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애국가는 애국적인가?” 안익태 친일·친나치 행적 제기

입력 2019.01.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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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는 언제부터 우리의 애국가였을까. '안익태의 애국가' 초연은 1935년 12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별 노래로 익숙한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선율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로 부르던 가운데, "안익태 씨가 수 삼 년간 심혈을 경주하여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친히 연주" 했다고 ≪신한민보≫ 1936년 1월 16일 자에 기록하고 있다.

안익태는 애국가 해석에 대한 ≪신한민보≫ 기고문을 통해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특히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였다.

애국가 혁신 운동에도 '관행상' 국가(國歌)가 되다

이후 임시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익태의 행적을 연구한 이해영 교수는 이를 두고 애국가의 복수성을 전제로 한 뒤 새 곡조를 불러도 좋다는 발표였다고 설명한다.

구한말 ≪독립신문≫에 발표된 '애국가 류'만 해도 32가지에 이르며, 이 가운데 제목이 '애국가' 인 것이 11편이었다는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전후 귀국해서도 여전히 '올드 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

1945년 해방 이후 ≪동아일보≫와 ≪중앙신문≫ 등은 애국가 현상 공모에 나섰고, '애국가 혁신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조선 음악 동맹을 무대로 활동하던 진보 진영 음악 평론가 박영근은 안익태의 애국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첫째 해방 이전의 것이라 해방의 감격과 열정을 담지 못하고, 둘째 음악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선율과 리듬이 '야소 찬미가'조 즉 기독교 찬송가 풍이며, 셋째 봉건적 종교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이다.」본문 145쪽

뉴욕한인회 이민사박물관은 1944년 미국에서 제작·발간된 안익태 씨의 영문 애국가 악보를 기증받았다고 2018년 4월 밝혔다. (뉴욕한인회 제공=연합뉴스)뉴욕한인회 이민사박물관은 1944년 미국에서 제작·발간된 안익태 씨의 영문 애국가 악보를 기증받았다고 2018년 4월 밝혔다. (뉴욕한인회 제공=연합뉴스)

'안익태 신화'…'기독교, 미군' 네트워크 이용한 애국가 등극

『안익태 케이스 -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에서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안익태가 해방 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자, 지휘자'라는 신화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한다. 특히 안익태 애국가가 주로 '기독교, 미군, 서북' 등을 거점으로 확산하였다고 분석한다. 이는 남한 주류 네트워크에 올라타 증식되었으며, 안익태 신화가 메아리처럼 증폭되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해방 후 새 애국가를 짓자는 사회적 합의는 있었으나, 남한 내 좌우 대립이 이미 전쟁을 예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적인 애국가를 말할 만한 세력은 월북하거나 정치적으로 거세된 형국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에 비해 안익태는 '기독교, 미군, 서북'이라는 네트워크에 편승해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쌓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승만의 80회 '탄신 경축 음악회'에서 지휘하기 위해 55년 3월 귀국했다.)


친일·친나치 예술가 '에키타이 안'은 누구인가

지금의 애국가에 부여된 '국가(國歌)'로서의 지위에 대한 의문제기는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안익태 신화'는 정당한 것인가. 저자인 이해영 교수는 치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일제 강점기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하며 그가 진정 '국가'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다.

이 교수는 안익태가 1938년 더블린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선보인 뒤,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베를린 참사관의 사저에서 생활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과 연합세력을 구축한 '추축국'을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 제국을 선전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며 편익을 제공 받았다는 '친일·친나치 행적'을 제기한다.

에키타이 안은 '올림픽 찬가'를 통해 나치 독일의 위상을 높인 슈트라우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뒤 독일 음악원 회원이 됐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안은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 음악원 회원이 되었으며, 국적을 일본, 출생지는 동경으로 표시했다고 이 책은 전했다.

1965년 동아일보는 안익태 부고 기사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설명과 함께 실었다. “스승인 슈트라우스 씨와 스코어 검토를 하는 안익태 씨”1965년 동아일보는 안익태 부고 기사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설명과 함께 실었다. “스승인 슈트라우스 씨와 스코어 검토를 하는 안익태 씨”

"지금의 애국가는 '부역의 산물'이다."

또한,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국 환상곡'을 만들었으며, 우리가 듣고 부르는 애국가가 바로 이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썼고, 이후 '한국 환상곡'을 내면서 다시 활용했다는 설명이다.

