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돋보기] ‘국가주의자’ 트럼프 勝?…급변하는 세계질서

입력 2018.12.16 (14:00) 수정 2019.04.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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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업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 온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노란 조끼' 시위에 막혀 위기를 맞았다.

이민자 포용 정책 반대에 부딪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퇴장은 국제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지도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EU와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합의안을 둘러싼 국론 분열로 12일(현지시각) 보수당내 불신임 투표에 부쳐졌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투표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갈 길이 멀다.

메이 총리가 불신임 위기를 넘긴 날,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테러 의심 총격 사건을 고리로 불법 이민자에 맞서 미국 국경 장벽을 강화해야 한다며 민주당을 향해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공세를 폈다. '자유민주·관용·세계화'를 강조해 온 유럽 지도자들과 '반이민·보호무역·국가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대통령, 과연 누가 맞는 걸까?

■ “반(反)세계화·불안의 일상화”…“나는 국가주의자” 트럼프, 선전

2016년 7월, 'EU 탈퇴'라는 예상 밖의 국민투표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메이 총리가 취임한 지 2년 반이 흘렀지만, 영국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프랑스에서는 유류세 인상에 격분한 십수만 명의 '노란 조끼' 시위대가 '마크롱 퇴진'을 외쳤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 브렉시트와 프랑스 유류세 사태 기저에 깔린 핵심은 같다"면서 "세계화에 대한 반기,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지도자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일상화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노란 조끼 시위대가 좌우 두 세력의 요구 사항을 결합해 주장한 것은 놀랍다"며 "프랑스와 영국의 문제가 도시 엘리트에 대한 농촌 지역민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계급과 문화의 차이, 경제적 요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워싱턴포스트는 브루킹스 연구소를 인용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고용 소득의 72%가 대도시권에서 발생했다"며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분열'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도시 인구가 전체의 62.7%를 차지하지만 면적은 국토의 3.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먹고 사는 문제'·'인간답게 사는 문제'와 여기서 격차가 벌어진 데 따른 분노가 갈등을 유발하고, '내 일자리와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져 이민자를 배척하고 세계화에 반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파리에 집결한 ‘노란조끼’ 시위대파리에 집결한 ‘노란조끼’ 시위대

마크롱 대통령은 대기 오염 문제로 디젤에 한해 리터당 7.6센트(약 98원)씩 유류세 인상을 추진했다. 노란 조끼 시위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돈이다. 우리는 당장 먹을 게 없다"고 반발했다.

노란 조끼 시위는 대중교통 체계가 빈약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확산됐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선의(善意)의 정책이었지만 "당장 배가 고프다"는 비판에 아무도 반문하지 못했다.

마크롱의 독단적 리더십도 문제지만, '감세'를 외치는 (좌우 극단) 포퓰리즘의 승리였다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시위대에 투항한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 국민은 환경 보호를 위해 많은 돈을 지급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하며 자신의 파리 기후변화 협약 탈퇴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연관기사] [글로벌24 오늘의 픽] ‘위기의 마크롱’

EU라는 '역내 국가 간 단결'과 '친환경'·'이민자 보호'를 외친 유럽 지도자들과 트럼프 대통령은 철저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에 장애가 된다며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하는가 하면, 자국이 주도해 만든 다자무역체제 WTO가 중국만 유리하게 해 준다며 무용론을 주장하는 등 실리를 우선시했다. 국내 스캔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그제(현지시각 13일)도 "중국 경제가 곤경에 처했다면 오로지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자찬했다. '국가주의자'임을 천명하며 펼쳐온 그의 정책은 중간선거 결과가 보여주듯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 “‘정원사’ 미국, 손 놓아”…때마침 등장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워싱턴 포스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멸을 막기 위해 균형점을 찾던 노력이 흐릿해지고 '불안'과 '포퓰리즘'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질서로 등장했다"며 "브렉시트 국민투표 승리와 노란 조끼 시위는 지난 40년간 세계화가 바꿔놓은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라고 진단했다. 전후 국제 질서는 정말 막을 내리고 있는 걸까?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로버트 케이건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저서 '정글이 돌아온다(The Jungle Grows Back)'를 통해 "오늘날 국제 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정원사 역할을 자처해 온 미국이 손을 놓아 버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의 지배로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를 주도해 온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기수를 돌린 것은 트럼프의 등장 때문일까? 주류 정치권과 언론이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던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건 미국 국민들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오바마식 외교 계승'과 '이민자 포용'·'기후변화 적극 대응' 대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국경 장벽 설치'·'기후협약 탈퇴'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가 먹혀든 데에는 "경제나 살려라"·"일자리를 만들라"는 유권자의 바람 외에도 국제 정치 무대의 거대한 변화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지 30년이 돼 간다. 지금은 과거 소련만큼 미국에 위협적인 나라가 없다.

