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싹 사라진 ‘레이더’ 기사…日, 치고빠지기

입력 2018.12.31 (15:16) 수정 2018.12.3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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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레이더' 갈등 기사가 싹 사라졌다. 연일 맹공(?)을 퍼붓던 일본 정부나 언론의 태도를 감안하면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

사실상 목적을 달성한 아베 정권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2019년은 일본에 주요 선거가 많아 아베 총리가 자기 정치를 위해 우리나라를 자꾸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1면을 장식하던 기사...1건도 없어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초계기 영상’ 기사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초계기 영상’ 기사

지난 28일 오후 늦게 일본 방위성이 해상 자위대 초계기가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자 일본 언론은 일제히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9일 조간의 경우 6개 주요 신문 가운데 요미우리, 마이니치, 도쿄, 산케이 등 4개 신문이 사진과 함께 이를 1면에 전했고, 아사히와 니혼게이자이도 각각 2~3면에 이 소식을 자세하게 다뤘다.

"레이더 조준 긴박"(마이니치)
"한국 군함 '의도' 응답 안 해"(산케이)

일본 초계기에서 레이더를 감지했다는 조종사의 녹음 목소리를 인용해 한국 구축함의 레이더 겨냥을 기정사실화하고, 구축함을 호출했으나 대답이 없었다는 내용 등이 주를 이뤘다.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군함 근처에 이미 북 어선이 있었다며 레이더를 가동할 이유가 없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우리 국방부의 반박 내용 발표는 단지 "한국 국방부가 레이더 가동 사실을 부인했다"는 정도로 짧게 취급됐을 뿐이며, 특히 실상을 밝힐 수 있는 레이더 주파수를 공개하라는 우리 측 요구를 다룬 곳은 거의 없었다.

NHK도 메인뉴스를 통해 해상자위대 전 사령관의 인터뷰를 싣고 우리 국방부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사실상 미디어 전쟁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 열기가 불과 하루 만에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조간 보도 이후 오후 발행되는 석간부터 관련 기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있고, NHK 또한 29일 메인 뉴스 보도 이후 관련 단신 한 줄 없을 정도다.

지난 21일 한일 간 레이더 갈등이 표출된 이후 방위성 관계자 등의 언급을 인용해 연일 일본 정부의 불쾌감을 전하고 한국군의 잘못이라고 따지고 들던 일주일간의 보도 흐름을 고려하면 의아할 정도로 관련 기사가 '싹' 사라져 버렸다.

밥상머리 여론 가져왔다 판단했나?

양력설을 쇠는 일본은 12월 마지막 주와 1월 첫주에 휴무하는 회사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 귀성 행렬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역시 고향을 찾아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즌이 바로 지금이기도 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밥상머리 여론'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지난 28일 오후 늦게 공개된 자위대 초계기의 레이더 영상은 그런 면에서 '세밑 여론'을 형성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공개됐다고 볼 수 있다.

금요일 밤부터 이뤄지기 시작한 귀성 행렬에 각종 미디어를 통해 쏟아진 해상 자위대 초계기 조종사의 긴박한(?) 목소리는 내용을 떠나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 신문은 영상 공개 과정과 관련, "여론에 민감한 총리 관저의 지시다"라는 방위성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총리 관저가 여론 대책의 하나로 레이더 영상을 공개했음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야 일본 방위상이와야 일본 방위상

일본 언론은 레이더 갈등 표출 이후 방위성 관계자의 언급을 인용해 보도를 이어갔다. 레이더 영상이 공개된 만큼 그간 일본 언론의 흐름을 봤을 경우 우리 국방부 주장에 대해 방위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반박하는 기사가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 보였지만 정반대로 단 한 건의 기사도 나오지 않는 급격한 방향 틀기가 이뤄졌다.

이미 밥상머리 여론에서 충분히 효과를 봤다고 생각한 아베 총리 관저가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여론전을 펼치고 방위성에 대한 '입단속'에 나섰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애초 총리 관저의 의지로 강행된 '영상 공개'에 불편함을 보이던 방위성이 이 문제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부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 많은 해...아베 정권의 '입'에 한일 관계 우려

올해 일본은 특히 중요 선거가 많다.

4월 통일지방 선거에 이어, 7월에는 참의원 선거도 실시된다.

주요 지방 자치단체의 장이 바뀌는 만큼 지자체의 권력이 어떻게 자리 잡느냐는 아베 정권으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원전의 재가동 문제 등과 같이 지자체의 협조가 없을 경우 정책 시행이 벽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과거 지방 선거 패배 후 이어진 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해 정권을 내준 경험이 있는 아베 총리로서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또 총리가 개헌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7월 참의원 선거는 개헌선을 유지할 수 있는 의석 확보가 아베 정권의 추동력을 이어갈 수 있느냐와도 직결된다.

이렇듯 일본 내의 정치적 분수령이 있을 경우 아베 총리가 한반도 상황을 이용하고, 한국을 지지율 재고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새삼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북한 위협론을 들고 나와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렀고, 각종 스캔들로 아베 총리 지지율이 급락했을 때도 과거사 문제 등을 놓고 강경 대응해 정치적 전환점을 마련했던 아베 총리다. 올해 중요 선거를 앞두고 아베 정권이 같은 패턴을 반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레이더 갈등은 '자위대'의 헌법 명기를 추진하고 있는 아베 정권으로서는 자위대의 존재감을 내세울 수 있는 호재 중의 호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아베식 여론전은 이제 시작일 수 있다.

