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 오도독] SKY캐슬의 시가총액

입력 2019.01.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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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SKY캐슬에는 한 주택단지가 나온다. 의사, 변호사 등 한국의 전문직 상류층이 모여 사는 이 드라마 속 가상의 주택단지는 화려하다 못해 으리으리하다.

그러나 한국의 주택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드라마에서처럼 이른바 ‘잘 나가는’ 의사나 변호사들일지라도, 이들 직종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서울 강남이나 서초구 같은 아파트 밀집 지역이다. 이곳에는 아직 재건축이 되지 않은 수십 년 된 허름한 아파트들이 많다. 아파트는 허름하지만 보통 한 채당 2-30억 원씩 하는 곳들이다. 어떤 곳은 수도에서 가끔 녹물이 나오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한강변 쥐들이 많아 골칫거리라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다. 이른바 ‘한국형 부자들’의 민낯은 드라마속 가상의 현실만큼 화려하거나 으리으리하지는 않다.


그러나 SKY캐슬에서 묘사하는 한국의 ‘성적 지상주의’와 언론이 조장하는 ‘아파트가 제일주의’는 사뭇 흡사하다. 오로지 피라미드 저 위 꼭대기, 전교 1등을 위해 아이들을 내모는 드라마 속 학부모들처럼 우리 언론도 아파트 가격이 높아지는 것이 최고의 선인양 보도해왔다.


그 대표적인 단어가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말이다.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키워드로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면 1991년부터 무려 8천 건에 달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이 기사들을 유형별로 정리해보면 우리 언론이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서 독자나 시청자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1. 우리 언론은 서울, 수도권 등 아파트의 시가총액을 경마중계식으로 보도해 왔다. 2001년 170조 원대였던 서울 아파트 시가총액이 올라갈 때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기사를 제공하는 부동산정보업체에서 보도자료를 낼 때마다, 언론은 빠짐없이 이를 받아썼다. 2001년 100조 원대였던 서울 아파트 시가총액은 2003년에는 300조 원이 됐고, 2016년에는 750조 원이 됐으며 지난해에는 860조 원이 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언론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기사는 없었다. 모두 부동산정보업체들이 제공한 보도자료에 바탕을 둔 기사들이었다.


2. 분기마다, 또는 해마다 아파트 시가총액을 서울, 수도권, 전국으로 나눠 조사해 언론에 뿌리는 것도 식상했던지 언론은 아파트단지에 따라 석차를 두기 시작했다. 2006년 연합뉴스 기사의 첫 문장이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렉슬이 타워팰리스를 제치고 강남구 아파트별 시가총액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서 연합뉴스에 나온 문장은 “고가 아파트의 대명사인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는 2조 천120억 9천만 원으로 2위로 밀렸다" 는 내용이었다. 언론은 이즈음 파크리오가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를 제치고 시가총액 1위로 등극했다거나, 노원구 아파트 시가총액이 서초구에 이어 4위로 등극했다고 하면서, 단지별로, 구별로 아파트 시가총액을 토대로 경쟁시키듯이 기사를 썼다. 전국석차로 어떤 학생이 1등을 했고, 누가 2등을 했다고 중계하면서 보도하는 식이다.


3. 그러나 아파트 가격이 조금이라도 떨어졌다 싶으면 시가총액은 “증발”했다.
“서울 재건축 석 달새 7조 원 증발” (2008년 MBC)
“1.11 대책 이후 재건축 시가총액 1조 원 증발”(2007년 연합뉴스)
“강남권 아파트값 약세...시가총액 2조 8천억 원 증발”(2008년 MBN)


최근 들어서도 이런 경향은 계속된다.

“강남 재건축 와르르...1년만에 3조 증발”( 2018년 조선비즈)
“서울 재건축 아파트 시가총액 3조 5천억 원 급감...9.13 대책 영향”(2019년 KBS)
“강남 4구 재건축 아파트 시총 한 달 반 개 1조 원 날아가”(2018년 경향신문)