미국은 2008년 이후 셰일 오일 증산에 힘입어 올해 8월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산유국이 됐다. 최근 로키산맥에서는 앞으로 미국이 300년 동안 쓸 수 있는 셰일 오일이 매장된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석유 때문에 중동 문제에 적극 개입할 필요도, 산유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 ‘방위비 압박’ 예전 같지 않은 미국, “패권 도전에는 단호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기적으로 던지는 얘기가 있다. "방위비를 더 내라"는 말이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경우, 미국은 실제 전체 방위비 분담금의 70% 이상을 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의 부유한 국가들이 부담금을 늘려야 한다"며 불만을 표시해왔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가하는 트럼프의 방위비 압박은 국내 정치용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케이건 연구원은 "미국의 역할을 통해 세계가 누려온 평화와 민주주의·경제 발전 등의 혜택보다 이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 문제에 미국이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B-52 전략폭격기 2대가 지난달 남중국해 상공을 비행했다미국의 B-52 전략폭격기 2대가 지난달 남중국해 상공을 비행했다

하지만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는 가만두지 않는다. 이를 위한 미국의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미국은 최근, 냉전 시절 소련의 중·단거리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과 맺었던 INF 조약(핵무기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 배치 전면금지)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미국: 6,100억 달러, 러시아: 663억 달러)나 글로벌 파이어파워(미국: 6,470억 달러, 러시아: 470억 달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러시아의 국방비는 미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대한민국보다 한 단계 아래였던 러시아는 더이상 미국의 적수가 아니다. 그런 만큼 미국의 INF 탈퇴는 '중국 견제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와 대결하던 시절의 족쇄를 풀어 중국 인근에 미사일 배치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현재 필요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의도다.

[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냉전’의 산물 INF조약, ‘신(新)냉전’으로 사라지나?

유럽 안보와도 연관된 미국의 INF 탈퇴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마크롱 대통령이었다. 그는 영국의 브렉시트·메르켈의 퇴장으로 두 나라의 빈자리가 큰 상황에서 "서방세계가 추구해 온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데 앞장서 왔다. '정원사' 역할이 예전 같지 않은 미국에 서운해서였을까?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주도하면서 "미국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고,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얼굴 앞에 "국가주의는 애국주의의 배반!"·"낡은 망령" 운운하며 비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의 일침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격을 당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까지 거론하며 '국내 문제나 잘 챙기라'는 거였다. 한발 더 나아가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건 독일. 그때 프랑스는 어떻게 됐느냐"고 반격했다. '당신이 견제해야 할 건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며 과거 미국이 프랑스를 도와준 걸 잊지 말라'는 얘기다. 유럽군 창설 관련 발언을 두둔한 메르켈 총리까지 싸잡아 제압한 것이다.

리차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 회장은 "지금 서구 사회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내세운 전후 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무엇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치이고 있지만 유럽 지도자들의 길이 옳은지, 트럼프의 길이 옳은지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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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2-16 14:00:26
    • 수정2019-04-30 13: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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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업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 온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노란 조끼' 시위에 막혀 위기를 맞았다.

