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K] 영화관람 세계1위, 독서는 OECD 꼴찌…‘문화기형’ 숨은 이유

입력 2019.02.1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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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극한직업’ 제작진이 서울 CGV용산점에서 14일 개최한 ‘흥행 감사 행사’.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 돌파'는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2003년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래 총 23편의 '천만 영화'가 나왔다. 이 중 2012년 이후 17편이 쏟아졌다. 2012년은 우리나라 전국 스크린 수가 2,000개를 넘긴 해이기도 하다. 현재 994만 관객을 기록하고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포함하면 2012년 이후 18편, 1년에 3편꼴로 '천만 영화'가 나온 셈이다.

여가 문화 지배하는 복합 쇼핑몰

2018년 말 현재 국내 극장은 전국 483곳. 총 2,937개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94%가 멀티플렉스다. 매출액 기준으로 따지면 97%다. 이곳에서 해마다 연인원 2억 명 이상이 영화를 본다. 국민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가 꾸준히 4회를 넘는 나라는 인구 35만 명의 아이슬란드를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하다.

한 편의 영화가 흥행하는 데는 영화의 완성도나 오락성, 출연진, 방학 또는 명절의 영향, 경쟁작과의 대진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 한 편에 전 국민의 20~30% 인구가 몰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인도, 중국 등 '영화 관람 강국'들에서도 '아바타' '어벤져스' 등 글로벌 메가 히트작들을 해당 국가 인구의 10% 안팎(박스오피스 매출액 기준 추산)이 보고 간 정도다.

작품의 힘만으로 이 같은 기현상이 이어지기는 어렵다. 전국 곳곳에 포진한 멀티플렉스들의 덕이 무엇보다 크다는 게 영화계 안팎의 공통된 분석이다. 전국 교통 요지마다 멀티플렉스가 결합한 복합 쇼핑몰이 자리 잡고 한국 여가 문화를 지배한다. 한국인의 독서량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년 문화향수 실태조사'를 보자.


영화를 제외하면 숫자를 제시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문화적 기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문제는 한국만의 독특한 도시 공간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걷기 좋은 도시가 문화 다양성의 기초"

뉴욕, 베를린, 파리 등 대다수 문화 선진국의 도시들에선 주거지 어디서든 도보 10분 이내로 공원과 공공도서관, 커뮤니티 센터에 갈 수 있다. 드물게 쇼핑몰이 있지만 대부분 걸어간다. 지역 공동체 공간에 '걸어서' 간 시민들은 다양한 취미 교실, 취업 프로그램, 교양 강연과 토론회, 독립영화 상영회, 독서 모임 등에 손쉽게 참여한다.

전 국민의 관심이 한 편의 영화에 쏠리는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에 따라 원하는 문화를 평소 알고 지내는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쇼핑몰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공동체의 이웃이 아니라 돈을 낸 대가로 서비스를 해주는 직원들이다. 돈으로 계약된 관계에서 우리는 비슷한 태도로 직원들을 하대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음식을 주문한다.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뿐 아니라 우리의 태도도 비슷비슷해진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대학 교수는 좀 더 단호하게 한국의 도시 문화를 비판한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대학 교수는 저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에서 걷는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애초에) 쇼핑몰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도시의 거리를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가상의 거리에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쇼핑객들이 북적거리는 동안 실제 도시의 거리는 텅 비고 점점 피폐해진다. 그렇게 아파트와 쇼핑몰만 살아남게 되고 그 사이를 자동차로 움직이는 동안 거리와 상점들은 걷는 문화와 함께 사라진다."

걷기 좋은 도시에서 동네마다 개성 있는 문화를 공동체 안에서 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화 향유가 편향적·획일적인 사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쓸신잡'으로 유명한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의 걱정을 들어보자. 유 교수는 우리나라 도시 생활을 특징짓는 특성으로 '자연의 제거'를 꼽는다.


유현준 교수의 도시 생활 탐구 보고서들.

■ "자연을 격리하는 쇼핑몰, 획일화 부추겨"

"아파트 단지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그리고 지붕이 덮인 실내 쇼핑몰을 차나 지하철로 오가면서 자연과 격리된 상태에서 살아요. 변화하는 자연을 못 느끼게 되니 그 빈자리를 미디어가 대체합니다.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우리 아이들부터 거의 똑같이 생긴 학교에서 똑같은 교복 입고 생활하면서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두렵게 생각해요. 똑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쇼핑몰에서 문화생활 하는 사람들이 '대세'의 흐름에 편승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해지죠."

유 교수의 우려는 한국인이 겪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안타까운 건, 이렇게 획일화되면 각자의 가치관이 정량화되는 거예요. 똑같은 집에 사니까 마당에 무슨 꽃이 피었다든지 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집값으로만 주거의 가치가 평가되죠. 획일화된 문화를 누리니까 우리 삶의 다른 가치도 성적, 연봉, 키, 체중, 이렇게 '숫자'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립니다."

'천만 영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도시 구조, 나아가 악순환하는 문화 획일화의 문제가 있다. 다양성 영화의 의무 상영 비율을 강제적으로 늘려가는 프랑스, 도보 10분 이내 공원 배치 정책을 주마다 확산시키고 있는 미국, 아파트 세대별 평면 구조가 똑같을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는 싱가포르 등 본받을 사례는 많다. 도시 디자인과 주거 설계, 문화 다양성 보호 정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따로 떨어진 문제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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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5 18:39:57
    취재K
▲ 영화 ‘극한직업’ 제작진이 서울 CGV용산점에서 14일 개최한 ‘흥행 감사 행사’.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 돌파'는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2003년 '실미도'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이래 총 23편의 '천만 영화'가 나왔다. 이 중 2012년 이후 17편이 쏟아졌다. 2012년은 우리나라 전국 스크린 수가 2,000개를 넘긴 해이기도 하다. 현재 994만 관객을 기록하고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포함하면 2012년 이후 18편, 1년에 3편꼴로 '천만 영화'가 나온 셈이다.