조선일보와 같은 상업지들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3사, 심지어는 공영방송인 KBS도 서울 재건축 아파트의 “시가총액”이 급감했다는 식의 기사를 쓰고 있다. 아파트 시가총액이 급감하고, 증발하고, 날아간다. 모두 부정적인 표현이다. 시가총액이 급감하고 증발하고 날아가버리니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아까운 돈이 날아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다. 이 기사들에서 부동산 버블이 빠지고 있으니 다행이란 메시지는 읽혀지지 않는다. 기사는 철저히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의 관점, 현실 속 SKY캐슬에 사는 이들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시가총액이란 원래 주식 시장에 상장된 회사의 시장 평가 가치를 의미한다. A기업이 상장한 주식이 백만 주고 오늘 그 주당 가격이 10원이라면 A기업의 시가총액은 천만 원이다.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증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만큼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받는다는 것이니, 그렇게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받으면 설사 증자를 하더라도 높은 가격에 할 수 있고, 금융조달비용도 싸지고 기업은 투자여력이 높아지고, 더 많은 고용창출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파트의 시가총액이 올라가기만 하면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에 치명상을 안길 수 있다. 시중에 풀린 부동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려 불로소득을 조장하면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사회적 갈등만 높아진다. 게다가 돈이 들어가야 할 곳, 진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산업 부문으로 가지 않으니 기업은 자금 조달에 애로를 겪고 설비 투자에 소홀하게 된다. 땅 사서 건물이나 아파트 지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에서 어떤 기업인이 힘들게 제조업을 하려 하고, 어떤 직장인이 노동 의욕에 넘쳐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려 하겠는가? 하느님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데 투자든, 투기든 돈 벌어서 한 몫 챙기는 게 사람들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이 급전직하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수십 년 넘도록 ‘아파트 시가총액’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제공하는 보도자료 한 줄에 의지해서...그게 누구의 관심사인가? 그게 기사로서의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런 기사들이 양산됨으로써 한국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임대소득, 불로소득, 지대를 추구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창시자라는 아담 스미스마저도 가장 혐오하는 사회였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가치관에도 위배되는 불로소득만 조장할 수 있는 기사를 공영방송인 KBS까지 계속 써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하던 그대로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생산하는 기사 자체의 생산 방식에 근본적 의문을 던져야 한다. 부동산 정보업체에서 보도자료를 제공한다고 그게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던 대로 계속 쳇바퀴만 굴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 언론은 SKY캐슬 속 학부모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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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언론 오도독] SKY캐슬의 시가총액
    • 입력 2019-01-22 07:00:30
    한국언론 오도독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JTBC 드라마 SKY캐슬에는 한 주택단지가 나온다. 의사, 변호사 등 한국의 전문직 상류층이 모여 사는 이 드라마 속 가상의 주택단지는 화려하다 못해 으리으리하다.

그러나 한국의 주택 현실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드라마에서처럼 이른바 ‘잘 나가는’ 의사나 변호사들일지라도, 이들 직종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은 서울 강남이나 서초구 같은 아파트 밀집 지역이다. 이곳에는 아직 재건축이 되지 않은 수십 년 된 허름한 아파트들이 많다. 아파트는 허름하지만 보통 한 채당 2-30억 원씩 하는 곳들이다. 어떤 곳은 수도에서 가끔 녹물이 나오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 한강변 쥐들이 많아 골칫거리라는 기사도 나온 적이 있다. 이른바 ‘한국형 부자들’의 민낯은 드라마속 가상의 현실만큼 화려하거나 으리으리하지는 않다.


그러나 SKY캐슬에서 묘사하는 한국의 ‘성적 지상주의’와 언론이 조장하는 ‘아파트가 제일주의’는 사뭇 흡사하다. 오로지 피라미드 저 위 꼭대기, 전교 1등을 위해 아이들을 내모는 드라마 속 학부모들처럼 우리 언론도 아파트 가격이 높아지는 것이 최고의 선인양 보도해왔다.


그 대표적인 단어가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말이다.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키워드로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면 1991년부터 무려 8천 건에 달하는 기사들이 쏟아진다. 이 기사들을 유형별로 정리해보면 우리 언론이 “아파트 시가총액”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면서 독자나 시청자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1. 우리 언론은 서울, 수도권 등 아파트의 시가총액을 경마중계식으로 보도해 왔다. 2001년 170조 원대였던 서울 아파트 시가총액이 올라갈 때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기사를 제공하는 부동산정보업체에서 보도자료를 낼 때마다, 언론은 빠짐없이 이를 받아썼다. 2001년 100조 원대였던 서울 아파트 시가총액은 2003년에는 300조 원이 됐고, 2016년에는 750조 원이 됐으며 지난해에는 860조 원이 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언론이 자체적으로 조사한 기사는 없었다. 모두 부동산정보업체들이 제공한 보도자료에 바탕을 둔 기사들이었다.


