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소(牛)에게 뿔을 허(許)하라” 스위스, 쇠뿔 국민투표

입력 2018.11.26 (14:27) 수정 2018.11.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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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멋진 뿔을 가진 소는 스위스의 상징이다. 관광객들도 스위스에 가면 근사한 뿔이 달린 소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스위스에서는 뿔을 가진 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스에서 사육되는 소들의 4분의 3은 뿔이 제거된 소들이거나 태생적으로 뿔이 없는 소들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스위스의 소들은 뿔이 막 나기 시작할 때 소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후 뜨겁게 달군 쇠로 뿔을 지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뿔이 있으면 소들끼리 싸울 때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사람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뜨겁게 달군 쇠 봉으로 뿔이 나려는 부위를 지지는 모습소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뜨겁게 달군 쇠 봉으로 뿔이 나려는 부위를 지지는 모습

하지만 스위스 북부에 사는 아르멩 까뽈이라는 66세의 농장주는 "소와 염소들에게도 존엄성을 인정해주자"며 실로 엄청난 의지를 발휘했다.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부르는 까뽈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소들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뿔도 그대로 두어야죠. 저희 농장의 소들은 모두 뿔이 있는데 항상 고개를 높이 쳐들고 늠름하게 다닙니다. 그런데 뿔을 없애버리면 소들은 몹시 슬퍼하죠."

’소에게 뿔을 허하자’는 법안을 발의한 농부 아르멩 까뽈 씨와 그가 키우는 소들’소에게 뿔을 허하자’는 법안을 발의한 농부 아르멩 까뽈 씨와 그가 키우는 소들

손으로 직접 뜬 빨간 모자와 덥수룩한 흰 수염이 인상적인 까뽈 씨는 스위스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는 키우는 여덟 마리 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동물 권리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가 실패하자 수년에 걸쳐 무려 1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고, 결국 법안을 발의하고 정부를 설득해 국민투표에까지 부쳤다. '가축도 존엄성을 지킬 권리가 있으며 소의 뿔을 그대로 두는 것이 소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 일요일(11월 25일) 드디어 스위스의 국가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이른바 '쇠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캠페인 이름은 '11월 25일에 쇠뿔 이니셔이브에 대해 예스(네)라고 말하세요!'

<11월 25일 ‘소들에게 뿔을’ 이니셔티브에 찬성표를 던져주세요> 캠페인<11월 25일 ‘소들에게 뿔을’ 이니셔티브에 찬성표를 던져주세요> 캠페인

내용인즉 쇠뿔이 나기 시작할 때 불에 달군 쇠로 지져서 제거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처럼 그대로 자라도록 놔두는 농부들에게는, 뿔이 있는 소들에게 필요한 보다 넓은 사육 공간 확보를 장려하는 뜻으로 보조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부자 나라답게 액수로 마리당 연 190스위스프랑, 우리 돈 21만 6천 원가량을 지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무려 3천만 스위스프랑, 우리 돈 340억 원 정도의 정부 예산이 추가로 소요되게 된다. 당연히 정부는 반길 리 없다. 참고로 스위스 전체 농업 예산은 30억 스위스 프랑이다. 축산 농가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반대하는 쪽은 소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뿔이 있을 경우는 마리당 사육 공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찬반 양론이 어찌나 막상막하였던지 스위스 영농조합도 5만 2천여 회원들에게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결국 유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투표 결과는 어땠을까? 스위스 공영방송 SRF 등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잠정 개표 결과 유권자의 54.7%가 반대표를 던졌다. 농업 예산 증가와 잠재적 위험성을 이유로. 그러나 까뽈 씨는 이런 논리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쇠뿔을 지질 때 나는 연기와 타는 냄새, 아무리 진정제를 투여하고 제거한다지만 소들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것이다. 따라서 쇠뿔 또는 염소 뿔 제거를 마치 개나 고양이 중성화 수술 정도로 가볍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 투표에서의 부결로 스위스의 '쇠뿔 논란'은 일단 일단락됐다. 하지만 동물을 인간의 입장에서보다는 동물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위해 주려는 까뽈 씨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의지와 끈기는 언제 다시 논란에 불을 붙이게 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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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돋보기] “소(牛)에게 뿔을 허(許)하라” 스위스, 쇠뿔 국민투표
    • 입력 2018-11-26 14:27:10
    • 수정2018-11-26 14: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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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멋진 뿔을 가진 소는 스위스의 상징이다. 관광객들도 스위스에 가면 근사한 뿔이 달린 소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정작 스위스에서는 뿔을 가진 소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스에서 사육되는 소들의 4분의 3은 뿔이 제거된 소들이거나 태생적으로 뿔이 없는 소들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스위스의 소들은 뿔이 막 나기 시작할 때 소에게 진정제를 투여한 후 뜨겁게 달군 쇠로 뿔을 지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뿔이 있으면 소들끼리 싸울 때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사람에게도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뜨겁게 달군 쇠 봉으로 뿔이 나려는 부위를 지지는 모습
하지만 스위스 북부에 사는 아르멩 까뽈이라는 66세의 농장주는 "소와 염소들에게도 존엄성을 인정해주자"며 실로 엄청난 의지를 발휘했다. 스스로를 '반항아'라고 부르는 까뽈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소들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뿔도 그대로 두어야죠. 저희 농장의 소들은 모두 뿔이 있는데 항상 고개를 높이 쳐들고 늠름하게 다닙니다. 그런데 뿔을 없애버리면 소들은 몹시 슬퍼하죠."

