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33년 내 청춘을 바쳤는데”…무너진 ‘조선소 가족’의 꿈

입력 2019.02.09 (16:04) 수정 2019.02.1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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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출근길


조선소 직원 출신 대우조선해양 전 하청업체 대표들
젊은 시절부터 30년 이상 조선소 현장 생활
대금 깎는 '갑질'에 도산…공정위가 손들어줬지만 보상 '막막'
"하청 대금 받아 옛 직원들 체불임금 갚고 싶다"

('조선소 가족'이라는 표현은 경남대 양승훈 교수가 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대우조선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조선업의 성장 과정에서 직원과 가족들의 삶을 분석했다.)

30여 년 걸어갔던 조선소 새벽 출근길

조선소의 하루는 새벽 6시 반에 시작된다.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조선소 서문, 수백 명이 일제히 걸어가면 다리 상판이 출렁인다. 근무시간은 8시부터지만 7시 전에 출근해 아침을 먹고 체조하는 건 조선소의 오랜 관습이다.

행렬을 바라보는 강장규 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1983년 대우조선에 입사한 뒤 30여 년 이렇게 출근했었다.

전 하청업체 대표 강장규 씨전 하청업체 대표 강장규 씨

"동료들과 생사고락을 하면서 노사분규나 IMF를 견뎌내고 회사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모습들이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제 처지를 생각하니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밤낮없이 일했다. 여기 80년대 강장규 씨의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살짝 웃었다. "참 힘들었던 배입니다. 숱한 밤도 새고 눈물도 흘려가면서 작업했던 어려운 배였어요."


강장규 씨는 부장까지 승진한 뒤 2001년 사내 하청업체를 창업했다. '협력사 협의회 대표'까지 지냈다. 그와 가족들의 위기는 경기 하강과 함께 찾아왔다. 조선소는 하청업체에 매달 작업량만큼 돈을 지급한다. 이 돈은 하청업체의 임금과 세금보다 많아야 하지만 본사의 수익 악화를 막기 위해 조금씩 감액됐다. 특히 수정추가 작업에 대한 대금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다. 적자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었고 2015년 도산했다.

"대금 깎는 '갑질' 누적으로 파산"…'제선충 제거작업'일도 못 구해

순식간에 집은 경매되고 저축도 압류됐다. 4억 원이 미지급 임금으로 남았다. 결국 집행유예를 받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당장 가족의 생계가 문제였지만 신용불량 상태에서는 일당을 받는 일도 찾기 어려웠다. 시에서 모집한 '제선충 제거작업'같은 공공근로도 법적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냐"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하느님을 제가 안 믿었으면 '거기'를 택했을 겁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죄가 되거든요." 대표로 일했던 시절 그는 성당 신도회장을 지냈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겨우 거처를 구했다.


공정위 "대우조선이 갑질했다"…하지만 소송하게 되면 비용이 '부담'

지난해 12월, 공정위는 강 씨의 업체 등 27곳의 하청업체들이 '수정추가 공사' 대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고 판정했다. 대우조선에 과징금 108억 원이 부과됐다. 그러나 대표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민사 재판이 필요하다. 거액의 변호사비를 구하는 일이 걱정이다.

강 씨만의 일이 아니다. 4년 전부터 도산한 하청업체는 120여 곳으로 추정되는데 27곳은 아직 대우조선과 분쟁 상태다. 또 다른 하청업체 대표였던 조영식 씨도 신용불량 상태로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대리기사로 일한다.

조선소 앞에서 호출 대기 중인 전 하청업체 대표 조영식 씨조선소 앞에서 호출 대기 중인 전 하청업체 대표 조영식 씨

"다 왔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조 씨가 자동차 열쇠를 차 주인에게 넘겨주자 주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손님인 조선소 후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 씨는 대우조선에서 일했다.

33년 일한 조선소 앞 거리에서 대리운전 기사가 된 전직 하청업체 대표

손님은 대부분 조선소 직원들이다. 동료나 하청업체 대표 시절 직원들도 손님으로 만나기도 했다. "지금 어렵지만, 대우조선하고 해결되면 체불임금 다 줄 테니까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 달라" 그렇게 손님이 된 옛 직원들에게 부탁을 했다.


1981년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 입사한 조 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해외 파견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하청업체 대표가 돼 도산한 다음 모든 재산을 잃었다. 조 씨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매몰차게 내팽개쳐질 수 있는가?"

그 무렵 본사 담당자를 찾아갔다. "내가 여기서 대우조선에서 81년도부터 33년 동안 청춘을 바친 곳인데 회사에서 정말 이렇게 비정하게 매몰차게 내팽개쳐질 수 있는가?" 하지만 호소는 소용없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근데 회사에서는 해줄 것이 없다더군요. 산업은행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힘이 없다더군요. 억울하면 공정위 가서 제소하라고 했거든요. 현 정부 들어서 그나마 공정위에 일을 제대로 해주셔서 과징금도 부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조 씨의 고민도 민사소송을 할 경우 감당해야 할 비용이다. 협력업체 대표들은 대우조선과의 합의를 원하지만, 소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매각 소식까지 들려와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인구 10만의 어촌이었던 거제도는 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인구 25만의 세계적인 조선 도시가 됐다. 이곳에 찾아와 청춘을 바쳐 노동자로 성공했고 하청업체를 창업했던 '조선소 가족'의 꿈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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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33년 내 청춘을 바쳤는데”…무너진 ‘조선소 가족’의 꿈
    • 입력 2019-02-09 16:04:36
    • 수정2019-02-12 12:37:17
    취재후·사건후
▲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출근길


조선소 직원 출신 대우조선해양 전 하청업체 대표들
젊은 시절부터 30년 이상 조선소 현장 생활
대금 깎는 '갑질'에 도산…공정위가 손들어줬지만 보상 '막막'
"하청 대금 받아 옛 직원들 체불임금 갚고 싶다"

('조선소 가족'이라는 표현은 경남대 양승훈 교수가 쓴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대우조선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조선업의 성장 과정에서 직원과 가족들의 삶을 분석했다.)

