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일본은 어쩌다 ‘조작’의 왕국이 됐나? 또 미쓰비시…

입력 2018.12.05 (17:28) 수정 2018.12.06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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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왕국 일본'.

이 정도면 만연했다는 표현이 맞다. 철강, 자동차, 부품 소재, 은행 심지어 정부까지 일본 곳곳에서 기준을 제멋대로 바꾸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등의 부정이 이뤄진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본 사회의 준법 의식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쓰비시 자회사 제품 20% 부정 출하


이번에 부정행위가 이뤄진 회사는 미쓰비시 전기의 자회사인 '도칸'이다.

각종 전기 제품이나 철도 등 폭넓은 분야에 쓰이는 고무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인데, 2008년 이후 생산한 고무 부품 253종에 대해 완화한 검사 기준을 쓰거나, 아예 검사를 생략하기도 하고 데이터를 조작하는 방법 등으로 부정하게 제품을 출하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기록은 2008년부터 남아 있지만 사실상 부정은 2000년경부터 시작되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2000년 이후 출고한 고무 부품의 약 7%, 783만 개에서 품질 데이터 조작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자료가 남아 있는 2008년 이후로 보면 20%, 5개 제품 중 1개는 부정 출하했다. 놀라운 수치다.

납품된 회사만 25개인데 모 회사인 미쓰비시 전기의 전자제품을 비롯해 PC 등에 쓰이는 전자기기용 방열 절연 고무, 신칸센, 그리고 철도 브레이크 관련 장치에도 사용되는 등 안전에 직결되는 분야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 파악하고도 1년 가까이 계속 출하

'도칸' 측은 지난 1월 재료 교체 과정에서 이 같은 부정 출하 사실을 밝혀내고 내부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럼에도 부정은 계속됐고 외부 공개도 이뤄지지 않았다.

부정 자체가 품질 보증, 제조, 기술 등 각 부처에서 폭넓게 발생하면서 만연해 있었고 부장급 등 간부까지 관련되면서 어디서부터 손 써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도칸의 한 사원은 아사히에 "잘못됐다고는 생각했지만, 발설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 내의 뿌리 깊은 폐쇄성, 암묵적 부정을 요구하는 분위기에 잘못을 알더라도 조직 내에서 이를 밝힐 수 없는 특유의 일본식 문화가 작동하면서 20년 가까이 '비정상'이 '정상'인 상태로 회사를 움직이게끔 했다는 지적이다.


마츠오카 도칸 사장은 "책임감의 결여, 낮은 품질관리 의식, 납기 우선" 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죄했다.

하지만 정작 마츠오카 사장 자신도 지난 1월 부정 발각 뒤 "출하를 정지할 경우 혼란을 초래한다"는 지시를 내리고, 검사에서 기준 성능에 미달한 일부 부품을 그대로 출하하도록 하는 등 어떤 원칙으로 대응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전선에 이어 미쓰비시 전기까지...부정 연타

미쓰비시 계열사들은 최근 부정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미쓰비시 자동차가 지난 2016년 연비를 조작해 신뢰를 잃으면서 사실상 르노-닛산에 편입됐고, 지난해 11월에는 미쓰비시 전선과 알루미늄 등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자회사 3곳이 기준 미달 제품을 출하했다가 발각됐다.

특히 미쓰비시 머티리얼 자회사 3곳은 품질이나 규격이 계약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고객의 이의제기가 없으면 출하가 문제없는 도쿠사이(特採) 관행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자동차 업체 등이 소재 업체에 대해 처음 거래하는 제품은 검사하지만, 이후에는 서면 등으로만 확인한다는 점을 이용해, "고객의 클레임이 없으면 문제가 안 된다"는 식으로 자의적 기준에 따라 규격에 못 미친 부정품을 정규품으로 출하한 것이다.

실제 완성품 내에서 어떤 부품이 어떤 잘못을 일으켰는지 파악이 어려운 점을 악용해, 고객의 신뢰를 배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미쓰비시 전선의 제품은 자위대 항공기나 함정 등에도 사용됐다.

여기에 이번 미쓰비시 전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시대부터 존속해온 일본 제일의 재벌 기업이라는 미쓰비시가 어떤 기업 문화를 가지고 지금까지 생존해왔는지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만연한 데이터 조작...'숫자'와 '기준'을 무시하는 일본 사회

최근 몇 년간 일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준' 무시, 그리고 임의적인 숫자 대입과 데이터 조작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17년 고베 제강이 알루미늄과 동 제품 등의 검사를 조작해 기준이 미치지 못한 제품을 출하하다 적발됐고, 닛산, 스바루, 스즈키, 마쓰다 등의 대형 완성차 업체들은 무자격자 검사와 배기가스, 연비 측정 등에서 데이터 조작이 발각됐다.