이민자 포용 정책 반대에 부딪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퇴장은 국제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지도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EU와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합의안을 둘러싼 국론 분열로 12일(현지시각) 보수당내 불신임 투표에 부쳐졌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는 투표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갈 길이 멀다.

메이 총리가 불신임 위기를 넘긴 날,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테러 의심 총격 사건을 고리로 불법 이민자에 맞서 미국 국경 장벽을 강화해야 한다며 민주당을 향해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공세를 폈다. '자유민주·관용·세계화'를 강조해 온 유럽 지도자들과 '반이민·보호무역·국가주의'를 표방한 트럼프 대통령, 과연 누가 맞는 걸까?

■ “반(反)세계화·불안의 일상화”…“나는 국가주의자” 트럼프, 선전

2016년 7월, 'EU 탈퇴'라는 예상 밖의 국민투표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메이 총리가 취임한 지 2년 반이 흘렀지만, 영국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프랑스에서는 유류세 인상에 격분한 십수만 명의 '노란 조끼' 시위대가 '마크롱 퇴진'을 외쳤다. 워싱턴포스트는 "영국 브렉시트와 프랑스 유류세 사태 기저에 깔린 핵심은 같다"면서 "세계화에 대한 반기, 이민자에 대한 두려움, 지도자에 대한 불신 등으로 인한 '사회 불안'이 일상화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노란 조끼 시위대가 좌우 두 세력의 요구 사항을 결합해 주장한 것은 놀랍다"며 "프랑스와 영국의 문제가 도시 엘리트에 대한 농촌 지역민의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라 계급과 문화의 차이, 경제적 요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워싱턴포스트는 브루킹스 연구소를 인용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고용 소득의 72%가 대도시권에서 발생했다"며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분열'을 이해하려면, 미국의 도시 인구가 전체의 62.7%를 차지하지만 면적은 국토의 3.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먹고 사는 문제'·'인간답게 사는 문제'와 여기서 격차가 벌어진 데 따른 분노가 갈등을 유발하고, '내 일자리와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해져 이민자를 배척하고 세계화에 반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파리에 집결한 ‘노란조끼’ 시위대
마크롱 대통령은 대기 오염 문제로 디젤에 한해 리터당 7.6센트(약 98원)씩 유류세 인상을 추진했다. 노란 조끼 시위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돈이다. 우리는 당장 먹을 게 없다"고 반발했다.

노란 조끼 시위는 대중교통 체계가 빈약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확산됐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선의(善意)의 정책이었지만 "당장 배가 고프다"는 비판에 아무도 반문하지 못했다.

마크롱의 독단적 리더십도 문제지만, '감세'를 외치는 (좌우 극단) 포퓰리즘의 승리였다고 외신들은 평가했다. 시위대에 투항한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 국민은 환경 보호를 위해 많은 돈을 지급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조롱하며 자신의 파리 기후변화 협약 탈퇴 결정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연관기사] [글로벌24 오늘의 픽] ‘위기의 마크롱’

EU라는 '역내 국가 간 단결'과 '친환경'·'이민자 보호'를 외친 유럽 지도자들과 트럼프 대통령은 철저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트럼프는 미국 경제에 장애가 된다며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하는가 하면, 자국이 주도해 만든 다자무역체제 WTO가 중국만 유리하게 해 준다며 무용론을 주장하는 등 실리를 우선시했다. 국내 스캔들로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그제(현지시각 13일)도 "중국 경제가 곤경에 처했다면 오로지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자찬했다. '국가주의자'임을 천명하며 펼쳐온 그의 정책은 중간선거 결과가 보여주듯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 “‘정원사’ 미국, 손 놓아”…때마침 등장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워싱턴 포스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멸을 막기 위해 균형점을 찾던 노력이 흐릿해지고 '불안'과 '포퓰리즘'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질서로 등장했다"며 "브렉시트 국민투표 승리와 노란 조끼 시위는 지난 40년간 세계화가 바꿔놓은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라고 진단했다. 전후 국제 질서는 정말 막을 내리고 있는 걸까?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로버트 케이건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저서 '정글이 돌아온다(The Jungle Grows Back)'를 통해 "오늘날 국제 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정원사 역할을 자처해 온 미국이 손을 놓아 버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의 지배로 세계의 평화질서가 유지되는 상황)를 주도해 온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로 기수를 돌린 것은 트럼프의 등장 때문일까? 주류 정치권과 언론이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던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건 미국 국민들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오바마식 외교 계승'과 '이민자 포용'·'기후변화 적극 대응' 대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국경 장벽 설치'·'기후협약 탈퇴'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가 먹혀든 데에는 "경제나 살려라"·"일자리를 만들라"는 유권자의 바람 외에도 국제 정치 무대의 거대한 변화가 작동한 결과이기도 하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지 30년이 돼 간다. 지금은 과거 소련만큼 미국에 위협적인 나라가 없다.

