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K] 프레디 머큐리가 ‘아시아의 영웅’? 파로크 불사라의 진실

입력 2018.11.25 (11:01) 수정 2018.11.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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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가 아시아의 영웅?

파로크 불사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재조명 받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6년 11월 둘째주 아시아와 유럽판 특집 기사 ‘지난 60년, 아시아의 영웅들’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파로크 불사라 라는 본명으로 그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사이에 소개된 ‘파로크 불사라’라는 이름을 보고 락그룹 ‘퀸’의 리드 보컬을 떠올렸을 사람은 당시엔 많지 않아 보인다.

‘타임’이 굳이 본명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은 그의 어릴 적 삶의 뿌리가 인도인가 영국인가를 따지기 위해서다. 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유산이 훗날 어느 국가로 귀속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 흥행을 계기로 출신 논란이 또 일고 있다.영화 흥행을 계기로 출신 논란이 또 일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다시 유럽으로

영화의 첫 부분인 1970년, 공항에서 수화물 노동자로 일하던 프레디 머큐리는 ‘파키스탄 꼬마’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파키스탄과는 별 관계가 없다. 태어난 곳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있는 잔지바르 섬. 현재는 탄자니아의 일부다.

그가 태어난 1946년에 그의 아버지는 영국령 잔지바르의 공무원이었다. 프레디를 위해 보모까지 둔 중산층 집안이다. 프레디는 잔지바르에서 영국 성공회 학교를 다니다가 8살 때 인도 뭄바이로 유학을 떠난다.

할머니와 이모가 있는 곳으로 그는 뭄바이 동남쪽에 있는 판치가니라는 지역에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 곳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됐고, 밴드도 결성해 활동했다. 영화에서 사진으로 나왔던 권투 모습도 그때 익힌 것으로 교내 챔피언 수준이었다고 한다.

1963년 프레디는 잔지바르로 돌아와서 교회 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당시 동창들은 최근 BBC에 프레디가 “똑똑하게 옷을 입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1964년 잔지바르 피지배층이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면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프레디와 가족들은 영화속 표현대로 몸만 빠져나와 영국으로 떠났다. 여기까지가 영화 전 이야기다.

잔지바르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생가잔지바르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생가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난민 출신 난민’

영화에서 프레디의 집안은 ‘파시'(Parsi)라고 표현된다. 인도의 소수 민족 중에 하나다. 중세 시대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멸망하면서 인도로 피난 온 이란인의 후예다. 중국에서 배화교로 불렸던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다. 현재도 인도 뭄바이를 중심으로 7만 명 가량이 살고 있다.

인도 인구가 13억 명 가량임을 감안하면 소수 중에 소수 민족이다. 그러나 영국의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한 인도 굴지의 타타그룹이 ‘파시’가 창립한 회사로 알려져 있는 등 경제적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또, 종교적 결속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인도인이라기보다 ‘파시’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때문에 영국의 식민 통치 시절에도 영국에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아버지가 영국 식민 정부에서 일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복합적인 집안 배경에 대해 프레디는 영화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대충 얼버무리다가 생을 마쳤다.

‘파시’는 이란에서 건너온 민족이다‘파시’는 이란에서 건너온 민족이다

"왜 숨겼나?" ‘복합적’ 감정의 인도

앞서 프레디를 ‘아시아의 영웅’이라고 선정한 ‘타임’의 논리는 이러하다. 프레디가 인도 유학시절 발리우드 영화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프레디와 비슷한 나이대인 인도 뭄바이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악마의시' 저자)도 아시아계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프레디도 "팝 역사에서 세계적인 어필을 한 최초의 아시아 음악가"라는 논리다.

그러나 인도 주류 언론의 생각은 다른 듯 하다. 인도의 영자지 힌두스탄 타임스는 최근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는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라는 기사에서 강도 높게 ‘파시’ 출신 ‘불사라’를 비판했다.

