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살아있는 유령’이 된 남성…12년 전 ‘허위 사망신고’의 비밀

입력 2019.01.06 (07:00) 수정 2019.01.0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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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등지고 자연인 됐던 남자...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망처리'
수술 받으러 병원 갔다가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12년 전 아들이 사망신고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는 뭘까요? 저 쪽 세상의 일이야 알 재간이 없지만 산 자들의 세상에서는 냉혹하게도 서류 한장이 삶과 죽음을 가르곤합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인 사망신고 얘깁니다.

그런데 이 서류 한 장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십여 년을 망자의 신분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속에나 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유령'이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고향을 등지고 자연인이 된 남자

사연의 주인공은 68살 A 씨 입니다. 대전에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던 A 씨에게 어느날부터인가 불행이 잇따라 닥쳤습니다. 사업 실패에 이어 이혼까지, 거듭된 불행에 A 씨는 그만 고향과 가족을 등졌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습니다.

유랑생활을 시작한 A 씨의 발길은 산으로 향했습니다. 충청북도의 한 야산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에서 어떻게 지냈던 걸까요? 잘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만 아마 우리가 흔히 '자연인'이라고 부르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겁니다. 그렇게 보낸 세월만 17년이었다고합니다.

그렇게 발길 닿는대로 떠도는 삶을 살던 A 씨는 2017년에는 제주도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지낼 곳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목사 부부를 만나 교회에 몸을 의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랜 유랑 생활 때문이었는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지내던 교회도 떠나 한 복지시설로 들어가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보니 뇌종양이었는데, 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A 씨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12년 전 허위 사망신고...무슨 일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겹쳤을겁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당장 수술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자 신분으로 되어있으니 건강보험조차 되지 않은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알고보니 이른바 '인우보증제도' 때문이었습니다. 현행 사망신고 제도는 병원의 사망진단서나 검안서 등을 첨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두 명의 증명인을 세워 사망신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을 신고하면서 두 명의 증명인이 이를 보증하면, 병원 등 다른 기관에서 발급하는 공식 서류를 첨부하지 않아도 사망 처리가 되는겁니다. 형식적 심사권 밖에 없는 공무원은 이를 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A 씨의 경우에는 신고인은 아들, 증명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처남과 처제였습니다. 신고일자는 2007년으로, A 씨가 5년 전인 2002년 집에서 사망했다고 신고서에 적혀있었습니다. 산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사망자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셈입니다.

A 씨가 가족과 연을 끊고나서부터 사망신고가 되기까지 일련의 시간동안 이들 가족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왜 사망신고를 한 건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어쩌면 수년간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실종자의 경우 5년이 지나면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사망자에서 다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A 씨는 급히 신원 회복 절차에 나섰습니다. 일단 수술이 급했습니다. 다행히 사망 신고 전 등록된 지문과 A 씨의 실제 지문이 일치한다는 것을 제주경찰에서의 십지지문 조회를 통해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객관적 증명 자료가 마련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절차는 마냥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A 씨가 사망자로 되어있는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A 씨 주소지의 관할 법원인 대전가정법원으로 가야하는데 이 쉬운 일이 A 씨에겐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사망자 신분이라 신원을 증명할 수 없어 배도, 비행기도 타지 못해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었던겁니다.

결국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도움을 청했고, 공단 대전지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법원을 찾지 않고도 대전가정법원에서 무사히 가족등록부 정정 결정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는게 인정된 겁니다. 지난해 11월의 일입니다.

이제 A 씨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관할하는 곳은 대전, 실제 소재지는 제주인 탓에 법원 결정 이후에도 행정적 절차가 조금 지연됐지만 1월 안에는 신분 회복이 완전히 마무리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면 A 씨는 건강보험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배도 비행기도 탈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각종 복지혜택도 충분히 누릴 수 있을겁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망자였지만 이제 당당한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A 씨는 신원이 회복되는대로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수술을 받고나면 다시 고향에서 자리를 잡을 생각도 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향을 떠나 사망자가 됐던 사람이 다시 고향에서 새 삶을 사는 셈이됩니다.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삶을 산다고도 볼 수 있을겁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지가 너무 오래됐으니, 가족들과 다시 연락이돼서 가족들 품에서 잘 지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담당 변호사로서의 작은 소망입니다."

A 씨의 사건을 맡은 법률구조공단 대전지부 이기호 변호사의 말입니다. 사건을 맡은 변호사도, 유랑 생활을 하며 알게된 지인들도 모두 A 씨의 새 삶에는 따뜻한 햇살만 내리쬐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A 씨가 그랬듯 아직도 살아있는 유령으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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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살아있는 유령’이 된 남성…12년 전 ‘허위 사망신고’의 비밀
    • 입력 2019-01-06 07:00:47
    • 수정2019-01-06 14:01:01
    취재후·사건후
■가족 등지고 자연인 됐던 남자...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망처리'
수술 받으러 병원 갔다가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12년 전 아들이 사망신고

산 자와 죽은 자,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는 뭘까요? 저 쪽 세상의 일이야 알 재간이 없지만 산 자들의 세상에서는 냉혹하게도 서류 한장이 삶과 죽음을 가르곤합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인 사망신고 얘깁니다.