’소에게 뿔을 허하자’는 법안을 발의한 농부 아르멩 까뽈 씨와 그가 키우는 소들
손으로 직접 뜬 빨간 모자와 덥수룩한 흰 수염이 인상적인 까뽈 씨는 스위스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는 키우는 여덟 마리 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서 동물 권리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치권에 대한 로비가 실패하자 수년에 걸쳐 무려 10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고, 결국 법안을 발의하고 정부를 설득해 국민투표에까지 부쳤다. '가축도 존엄성을 지킬 권리가 있으며 소의 뿔을 그대로 두는 것이 소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지난 일요일(11월 25일) 드디어 스위스의 국가의 정체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이른바 '쇠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캠페인 이름은 '11월 25일에 쇠뿔 이니셔이브에 대해 예스(네)라고 말하세요!'

<11월 25일 ‘소들에게 뿔을’ 이니셔티브에 찬성표를 던져주세요> 캠페인
내용인즉 쇠뿔이 나기 시작할 때 불에 달군 쇠로 지져서 제거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처럼 그대로 자라도록 놔두는 농부들에게는, 뿔이 있는 소들에게 필요한 보다 넓은 사육 공간 확보를 장려하는 뜻으로 보조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부자 나라답게 액수로 마리당 연 190스위스프랑, 우리 돈 21만 6천 원가량을 지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 무려 3천만 스위스프랑, 우리 돈 340억 원 정도의 정부 예산이 추가로 소요되게 된다. 당연히 정부는 반길 리 없다. 참고로 스위스 전체 농업 예산은 30억 스위스 프랑이다. 축산 농가에서도 찬반이 팽팽하게 엇갈렸다. 반대하는 쪽은 소들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뿔이 있을 경우는 마리당 사육 공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찬반 양론이 어찌나 막상막하였던지 스위스 영농조합도 5만 2천여 회원들에게 공식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결국 유보하는 태도를 취했다.

투표 결과는 어땠을까? 스위스 공영방송 SRF 등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잠정 개표 결과 유권자의 54.7%가 반대표를 던졌다. 농업 예산 증가와 잠재적 위험성을 이유로. 그러나 까뽈 씨는 이런 논리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쇠뿔을 지질 때 나는 연기와 타는 냄새, 아무리 진정제를 투여하고 제거한다지만 소들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것이다. 따라서 쇠뿔 또는 염소 뿔 제거를 마치 개나 고양이 중성화 수술 정도로 가볍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국민 투표에서의 부결로 스위스의 '쇠뿔 논란'은 일단 일단락됐다. 하지만 동물을 인간의 입장에서보다는 동물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위해 주려는 까뽈 씨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의지와 끈기는 언제 다시 논란에 불을 붙이게 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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