이렇다면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부역의 산물'을 우리는 지금 국가로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 안익태의 활동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탓에 '애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지은 곡을 '애국가'로 써왔다고 지적하며, 이는 '애국가'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 일이라 강조한다.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그 가사에 있지 않다. 그것을 지은 사람에 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정의상 모든 애국가는 하나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요건을 요구한다. (…)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맺는말 중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이해영 지음, 출판사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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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의도 책방] “애국가는 애국적인가?” 안익태 친일·친나치 행적 제기
    • 입력 2019-01-23 14:57:00
    여의도책방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는 언제부터 우리의 애국가였을까. '안익태의 애국가' 초연은 1935년 12월 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별 노래로 익숙한 아일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 선율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로 부르던 가운데, "안익태 씨가 수 삼 년간 심혈을 경주하여 창작한 애국가의 새 곡조를 친히 연주" 했다고 ≪신한민보≫ 1936년 1월 16일 자에 기록하고 있다.

안익태는 애국가 해석에 대한 ≪신한민보≫ 기고문을 통해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특히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덧붙였다.

애국가 혁신 운동에도 '관행상' 국가(國歌)가 되다

이후 임시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익태의 행적을 연구한 이해영 교수는 이를 두고 애국가의 복수성을 전제로 한 뒤 새 곡조를 불러도 좋다는 발표였다고 설명한다.

구한말 ≪독립신문≫에 발표된 '애국가 류'만 해도 32가지에 이르며, 이 가운데 제목이 '애국가' 인 것이 11편이었다는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전후 귀국해서도 여전히 '올드 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

1945년 해방 이후 ≪동아일보≫와 ≪중앙신문≫ 등은 애국가 현상 공모에 나섰고, '애국가 혁신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조선 음악 동맹을 무대로 활동하던 진보 진영 음악 평론가 박영근은 안익태의 애국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첫째 해방 이전의 것이라 해방의 감격과 열정을 담지 못하고, 둘째 음악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선율과 리듬이 '야소 찬미가'조 즉 기독교 찬송가 풍이며, 셋째 봉건적 종교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이다.」본문 145쪽

뉴욕한인회 이민사박물관은 1944년 미국에서 제작·발간된 안익태 씨의 영문 애국가 악보를 기증받았다고 2018년 4월 밝혔다. (뉴욕한인회 제공=연합뉴스)
'안익태 신화'…'기독교, 미군' 네트워크 이용한 애국가 등극

『안익태 케이스 -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에서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안익태가 해방 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자, 지휘자'라는 신화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한다. 특히 안익태 애국가가 주로 '기독교, 미군, 서북' 등을 거점으로 확산하였다고 분석한다. 이는 남한 주류 네트워크에 올라타 증식되었으며, 안익태 신화가 메아리처럼 증폭되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해방 후 새 애국가를 짓자는 사회적 합의는 있었으나, 남한 내 좌우 대립이 이미 전쟁을 예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적인 애국가를 말할 만한 세력은 월북하거나 정치적으로 거세된 형국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에 비해 안익태는 '기독교, 미군, 서북'이라는 네트워크에 편승해 이승만 대통령의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쌓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익태는 이승만의 80회 '탄신 경축 음악회'에서 지휘하기 위해 55년 3월 귀국했다.)


친일·친나치 예술가 '에키타이 안'은 누구인가

지금의 애국가에 부여된 '국가(國歌)'로서의 지위에 대한 의문제기는 여기서부터 본격화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안익태 신화'는 정당한 것인가. 저자인 이해영 교수는 치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일제 강점기 안익태의 행적을 추적하며 그가 진정 '국가'를 작곡한 사람으로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묻는다.

이 교수는 안익태가 1938년 더블린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선보인 뒤,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베를린 참사관의 사저에서 생활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과 연합세력을 구축한 '추축국'을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 제국을 선전하는 나팔수 역할을 하며 편익을 제공 받았다는 '친일·친나치 행적'을 제기한다.

에키타이 안은 '올림픽 찬가'를 통해 나치 독일의 위상을 높인 슈트라우스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뒤 독일 음악원 회원이 됐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안은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 음악원 회원이 되었으며, 국적을 일본, 출생지는 동경으로 표시했다고 이 책은 전했다.

1965년 동아일보는 안익태 부고 기사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설명과 함께 실었다. “스승인 슈트라우스 씨와 스코어 검토를 하는 안익태 씨”
"지금의 애국가는 '부역의 산물'이다."

또한,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국 환상곡'을 만들었으며, 우리가 듣고 부르는 애국가가 바로 이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썼고, 이후 '한국 환상곡'을 내면서 다시 활용했다는 설명이다.

이렇다면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부역의 산물'을 우리는 지금 국가로 쓰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 안익태의 활동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탓에 '애국적이지 못한 사람'이 지은 곡을 '애국가'로 써왔다고 지적하며, 이는 '애국가'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 일이라 강조한다.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그 가사에 있지 않다. 그것을 지은 사람에 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정의상 모든 애국가는 하나의 양보할 수 없는 최소 요건을 요구한다. (…)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맺는말 중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이해영 지음, 출판사 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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