그런데 이 서류 한 장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십여 년을 망자의 신분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속에나 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유령'이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고향을 등지고 자연인이 된 남자

사연의 주인공은 68살 A 씨 입니다. 대전에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던 A 씨에게 어느날부터인가 불행이 잇따라 닥쳤습니다. 사업 실패에 이어 이혼까지, 거듭된 불행에 A 씨는 그만 고향과 가족을 등졌습니다. 1996년의 일이었습니다.

유랑생활을 시작한 A 씨의 발길은 산으로 향했습니다. 충청북도의 한 야산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산에서 어떻게 지냈던 걸까요? 잘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만 아마 우리가 흔히 '자연인'이라고 부르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겁니다. 그렇게 보낸 세월만 17년이었다고합니다.

그렇게 발길 닿는대로 떠도는 삶을 살던 A 씨는 2017년에는 제주도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지낼 곳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목사 부부를 만나 교회에 몸을 의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랜 유랑 생활 때문이었는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 지내던 교회도 떠나 한 복지시설로 들어가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알고보니 뇌종양이었는데, 치료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A 씨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12년 전 허위 사망신고...무슨 일이?

뭐라 표현하기 힘든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이 겹쳤을겁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당장 수술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자 신분으로 되어있으니 건강보험조차 되지 않은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알고보니 이른바 '인우보증제도' 때문이었습니다. 현행 사망신고 제도는 병원의 사망진단서나 검안서 등을 첨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 두 명의 증명인을 세워 사망신고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사망을 신고하면서 두 명의 증명인이 이를 보증하면, 병원 등 다른 기관에서 발급하는 공식 서류를 첨부하지 않아도 사망 처리가 되는겁니다. 형식적 심사권 밖에 없는 공무원은 이를 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A 씨의 경우에는 신고인은 아들, 증명인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처남과 처제였습니다. 신고일자는 2007년으로, A 씨가 5년 전인 2002년 집에서 사망했다고 신고서에 적혀있었습니다. 산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사이 아무도 모르게 사망자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셈입니다.

A 씨가 가족과 연을 끊고나서부터 사망신고가 되기까지 일련의 시간동안 이들 가족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왜 사망신고를 한 건지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 어쩌면 수년간 연락이 전혀 되지 않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실종자의 경우 5년이 지나면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사망자에서 다시 살아있는 사람으로

A 씨는 급히 신원 회복 절차에 나섰습니다. 일단 수술이 급했습니다. 다행히 사망 신고 전 등록된 지문과 A 씨의 실제 지문이 일치한다는 것을 제주경찰에서의 십지지문 조회를 통해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객관적 증명 자료가 마련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후의 절차는 마냥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A 씨가 사망자로 되어있는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하기 위해서는 A 씨 주소지의 관할 법원인 대전가정법원으로 가야하는데 이 쉬운 일이 A 씨에겐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사망자 신분이라 신원을 증명할 수 없어 배도, 비행기도 타지 못해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었던겁니다.

결국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도움을 청했고, 공단 대전지부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법원을 찾지 않고도 대전가정법원에서 무사히 가족등록부 정정 결정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는게 인정된 겁니다. 지난해 11월의 일입니다.

이제 A 씨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관할하는 곳은 대전, 실제 소재지는 제주인 탓에 법원 결정 이후에도 행정적 절차가 조금 지연됐지만 1월 안에는 신분 회복이 완전히 마무리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면 A 씨는 건강보험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배도 비행기도 탈 수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각종 복지혜택도 충분히 누릴 수 있을겁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망자였지만 이제 당당한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요.

A 씨는 신원이 회복되는대로 제주를 떠나 육지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수술을 받고나면 다시 고향에서 자리를 잡을 생각도 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고향을 떠나 사망자가 됐던 사람이 다시 고향에서 새 삶을 사는 셈이됩니다.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삶을 산다고도 볼 수 있을겁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지가 너무 오래됐으니, 가족들과 다시 연락이돼서 가족들 품에서 잘 지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담당 변호사로서의 작은 소망입니다."

A 씨의 사건을 맡은 법률구조공단 대전지부 이기호 변호사의 말입니다. 사건을 맡은 변호사도, 유랑 생활을 하며 알게된 지인들도 모두 A 씨의 새 삶에는 따뜻한 햇살만 내리쬐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A 씨가 그랬듯 아직도 살아있는 유령으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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