여가 문화 지배하는 복합 쇼핑몰

2018년 말 현재 국내 극장은 전국 483곳. 총 2,937개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94%가 멀티플렉스다. 매출액 기준으로 따지면 97%다. 이곳에서 해마다 연인원 2억 명 이상이 영화를 본다. 국민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가 꾸준히 4회를 넘는 나라는 인구 35만 명의 아이슬란드를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하다.

한 편의 영화가 흥행하는 데는 영화의 완성도나 오락성, 출연진, 방학 또는 명절의 영향, 경쟁작과의 대진표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 한 편에 전 국민의 20~30% 인구가 몰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인도, 중국 등 '영화 관람 강국'들에서도 '아바타' '어벤져스' 등 글로벌 메가 히트작들을 해당 국가 인구의 10% 안팎(박스오피스 매출액 기준 추산)이 보고 간 정도다.

작품의 힘만으로 이 같은 기현상이 이어지기는 어렵다. 전국 곳곳에 포진한 멀티플렉스들의 덕이 무엇보다 크다는 게 영화계 안팎의 공통된 분석이다. 전국 교통 요지마다 멀티플렉스가 결합한 복합 쇼핑몰이 자리 잡고 한국 여가 문화를 지배한다. 한국인의 독서량이 OECD 회원국 가운데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8년 문화향수 실태조사'를 보자.


영화를 제외하면 숫자를 제시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문화적 기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문제는 한국만의 독특한 도시 공간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걷기 좋은 도시가 문화 다양성의 기초"

뉴욕, 베를린, 파리 등 대다수 문화 선진국의 도시들에선 주거지 어디서든 도보 10분 이내로 공원과 공공도서관, 커뮤니티 센터에 갈 수 있다. 드물게 쇼핑몰이 있지만 대부분 걸어간다. 지역 공동체 공간에 '걸어서' 간 시민들은 다양한 취미 교실, 취업 프로그램, 교양 강연과 토론회, 독립영화 상영회, 독서 모임 등에 손쉽게 참여한다.

전 국민의 관심이 한 편의 영화에 쏠리는 게 아니라 각자의 개성에 따라 원하는 문화를 평소 알고 지내는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이다. 쇼핑몰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공동체의 이웃이 아니라 돈을 낸 대가로 서비스를 해주는 직원들이다. 돈으로 계약된 관계에서 우리는 비슷한 태도로 직원들을 하대하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음식을 주문한다. 우리가 구매하는 상품뿐 아니라 우리의 태도도 비슷비슷해진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대학 교수는 좀 더 단호하게 한국의 도시 문화를 비판한다.

이경훈 국민대 건축대학 교수는 저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에서 걷는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애초에) 쇼핑몰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도시의 거리를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가상의 거리에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쇼핑객들이 북적거리는 동안 실제 도시의 거리는 텅 비고 점점 피폐해진다. 그렇게 아파트와 쇼핑몰만 살아남게 되고 그 사이를 자동차로 움직이는 동안 거리와 상점들은 걷는 문화와 함께 사라진다."

걷기 좋은 도시에서 동네마다 개성 있는 문화를 공동체 안에서 추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문화 향유가 편향적·획일적인 사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쓸신잡'으로 유명한 유현준 홍익대 건축대학 교수의 걱정을 들어보자. 유 교수는 우리나라 도시 생활을 특징짓는 특성으로 '자연의 제거'를 꼽는다.


유현준 교수의 도시 생활 탐구 보고서들.

■ "자연을 격리하는 쇼핑몰, 획일화 부추겨"

"아파트 단지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그리고 지붕이 덮인 실내 쇼핑몰을 차나 지하철로 오가면서 자연과 격리된 상태에서 살아요. 변화하는 자연을 못 느끼게 되니 그 빈자리를 미디어가 대체합니다.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우리 아이들부터 거의 똑같이 생긴 학교에서 똑같은 교복 입고 생활하면서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두렵게 생각해요. 똑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쇼핑몰에서 문화생활 하는 사람들이 '대세'의 흐름에 편승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강해지죠."

유 교수의 우려는 한국인이 겪고 있는 좀 더 보편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안타까운 건, 이렇게 획일화되면 각자의 가치관이 정량화되는 거예요. 똑같은 집에 사니까 마당에 무슨 꽃이 피었다든지 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집값으로만 주거의 가치가 평가되죠. 획일화된 문화를 누리니까 우리 삶의 다른 가치도 성적, 연봉, 키, 체중, 이렇게 '숫자'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돼버립니다."

'천만 영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도시 구조, 나아가 악순환하는 문화 획일화의 문제가 있다. 다양성 영화의 의무 상영 비율을 강제적으로 늘려가는 프랑스, 도보 10분 이내 공원 배치 정책을 주마다 확산시키고 있는 미국, 아파트 세대별 평면 구조가 똑같을 경우 건축 허가를 내주지 않는 싱가포르 등 본받을 사례는 많다. 도시 디자인과 주거 설계, 문화 다양성 보호 정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따로 떨어진 문제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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