여기에 첨단 섬유업체인 도레이, 대기업 산하 기업인 히타치 카세이 등 소재 회사의 부정도 잇따라 드러났다.

일본 사회에 가장 충격을 준 것은 건물용 지진 대책 장치인 '댐퍼' 등을 만드는 KYB와 가와킨 홀딩스 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제품을 그대로 건물에 설치한 사건이었다. 언제 기준 미달 제품이 모두 교체될 수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또 요코하마의 지역 은행은 고객 데이터를 조작해 대규모 부정 대출을 저지르기도 했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 또한 의무 장애인 고용률을 맞추기 위해 제멋대로 기준을 적용하면서 장애인 고용실적을 7,500명이나 부풀렸다가 최근 급하게 장애인 채용을 서두르고 있다.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에 대한 제멋대로 해석과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의식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도성장 그리고 쇠퇴기...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나다

일본 사회에서 이처럼 최근 들어 한꺼번에 관련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고도 성장기, 빠른 속도로 성장을 따라 잡아가던 일본 기업들은 90년대 들어 버블이 붕괴되면서 혹독한 쇠퇴기를 겪게 된다.

성장기에 맛보지 못했던 생존에의 몸부림은 회사 조직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어느 정도 부정이 있더라도 조직을 위해 눈 감고 넘어가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검사 단계에서의 부정은 비용적 측면에서 제품 제조보다는 완성 후 검사 단계의 규모를 우선해 줄이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쇠퇴기를 겪은 뒤 2010년도 이후 일본 경제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한번 부정에 길든 조직 체계는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다. 연비 조작을 저지른 미쓰비시 자동차의 경우도 사내에서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또 부정이 발견되고도 부정 출하가 계속된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는 것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바로잡을 인력 등의 투입이 곧바로 이뤄질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철저한 준법 의식과 장인 정신이 곁들여진 '모노 즈쿠리' 정신을 자랑해온 일본 기업, 그리고 일본 사회.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더 깊은 곳까지 썩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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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일본은 어쩌다 ‘조작’의 왕국이 됐나? 또 미쓰비시…
    • 입력 2018-12-05 17:28:58
    • 수정2018-12-06 07:04:55
    특파원 리포트
'조작 왕국 일본'.

이 정도면 만연했다는 표현이 맞다. 철강, 자동차, 부품 소재, 은행 심지어 정부까지 일본 곳곳에서 기준을 제멋대로 바꾸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데이터'를 조작하는 등의 부정이 이뤄진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일본 사회의 준법 의식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쓰비시 자회사 제품 20% 부정 출하


이번에 부정행위가 이뤄진 회사는 미쓰비시 전기의 자회사인 '도칸'이다.

각종 전기 제품이나 철도 등 폭넓은 분야에 쓰이는 고무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인데, 2008년 이후 생산한 고무 부품 253종에 대해 완화한 검사 기준을 쓰거나, 아예 검사를 생략하기도 하고 데이터를 조작하는 방법 등으로 부정하게 제품을 출하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기록은 2008년부터 남아 있지만 사실상 부정은 2000년경부터 시작되온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2000년 이후 출고한 고무 부품의 약 7%, 783만 개에서 품질 데이터 조작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자료가 남아 있는 2008년 이후로 보면 20%, 5개 제품 중 1개는 부정 출하했다. 놀라운 수치다.

납품된 회사만 25개인데 모 회사인 미쓰비시 전기의 전자제품을 비롯해 PC 등에 쓰이는 전자기기용 방열 절연 고무, 신칸센, 그리고 철도 브레이크 관련 장치에도 사용되는 등 안전에 직결되는 분야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정 파악하고도 1년 가까이 계속 출하

'도칸' 측은 지난 1월 재료 교체 과정에서 이 같은 부정 출하 사실을 밝혀내고 내부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럼에도 부정은 계속됐고 외부 공개도 이뤄지지 않았다.

부정 자체가 품질 보증, 제조, 기술 등 각 부처에서 폭넓게 발생하면서 만연해 있었고 부장급 등 간부까지 관련되면서 어디서부터 손 써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도칸의 한 사원은 아사히에 "잘못됐다고는 생각했지만, 발설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 내의 뿌리 깊은 폐쇄성, 암묵적 부정을 요구하는 분위기에 잘못을 알더라도 조직 내에서 이를 밝힐 수 없는 특유의 일본식 문화가 작동하면서 20년 가까이 '비정상'이 '정상'인 상태로 회사를 움직이게끔 했다는 지적이다.