미국은 2008년 이후 셰일 오일 증산에 힘입어 올해 8월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 산유국이 됐다. 최근 로키산맥에서는 앞으로 미국이 300년 동안 쓸 수 있는 셰일 오일이 매장된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석유 때문에 중동 문제에 적극 개입할 필요도, 산유국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 ‘방위비 압박’ 예전 같지 않은 미국, “패권 도전에는 단호히”

트럼프 대통령이 주기적으로 던지는 얘기가 있다. "방위비를 더 내라"는 말이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경우, 미국은 실제 전체 방위비 분담금의 70% 이상을 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의 부유한 국가들이 부담금을 늘려야 한다"며 불만을 표시해왔다.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가하는 트럼프의 방위비 압박은 국내 정치용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케이건 연구원은 "미국의 역할을 통해 세계가 누려온 평화와 민주주의·경제 발전 등의 혜택보다 이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 문제에 미국이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B-52 전략폭격기 2대가 지난달 남중국해 상공을 비행했다
하지만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는 가만두지 않는다. 이를 위한 미국의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미국은 최근, 냉전 시절 소련의 중·단거리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과 맺었던 INF 조약(핵무기 장착용 중·단거리 미사일 배치 전면금지)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미국: 6,100억 달러, 러시아: 663억 달러)나 글로벌 파이어파워(미국: 6,470억 달러, 러시아: 470억 달러)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러시아의 국방비는 미국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대한민국보다 한 단계 아래였던 러시아는 더이상 미국의 적수가 아니다. 그런 만큼 미국의 INF 탈퇴는 '중국 견제용'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러시아와 대결하던 시절의 족쇄를 풀어 중국 인근에 미사일 배치가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현재 필요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의도다.

[연관기사] [글로벌 돋보기] ‘냉전’의 산물 INF조약, ‘신(新)냉전’으로 사라지나?

유럽 안보와도 연관된 미국의 INF 탈퇴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은 마크롱 대통령이었다. 그는 영국의 브렉시트·메르켈의 퇴장으로 두 나라의 빈자리가 큰 상황에서 "서방세계가 추구해 온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데 앞장서 왔다. '정원사' 역할이 예전 같지 않은 미국에 서운해서였을까? 독자적인 유럽군 창설을 주도하면서 "미국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고,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트럼프 대통령 얼굴 앞에 "국가주의는 애국주의의 배반!"·"낡은 망령" 운운하며 비판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의 일침은 바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격을 당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까지 거론하며 '국내 문제나 잘 챙기라'는 거였다. 한발 더 나아가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건 독일. 그때 프랑스는 어떻게 됐느냐"고 반격했다. '당신이 견제해야 할 건 미국이 아니라 독일이며 과거 미국이 프랑스를 도와준 걸 잊지 말라'는 얘기다. 유럽군 창설 관련 발언을 두둔한 메르켈 총리까지 싸잡아 제압한 것이다.

리차드 하스 미국 외교협회 회장은 "지금 서구 사회가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내세운 전후 질서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무엇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지금은 국내에서 치이고 있지만 유럽 지도자들의 길이 옳은지, 트럼프의 길이 옳은지는 훗날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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