출신에 대해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등 인도의 뿌리와 거리를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내용이다. 영국계 학교에서만 교육을 받았다는 점, 인도에 있을 무렵부터 '프레디'라는 영국 이름을 썼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역시 '파시'인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장영주, 조수미와도 자주 공연을 했다)는 출신을 숨기지 않았고, 인도 여권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선언하지 않았느냐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뭄바이 시절 프레디 머큐리뭄바이 시절 프레디 머큐리

'출신'에 대한 가족들의 복잡한 속마음

인도 언론의 애국심에 대해 '파시'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20주년을 맞은 2011년 영국의 데일리텔레그라프는 프레디의 가족들과 인터뷰를 했다.

프레디의 처남은 프레디가 복합적인 아시아 문화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파시'와 인도를 동일시하는 데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다. '파시'는 이란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 집안 대대로 인도에서 살아왔던 프레디의 어머니는 인도와의 인연에 보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프레디가 뭄바이에서 유학하던 시절 피아노로 인도 음악을 연주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식이다. 또 프레디가 ‘파시’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며 출신을 숨겼다는 세간의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프레디 머큐리와 부모님프레디 머큐리와 부모님

고향의 자랑이지만 불편하기도 한 잔지바르

BBC가 전한 프레디의 고향 잔지바르의 분위기는 자랑스럽지만 불편하다는‘복잡한 관계’로 표현된다. 잔지바르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살던 집 등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고향이라는 점은 반긴다는 분위기도 전했다.

문제는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논쟁을 불러오는 프레디의 동성애. 이슬람 지역이 된 잔지바르는 2004년 이후 동성애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2006년 프레디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동성애자들이 섬을 찾아온다는 이야기에 한 이슬람 단체는 반발 시위를 열기도 했다.

영국 “프레디 머큐리의 모든 것은 우리 것”

인도와 아프리카의 복잡다단하고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달리 영국은 확고하다. 프레디의 인종과 동성애 여부에 상관없이 영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적 유산이라는 반응이다. BBC는 영화 개봉을 계기로 관련 기사를 전하며 잔지바르에선 “아버지는 영국 공무원이었고, 프레디는 영국인 수녀에게 배웠다”라는 내용을 넣었고, 인도에선 “영국 성공회 학교를 다녔다”라고 강조했다. 프레디의 어린 시절도 영국 문화의 확실한 영향권 안에 있다는 의미다.

동족인 영국의 '파시'들도 인도보다는 영국의 손을 들어줬다. BBC는 현재 영국에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과 ‘파시’가 4천명 가량 있다고 전했다. 런던에 있는 ‘파시’ 커뮤니티 취재에서 이들은 프레디를 아시아계 영국인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타임'이 프레디가 '아시아의 영웅'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인도 음악의 영향도 그룹 퀸의 히트곡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퀸은 70~80년대 서양 주류 음악의 흐름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 굳이 음악적 뿌리를 찾는다면 영화에서도 언급된 ‘오페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에 ‘하바네라’로 시작해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나오는 '어느 갠 날’까지 3곡의 아리아가 여자 친구와의 만남과 헤어짐까지 중요 장면을 장식한다.

1988년 바르셀로나 공연 모습1988년 바르셀로나 공연 모습

지극히 영국적인 프레디 머큐리의 유산

실제로도 오페라를 좋아했던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985년 ‘Live Aid’ 공연 이후 88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출신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2018년 별세)와 올림픽 주제곡이 될 뻔한 ‘바르셀로나’(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를 불렀다. 프레디 초기의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의 음악으로 꾸민 뮤지컬 ‘We will rock you’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제작됐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는 프레디의 공연 장면이 영상으로 등장하며 영국 문화를 대표하는 주류 인물임을 입증했다. 이미 BBC의 2002년 온라인 투표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100대 인물로 선정될 만큼 그의 영국 내 입지는 확고부동하다.

이쯤이면 과거 엘튼 존이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났고, 유럽 인종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제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에드워드 엘가(위풍당당 행진곡 작곡가)와 아델(1988년생 팝 가수)로 이어지는 영국 현대 음악사에서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한 난민 출신 소수민족 프레디 머큐리. 그는 분명 영국의 영웅이다.

