 제목이 “동료 판사 탄핵 촉구한 판사들”. 이른바 ‘조중동’으로 분류되는 중앙일보의 제목(법관대표 105명, 초유의 현직 판사 탄핵 요구)이나 동아일보의 제목(‘사법농단 판사’ 탄핵 요구한 판사들)과도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바로 “동료”라는 단어다. 저 단어 하나를 1면 제목에 집어 넣음으로써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독자에게 강요하듯 심어주려 하고 있음이 엿보인다. 저 ‘동료’라는 단어에는 ‘동료를 팔아먹은 놈들’이라는 비난의 뉘앙스가 숨겨져 있다. 또 ‘동료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나름의 가치관이 배어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와 유착해서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한, 그래서 사법 독립의 최대 위기를 불러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일보가 배신하면 안 된다는 뉘앙스를 담아 실은 저 ‘동료’들 가운데에 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실현하고 제대로 된 사법부의 독립을 견인하는 것이 공적인 가치라면 ‘동료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기껏해야 사적 의리에 따른 개인적 감정일뿐이다. 그러니까 조선일보는 자사 신문 1면에 민주적이고 공적인 가치인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것보다는 법관들이 개인 감정에 얽매어 사적 의리를 지키는 것이 옳다고 부르짖고 있는 격이 된다. 황당하다.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조선일보는 이날자 2면에서 다시 “야간고 출신 대법관 신화, 검찰 포토라인에 서다”라는 제목을 달아 사적인 성취와 사회적 정의를 뒤섞어 버렸다. 조선일보가 정의한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정의, 즉 “야간고를 나와 대법관 신화를 이룬 사람”이라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즉 야간고를 나와 대법관이 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 출석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검찰 포토라인에는 절대 서서는 안되는가? 대체 박근혜 정부의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전직 고위 법관들에 대한 검찰 조사와 야간고 출신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지금 조선일보는 독자들에게 함께 신파극을 찍자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2018년 11월 20일자 자사 신문의 얼굴인 1면과 2면을 통해 조선일보는 사적 의리가 공적 정의보다 중시되고, 야간고를 나온 대법관 출신이라는 경력이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적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사회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정말 그게 조선일보가 하고 싶었던 말, 믿고 있는 가치관이라면 조선일보는 오래된 사시인 '정의 옹호'를 과감히 버리고 '의리 옹호'를 선택하는게 낫다. 현재의 격에는 그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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