마츠오카 도칸 사장은 "책임감의 결여, 낮은 품질관리 의식, 납기 우선" 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하며 4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죄했다.

하지만 정작 마츠오카 사장 자신도 지난 1월 부정 발각 뒤 "출하를 정지할 경우 혼란을 초래한다"는 지시를 내리고, 검사에서 기준 성능에 미달한 일부 부품을 그대로 출하하도록 하는 등 어떤 원칙으로 대응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전선에 이어 미쓰비시 전기까지...부정 연타

미쓰비시 계열사들은 최근 부정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미쓰비시 자동차가 지난 2016년 연비를 조작해 신뢰를 잃으면서 사실상 르노-닛산에 편입됐고, 지난해 11월에는 미쓰비시 전선과 알루미늄 등 미쓰비시 머티리얼의 자회사 3곳이 기준 미달 제품을 출하했다가 발각됐다.

특히 미쓰비시 머티리얼 자회사 3곳은 품질이나 규격이 계약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고객의 이의제기가 없으면 출하가 문제없는 도쿠사이(特採) 관행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자동차 업체 등이 소재 업체에 대해 처음 거래하는 제품은 검사하지만, 이후에는 서면 등으로만 확인한다는 점을 이용해, "고객의 클레임이 없으면 문제가 안 된다"는 식으로 자의적 기준에 따라 규격에 못 미친 부정품을 정규품으로 출하한 것이다.

실제 완성품 내에서 어떤 부품이 어떤 잘못을 일으켰는지 파악이 어려운 점을 악용해, 고객의 신뢰를 배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미쓰비시 전선의 제품은 자위대 항공기나 함정 등에도 사용됐다.

여기에 이번 미쓰비시 전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시대부터 존속해온 일본 제일의 재벌 기업이라는 미쓰비시가 어떤 기업 문화를 가지고 지금까지 생존해왔는지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만연한 데이터 조작...'숫자'와 '기준'을 무시하는 일본 사회

최근 몇 년간 일본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준' 무시, 그리고 임의적인 숫자 대입과 데이터 조작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17년 고베 제강이 알루미늄과 동 제품 등의 검사를 조작해 기준이 미치지 못한 제품을 출하하다 적발됐고, 닛산, 스바루, 스즈키, 마쓰다 등의 대형 완성차 업체들은 무자격자 검사와 배기가스, 연비 측정 등에서 데이터 조작이 발각됐다.


여기에 첨단 섬유업체인 도레이, 대기업 산하 기업인 히타치 카세이 등 소재 회사의 부정도 잇따라 드러났다.

일본 사회에 가장 충격을 준 것은 건물용 지진 대책 장치인 '댐퍼' 등을 만드는 KYB와 가와킨 홀딩스 등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제품을 그대로 건물에 설치한 사건이었다. 언제 기준 미달 제품이 모두 교체될 수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는 실정이다.


또 요코하마의 지역 은행은 고객 데이터를 조작해 대규모 부정 대출을 저지르기도 했다.

기업뿐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 또한 의무 장애인 고용률을 맞추기 위해 제멋대로 기준을 적용하면서 장애인 고용실적을 7,500명이나 부풀렸다가 최근 급하게 장애인 채용을 서두르고 있다.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에 대한 제멋대로 해석과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의식이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고도성장 그리고 쇠퇴기...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나다

일본 사회에서 이처럼 최근 들어 한꺼번에 관련 문제가 터져 나오는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고도 성장기, 빠른 속도로 성장을 따라 잡아가던 일본 기업들은 90년대 들어 버블이 붕괴되면서 혹독한 쇠퇴기를 겪게 된다.

성장기에 맛보지 못했던 생존에의 몸부림은 회사 조직 자체를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어느 정도 부정이 있더라도 조직을 위해 눈 감고 넘어가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검사 단계에서의 부정은 비용적 측면에서 제품 제조보다는 완성 후 검사 단계의 규모를 우선해 줄이다 보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쇠퇴기를 겪은 뒤 2010년도 이후 일본 경제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지만 한번 부정에 길든 조직 체계는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다. 연비 조작을 저지른 미쓰비시 자동차의 경우도 사내에서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또 부정이 발견되고도 부정 출하가 계속된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는 것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바로잡을 인력 등의 투입이 곧바로 이뤄질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철저한 준법 의식과 장인 정신이 곁들여진 '모노 즈쿠리' 정신을 자랑해온 일본 기업, 그리고 일본 사회.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더 깊은 곳까지 썩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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