일본 전국 시대를 제패하고 통일을 이룬 후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감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아베 총리가 또다시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정치에 한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상황을 이용하려 할지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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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싹 사라진 ‘레이더’ 기사…日, 치고빠지기
    • 입력 2018-12-31 15:16:23
    • 수정2018-12-31 15:17:19
    특파원 리포트
일본에서 '레이더' 갈등 기사가 싹 사라졌다. 연일 맹공(?)을 퍼붓던 일본 정부나 언론의 태도를 감안하면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

사실상 목적을 달성한 아베 정권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2019년은 일본에 주요 선거가 많아 아베 총리가 자기 정치를 위해 우리나라를 자꾸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1면을 장식하던 기사...1건도 없어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초계기 영상’ 기사
지난 28일 오후 늦게 일본 방위성이 해상 자위대 초계기가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자 일본 언론은 일제히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9일 조간의 경우 6개 주요 신문 가운데 요미우리, 마이니치, 도쿄, 산케이 등 4개 신문이 사진과 함께 이를 1면에 전했고, 아사히와 니혼게이자이도 각각 2~3면에 이 소식을 자세하게 다뤘다.

"레이더 조준 긴박"(마이니치)
"한국 군함 '의도' 응답 안 해"(산케이)

일본 초계기에서 레이더를 감지했다는 조종사의 녹음 목소리를 인용해 한국 구축함의 레이더 겨냥을 기정사실화하고, 구축함을 호출했으나 대답이 없었다는 내용 등이 주를 이뤘다.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 군함 근처에 이미 북 어선이 있었다며 레이더를 가동할 이유가 없었다는 데 초점을 맞추기도 했다.

우리 국방부의 반박 내용 발표는 단지 "한국 국방부가 레이더 가동 사실을 부인했다"는 정도로 짧게 취급됐을 뿐이며, 특히 실상을 밝힐 수 있는 레이더 주파수를 공개하라는 우리 측 요구를 다룬 곳은 거의 없었다.

NHK도 메인뉴스를 통해 해상자위대 전 사령관의 인터뷰를 싣고 우리 국방부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등 사실상 미디어 전쟁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이 열기가 불과 하루 만에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조간 보도 이후 오후 발행되는 석간부터 관련 기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있고, NHK 또한 29일 메인 뉴스 보도 이후 관련 단신 한 줄 없을 정도다.

지난 21일 한일 간 레이더 갈등이 표출된 이후 방위성 관계자 등의 언급을 인용해 연일 일본 정부의 불쾌감을 전하고 한국군의 잘못이라고 따지고 들던 일주일간의 보도 흐름을 고려하면 의아할 정도로 관련 기사가 '싹' 사라져 버렸다.

밥상머리 여론 가져왔다 판단했나?

양력설을 쇠는 일본은 12월 마지막 주와 1월 첫주에 휴무하는 회사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 귀성 행렬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역시 고향을 찾아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즌이 바로 지금이기도 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가족들이 모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밥상머리 여론'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지난 28일 오후 늦게 공개된 자위대 초계기의 레이더 영상은 그런 면에서 '세밑 여론'을 형성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공개됐다고 볼 수 있다.

금요일 밤부터 이뤄지기 시작한 귀성 행렬에 각종 미디어를 통해 쏟아진 해상 자위대 초계기 조종사의 긴박한(?) 목소리는 내용을 떠나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 신문은 영상 공개 과정과 관련, "여론에 민감한 총리 관저의 지시다"라는 방위성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총리 관저가 여론 대책의 하나로 레이더 영상을 공개했음을 밝힌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야 일본 방위상
일본 언론은 레이더 갈등 표출 이후 방위성 관계자의 언급을 인용해 보도를 이어갔다. 레이더 영상이 공개된 만큼 그간 일본 언론의 흐름을 봤을 경우 우리 국방부 주장에 대해 방위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반박하는 기사가 이어질 가능성이 많아 보였지만 정반대로 단 한 건의 기사도 나오지 않는 급격한 방향 틀기가 이뤄졌다.

이미 밥상머리 여론에서 충분히 효과를 봤다고 생각한 아베 총리 관저가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여론전을 펼치고 방위성에 대한 '입단속'에 나섰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애초 총리 관저의 의지로 강행된 '영상 공개'에 불편함을 보이던 방위성이 이 문제에 더 이상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부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 많은 해...아베 정권의 '입'에 한일 관계 우려

올해 일본은 특히 중요 선거가 많다.

4월 통일지방 선거에 이어, 7월에는 참의원 선거도 실시된다.

주요 지방 자치단체의 장이 바뀌는 만큼 지자체의 권력이 어떻게 자리 잡느냐는 아베 정권으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원전의 재가동 문제 등과 같이 지자체의 협조가 없을 경우 정책 시행이 벽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과거 지방 선거 패배 후 이어진 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해 정권을 내준 경험이 있는 아베 총리로서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또 총리가 개헌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7월 참의원 선거는 개헌선을 유지할 수 있는 의석 확보가 아베 정권의 추동력을 이어갈 수 있느냐와도 직결된다.

이렇듯 일본 내의 정치적 분수령이 있을 경우 아베 총리가 한반도 상황을 이용하고, 한국을 지지율 재고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새삼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북한 위협론을 들고 나와 중의원을 해산하고 선거를 치렀고, 각종 스캔들로 아베 총리 지지율이 급락했을 때도 과거사 문제 등을 놓고 강경 대응해 정치적 전환점을 마련했던 아베 총리다. 올해 중요 선거를 앞두고 아베 정권이 같은 패턴을 반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번 레이더 갈등은 '자위대'의 헌법 명기를 추진하고 있는 아베 정권으로서는 자위대의 존재감을 내세울 수 있는 호재 중의 호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아베식 여론전은 이제 시작일 수 있다.

일본 전국 시대를 제패하고 통일을 이룬 후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 침략을 감행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아베 총리가 또다시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정치에 한국과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상황을 이용하려 할지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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