런던 올림픽 폐막식런던 올림픽 폐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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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8-11-25 1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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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가 아시아의 영웅? 파로크 불사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재조명 받고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6년 11월 둘째주 아시아와 유럽판 특집 기사 ‘지난 60년, 아시아의 영웅들’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파로크 불사라 라는 본명으로 그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사이에 소개된 ‘파로크 불사라’라는 이름을 보고 락그룹 ‘퀸’의 리드 보컬을 떠올렸을 사람은 당시엔 많지 않아 보인다. ‘타임’이 굳이 본명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보헤미안 랩소디’ 영화에서 묘사되지 않은 그의 어릴 적 삶의 뿌리가 인도인가 영국인가를 따지기 위해서다. 이는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유산이 훗날 어느 국가로 귀속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영화 흥행을 계기로 출신 논란이 또 일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다시 유럽으로 영화의 첫 부분인 1970년, 공항에서 수화물 노동자로 일하던 프레디 머큐리는 ‘파키스탄 꼬마’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파키스탄과는 별 관계가 없다. 태어난 곳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 있는 잔지바르 섬. 현재는 탄자니아의 일부다. 그가 태어난 1946년에 그의 아버지는 영국령 잔지바르의 공무원이었다. 프레디를 위해 보모까지 둔 중산층 집안이다. 프레디는 잔지바르에서 영국 성공회 학교를 다니다가 8살 때 인도 뭄바이로 유학을 떠난다. 할머니와 이모가 있는 곳으로 그는 뭄바이 동남쪽에 있는 판치가니라는 지역에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된다. 그 곳에서 피아노를 배우게 됐고, 밴드도 결성해 활동했다. 영화에서 사진으로 나왔던 권투 모습도 그때 익힌 것으로 교내 챔피언 수준이었다고 한다. 1963년 프레디는 잔지바르로 돌아와서 교회 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당시 동창들은 최근 BBC에 프레디가 “똑똑하게 옷을 입었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1964년 잔지바르 피지배층이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면서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프레디와 가족들은 영화속 표현대로 몸만 빠져나와 영국으로 떠났다. 여기까지가 영화 전 이야기다. 잔지바르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생가 내세우고 싶지 않았던 ‘난민 출신 난민’ 영화에서 프레디의 집안은 ‘파시'(Parsi)라고 표현된다. 인도의 소수 민족 중에 하나다. 중세 시대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멸망하면서 인도로 피난 온 이란인의 후예다. 중국에서 배화교로 불렸던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있다. 현재도 인도 뭄바이를 중심으로 7만 명 가량이 살고 있다. 인도 인구가 13억 명 가량임을 감안하면 소수 중에 소수 민족이다. 그러나 영국의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한 인도 굴지의 타타그룹이 ‘파시’가 창립한 회사로 알려져 있는 등 경제적 영향력은 만만치 않다. 또, 종교적 결속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인도인이라기보다 ‘파시’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때문에 영국의 식민 통치 시절에도 영국에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아버지가 영국 식민 정부에서 일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복합적인 집안 배경에 대해 프레디는 영화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대충 얼버무리다가 생을 마쳤다. ‘파시’는 이란에서 건너온 민족이다 "왜 숨겼나?" ‘복합적’ 감정의 인도 앞서 프레디를 ‘아시아의 영웅’이라고 선정한 ‘타임’의 논리는 이러하다. 프레디가 인도 유학시절 발리우드 영화의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프레디와 비슷한 나이대인 인도 뭄바이 출신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악마의시' 저자)도 아시아계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프레디도 "팝 역사에서 세계적인 어필을 한 최초의 아시아 음악가"라는 논리다. 그러나 인도 주류 언론의 생각은 다른 듯 하다. 인도의 영자지 힌두스탄 타임스는 최근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는 왜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라는 기사에서 강도 높게 ‘파시’ 출신 ‘불사라’를 비판했다. 출신에 대해 일상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등 인도의 뿌리와 거리를 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는 내용이다. 