30여 년 걸어갔던 조선소 새벽 출근길

조선소의 하루는 새벽 6시 반에 시작된다. 거제도 대우조선해양 조선소 서문, 수백 명이 일제히 걸어가면 다리 상판이 출렁인다. 근무시간은 8시부터지만 7시 전에 출근해 아침을 먹고 체조하는 건 조선소의 오랜 관습이다.

행렬을 바라보는 강장규 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1983년 대우조선에 입사한 뒤 30여 년 이렇게 출근했었다.

전 하청업체 대표 강장규 씨
"동료들과 생사고락을 하면서 노사분규나 IMF를 견뎌내고 회사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던 모습들이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제 처지를 생각하니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입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밤낮없이 일했다. 여기 80년대 강장규 씨의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살짝 웃었다. "참 힘들었던 배입니다. 숱한 밤도 새고 눈물도 흘려가면서 작업했던 어려운 배였어요."


강장규 씨는 부장까지 승진한 뒤 2001년 사내 하청업체를 창업했다. '협력사 협의회 대표'까지 지냈다. 그와 가족들의 위기는 경기 하강과 함께 찾아왔다. 조선소는 하청업체에 매달 작업량만큼 돈을 지급한다. 이 돈은 하청업체의 임금과 세금보다 많아야 하지만 본사의 수익 악화를 막기 위해 조금씩 감액됐다. 특히 수정추가 작업에 대한 대금은 제대로 지불되지 않았다. 적자는 금세 눈덩이처럼 불었고 2015년 도산했다.

"대금 깎는 '갑질' 누적으로 파산"…'제선충 제거작업'일도 못 구해

순식간에 집은 경매되고 저축도 압류됐다. 4억 원이 미지급 임금으로 남았다. 결국 집행유예를 받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당장 가족의 생계가 문제였지만 신용불량 상태에서는 일당을 받는 일도 찾기 어려웠다. 시에서 모집한 '제선충 제거작업'같은 공공근로도 법적 문제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냐" 극단적인 생각도 했다. "하느님을 제가 안 믿었으면 '거기'를 택했을 겁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죄가 되거든요." 대표로 일했던 시절 그는 성당 신도회장을 지냈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겨우 거처를 구했다.


공정위 "대우조선이 갑질했다"…하지만 소송하게 되면 비용이 '부담'

지난해 12월, 공정위는 강 씨의 업체 등 27곳의 하청업체들이 '수정추가 공사' 대금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고 판정했다. 대우조선에 과징금 108억 원이 부과됐다. 그러나 대표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려면 민사 재판이 필요하다. 거액의 변호사비를 구하는 일이 걱정이다.

강 씨만의 일이 아니다. 4년 전부터 도산한 하청업체는 120여 곳으로 추정되는데 27곳은 아직 대우조선과 분쟁 상태다. 또 다른 하청업체 대표였던 조영식 씨도 신용불량 상태로 다른 일은 하지 못하고 대리기사로 일한다.

조선소 앞에서 호출 대기 중인 전 하청업체 대표 조영식 씨
"다 왔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조 씨가 자동차 열쇠를 차 주인에게 넘겨주자 주인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손님인 조선소 후배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조 씨는 대우조선에서 일했다.

33년 일한 조선소 앞 거리에서 대리운전 기사가 된 전직 하청업체 대표

손님은 대부분 조선소 직원들이다. 동료나 하청업체 대표 시절 직원들도 손님으로 만나기도 했다. "지금 어렵지만, 대우조선하고 해결되면 체불임금 다 줄 테니까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 달라" 그렇게 손님이 된 옛 직원들에게 부탁을 했다.


1981년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 입사한 조 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해외 파견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하청업체 대표가 돼 도산한 다음 모든 재산을 잃었다. 조 씨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매몰차게 내팽개쳐질 수 있는가?"

그 무렵 본사 담당자를 찾아갔다. "내가 여기서 대우조선에서 81년도부터 33년 동안 청춘을 바친 곳인데 회사에서 정말 이렇게 비정하게 매몰차게 내팽개쳐질 수 있는가?" 하지만 호소는 소용없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근데 회사에서는 해줄 것이 없다더군요. 산업은행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힘이 없다더군요. 억울하면 공정위 가서 제소하라고 했거든요. 현 정부 들어서 그나마 공정위에 일을 제대로 해주셔서 과징금도 부과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조 씨의 고민도 민사소송을 할 경우 감당해야 할 비용이다. 협력업체 대표들은 대우조선과의 합의를 원하지만, 소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매각 소식까지 들려와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인구 10만의 어촌이었던 거제도는 조선소가 들어오면서 인구 25만의 세계적인 조선 도시가 됐다. 이곳에 찾아와 청춘을 바쳐 노동자로 성공했고 하청업체를 창업했던 '조선소 가족'의 꿈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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