2. 분기마다, 또는 해마다 아파트 시가총액을 서울, 수도권, 전국으로 나눠 조사해 언론에 뿌리는 것도 식상했던지 언론은 아파트단지에 따라 석차를 두기 시작했다. 2006년 연합뉴스 기사의 첫 문장이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 렉슬이 타워팰리스를 제치고 강남구 아파트별 시가총액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서 연합뉴스에 나온 문장은 “고가 아파트의 대명사인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는 2조 천120억 9천만 원으로 2위로 밀렸다" 는 내용이었다. 언론은 이즈음 파크리오가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를 제치고 시가총액 1위로 등극했다거나, 노원구 아파트 시가총액이 서초구에 이어 4위로 등극했다고 하면서, 단지별로, 구별로 아파트 시가총액을 토대로 경쟁시키듯이 기사를 썼다. 전국석차로 어떤 학생이 1등을 했고, 누가 2등을 했다고 중계하면서 보도하는 식이다.


3. 그러나 아파트 가격이 조금이라도 떨어졌다 싶으면 시가총액은 “증발”했다.
“서울 재건축 석 달새 7조 원 증발” (2008년 MBC)
“1.11 대책 이후 재건축 시가총액 1조 원 증발”(2007년 연합뉴스)
“강남권 아파트값 약세...시가총액 2조 8천억 원 증발”(2008년 MBN)


최근 들어서도 이런 경향은 계속된다.

“강남 재건축 와르르...1년만에 3조 증발”( 2018년 조선비즈)
“서울 재건축 아파트 시가총액 3조 5천억 원 급감...9.13 대책 영향”(2019년 KBS)
“강남 4구 재건축 아파트 시총 한 달 반 개 1조 원 날아가”(2018년 경향신문)


조선일보와 같은 상업지들은 물론이고 지상파 방송3사, 심지어는 공영방송인 KBS도 서울 재건축 아파트의 “시가총액”이 급감했다는 식의 기사를 쓰고 있다. 아파트 시가총액이 급감하고, 증발하고, 날아간다. 모두 부정적인 표현이다. 시가총액이 급감하고 증발하고 날아가버리니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아까운 돈이 날아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다. 이 기사들에서 부동산 버블이 빠지고 있으니 다행이란 메시지는 읽혀지지 않는다. 기사는 철저히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소유한 사람의 관점, 현실 속 SKY캐슬에 사는 이들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시가총액이란 원래 주식 시장에 상장된 회사의 시장 평가 가치를 의미한다. A기업이 상장한 주식이 백만 주고 오늘 그 주당 가격이 10원이라면 A기업의 시가총액은 천만 원이다. 기업들의 시가총액이 증가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만큼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받는다는 것이니, 그렇게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받으면 설사 증자를 하더라도 높은 가격에 할 수 있고, 금융조달비용도 싸지고 기업은 투자여력이 높아지고, 더 많은 고용창출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파트의 시가총액이 올라가기만 하면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에 치명상을 안길 수 있다. 시중에 풀린 부동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려 불로소득을 조장하면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사회적 갈등만 높아진다. 게다가 돈이 들어가야 할 곳, 진짜 투자를 필요로 하는 산업 부문으로 가지 않으니 기업은 자금 조달에 애로를 겪고 설비 투자에 소홀하게 된다. 땅 사서 건물이나 아파트 지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회에서 어떤 기업인이 힘들게 제조업을 하려 하고, 어떤 직장인이 노동 의욕에 넘쳐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려 하겠는가? 하느님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데 투자든, 투기든 돈 벌어서 한 몫 챙기는 게 사람들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이 급전직하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은 수십 년 넘도록 ‘아파트 시가총액’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제공하는 보도자료 한 줄에 의지해서...그게 누구의 관심사인가? 그게 기사로서의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런 기사들이 양산됨으로써 한국의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임대소득, 불로소득, 지대를 추구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창시자라는 아담 스미스마저도 가장 혐오하는 사회였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가치관에도 위배되는 불로소득만 조장할 수 있는 기사를 공영방송인 KBS까지 계속 써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거에 하던 그대로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생산하는 기사 자체의 생산 방식에 근본적 의문을 던져야 한다. 부동산 정보업체에서 보도자료를 제공한다고 그게 기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던 대로 계속 쳇바퀴만 굴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 언론은 SKY캐슬 속 학부모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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