영국계 학교에서만 교육을 받았다는 점, 인도에 있을 무렵부터 '프레디'라는 영국 이름을 썼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역시 '파시'인 세계적인 지휘자 주빈 메타(장영주, 조수미와도 자주 공연을 했다)는 출신을 숨기지 않았고, 인도 여권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선언하지 않았느냐는 내용까지 덧붙였다. 뭄바이 시절 프레디 머큐리 '출신'에 대한 가족들의 복잡한 속마음 인도 언론의 애국심에 대해 '파시'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프레디 머큐리 사후 20주년을 맞은 2011년 영국의 데일리텔레그라프는 프레디의 가족들과 인터뷰를 했다. 프레디의 처남은 프레디가 복합적인 아시아 문화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파시'와 인도를 동일시하는 데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다. '파시'는 이란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 집안 대대로 인도에서 살아왔던 프레디의 어머니는 인도와의 인연에 보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프레디가 뭄바이에서 유학하던 시절 피아노로 인도 음악을 연주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식이다. 또 프레디가 ‘파시’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며 출신을 숨겼다는 세간의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프레디 머큐리와 부모님 고향의 자랑이지만 불편하기도 한 잔지바르 BBC가 전한 프레디의 고향 잔지바르의 분위기는 자랑스럽지만 불편하다는‘복잡한 관계’로 표현된다. 잔지바르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살던 집 등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고향이라는 점은 반긴다는 분위기도 전했다. 문제는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논쟁을 불러오는 프레디의 동성애. 이슬람 지역이 된 잔지바르는 2004년 이후 동성애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2006년 프레디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동성애자들이 섬을 찾아온다는 이야기에 한 이슬람 단체는 반발 시위를 열기도 했다. 영국 “프레디 머큐리의 모든 것은 우리 것” 인도와 아프리카의 복잡다단하고 뜨뜻미지근한 반응과 달리 영국은 확고하다. 프레디의 인종과 동성애 여부에 상관없이 영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적 유산이라는 반응이다. BBC는 영화 개봉을 계기로 관련 기사를 전하며 잔지바르에선 “아버지는 영국 공무원이었고, 프레디는 영국인 수녀에게 배웠다”라는 내용을 넣었고, 인도에선 “영국 성공회 학교를 다녔다”라고 강조했다. 프레디의 어린 시절도 영국 문화의 확실한 영향권 안에 있다는 의미다. 동족인 영국의 '파시'들도 인도보다는 영국의 손을 들어줬다. BBC는 현재 영국에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이란인과 ‘파시’가 4천명 가량 있다고 전했다. 런던에 있는 ‘파시’ 커뮤니티 취재에서 이들은 프레디를 아시아계 영국인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타임'이 프레디가 '아시아의 영웅'이라는 근거로 제시한 인도 음악의 영향도 그룹 퀸의 히트곡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퀸은 70~80년대 서양 주류 음악의 흐름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 굳이 음악적 뿌리를 찾는다면 영화에서도 언급된 ‘오페라’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에 ‘하바네라’로 시작해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나오는 '어느 갠 날’까지 3곡의 아리아가 여자 친구와의 만남과 헤어짐까지 중요 장면을 장식한다. 1988년 바르셀로나 공연 모습 지극히 영국적인 프레디 머큐리의 유산 실제로도 오페라를 좋아했던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985년 ‘Live Aid’ 공연 이후 88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출신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2018년 별세)와 올림픽 주제곡이 될 뻔한 ‘바르셀로나’(프레디 머큐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를 불렀다. 프레디 초기의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의 음악으로 꾸민 뮤지컬 ‘We will rock you’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제작됐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에서는 프레디의 공연 장면이 영상으로 등장하며 영국 문화를 대표하는 주류 인물임을 입증했다. 이미 BBC의 2002년 온라인 투표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영국을 대표하는 100대 인물로 선정될 만큼 그의 영국 내 입지는 확고부동하다. 이쯤이면 과거 엘튼 존이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났고, 유럽 인종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제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에드워드 엘가(위풍당당 행진곡 작곡가)와 아델(1988년생 팝 가수)로 이어지는 영국 현대 음악사에서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한 난민 출신 소수민족 프레디 머큐리. 그는 분명 영국의 영웅이다. 런던 올림픽 폐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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