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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잠시 쉼에 뜨개질하는 광복군” 우리가 몰랐던 광복군의 모습들
입력 2019.02.17 (09:02) 수정 2019.02.21 (13:46)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잠시 쉼에 뜨개질하는 광복군” 우리가 몰랐던 광복군의 모습들
▲ 광복군 제3지대 대원 서명 태극기 194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군 … 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을 선포한다. 마침내 우리도 자주권을 가진 '국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총사령관에 이청천(지청천) 장군, 총참모장에는 이범석 장군이 임명됐다. 30명으로 시작한 광복군은 1945년 1천 명 규모의 군대로 발전한다. 한반도 진격 '독수리 작전'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레 찾아온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국을 스스로 되찾겠다던 광복군은 '해방'이라는 낭보에 오히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개탄했다. 대한민국 국군 '광복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광복군 제2지대 대원 1942.4.광복군 제2지대 대원 1942.4.

광복군 훈련은 자체교육과 중국군 위탁교육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자체교육에서는 군사훈련과 아울러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건국강령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이 강조됐다. 위탁교육은 중국군 간부훈련단에 특별훈련반을 부설해 시행됐다.

훈련하는 광복군 1942훈련하는 광복군 1942

훈련하는 광복군 1943훈련하는 광복군 1943

한시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연속. 매일 이어지는 고된 훈련. 그런 광복군도 충전이 필요했으리라. 뜨개질하는 광복군 여군의 모습과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만든 광복군 영문(Korea Independence Army) 이니셜(KIA Ⅱ)이 이채롭다.

훈련 중 잠시 뜨개질 하며 휴식하는 광복군 1943훈련 중 잠시 뜨개질 하며 휴식하는 광복군 1943

광복군 제2지대 대원(KIA Ⅱ) 1945광복군 제2지대 대원(KIA Ⅱ) 1945

휴식도 잠시, 훈련을 마친 광복군은 전선에 투입됐다. 광복군 초기에는 병력을 모으는 초모 활동과 선전 활동이 주로 이뤄졌다. 병력이 점차 늘어나고,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베테랑이 배출되면서 활동 범위는 점차 확대됐다. 광복군은 김구 주석이 <광복군 선언문>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힌 것처럼 인도·미얀마 전선에도 투입됐다.

초모공작을 떠나는 동지를 환송하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 1945초모공작을 떠나는 동지를 환송하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 1945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1943 /1줄 왼쪽:나동규 김성호 2줄 왼쪽:김상준 문응국 박영진 한지성 영국군 연락장교 베이컨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1943 /1줄 왼쪽:나동규 김성호 2줄 왼쪽:김상준 문응국 박영진 한지성 영국군 연락장교 베이컨

광복군, 한반도 진격을 준비하다.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비행대 편성 계획도 수립했다. 이 작전 진행을 위해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와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도 시행했다. 이 훈련에는 일본 학도병에서 탈출한 장준하 선생 등 광복군 제2지대와 3지대 대원들이 참가했다.

한반도 진격을 준비했던 광복군 제2지대한반도 진격을 준비했던 광복군 제2지대

미군은 OSS 써전트(Clyde, B,Sargent) 대위와 윔스(Clarence, N.Weems) 대위를 파견해 훈련을 도왔다. 1945년 8월 4일 마침내 1기생 50명의 훈련이 끝났다. 나머지 훈련생들의 교육 수료도 임박했다. 이제 한반도 출격 명령만 남았다. 광복군과 미군 OSS의 작전은 이랬다. 중국 산둥에서 미군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가 일본군 거점을 파괴하거나 점령한다. 이후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고 전면전을 진행한다.

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 작전 회의 1945.8.7 /엄항섭 김구 주석 이청천 이범석 William, J.Donovan 소장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 작전 회의 1945.8.7 /엄항섭 김구 주석 이청천 이범석 William, J.Donovan 소장

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군 OSS 대원 1945 /1줄 왼쪽:노태준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군 OSS 대원 1945 /1줄 왼쪽:노태준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

그러나 광복군의 한반도 진격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이 작전이 진행됐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작전이 무위로 끝나면서 임시정부의 발언권은 크게 약화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했다.

중국 산둥 성에 불시착한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 1945.8.19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는 전날인 18일 서울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본국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연료가 떨어져 중국 산둥 성 유현에 불시착했다.중국 산둥 성에 불시착한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 1945.8.19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는 전날인 18일 서울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본국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연료가 떨어져 중국 산둥 성 유현에 불시착했다.

김구 주석은 광복군이 30여 년에 걸친 항일 무장투쟁의 계승자이자, 민족 혁명을 수행하는 혁명군, 또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건국군의 임무를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무장해제된 광복군은 1946년 6월 쓸쓸히 해체됐다. 국군의 주력도 일제 강점기 일본에 부역했던 반민족주의자들이 차지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두 분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지금은 과연 풀렸을까?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과 김구 주석 1940.9.17.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에서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과 김구 주석 1940.9.17.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에서

참고> 이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 등 관련 기관에서 발굴 보관중인 광복군 사료를 연대기로 구성한 것으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청천 장군은 독립운동 당시 안전 등을 위해 가명 '이청천'을 사용했으나, 광복이후 본인의 실명이 '지청천'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 [특파원리포트] “잠시 쉼에 뜨개질하는 광복군” 우리가 몰랐던 광복군의 모습들
    • 입력 2019.02.17 (09:02)
    • 수정 2019.02.21 (13:46)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잠시 쉼에 뜨개질하는 광복군” 우리가 몰랐던 광복군의 모습들
▲ 광복군 제3지대 대원 서명 태극기 194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군 … 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을 선포한다. 마침내 우리도 자주권을 가진 '국군'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총사령관에 이청천(지청천) 장군, 총참모장에는 이범석 장군이 임명됐다. 30명으로 시작한 광복군은 1945년 1천 명 규모의 군대로 발전한다. 한반도 진격 '독수리 작전'을 눈앞에 두고 갑작스레 찾아온 일본의 무조건 항복. 조국을 스스로 되찾겠다던 광복군은 '해방'이라는 낭보에 오히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개탄했다. 대한민국 국군 '광복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광복군 제2지대 대원 1942.4.광복군 제2지대 대원 1942.4.

광복군 훈련은 자체교육과 중국군 위탁교육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졌다. 자체교육에서는 군사훈련과 아울러 독립운동사, 임시정부 건국강령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이 강조됐다. 위탁교육은 중국군 간부훈련단에 특별훈련반을 부설해 시행됐다.

훈련하는 광복군 1942훈련하는 광복군 1942

훈련하는 광복군 1943훈련하는 광복군 1943

한시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연속. 매일 이어지는 고된 훈련. 그런 광복군도 충전이 필요했으리라. 뜨개질하는 광복군 여군의 모습과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만든 광복군 영문(Korea Independence Army) 이니셜(KIA Ⅱ)이 이채롭다.

훈련 중 잠시 뜨개질 하며 휴식하는 광복군 1943훈련 중 잠시 뜨개질 하며 휴식하는 광복군 1943

광복군 제2지대 대원(KIA Ⅱ) 1945광복군 제2지대 대원(KIA Ⅱ) 1945

휴식도 잠시, 훈련을 마친 광복군은 전선에 투입됐다. 광복군 초기에는 병력을 모으는 초모 활동과 선전 활동이 주로 이뤄졌다. 병력이 점차 늘어나고,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베테랑이 배출되면서 활동 범위는 점차 확대됐다. 광복군은 김구 주석이 <광복군 선언문>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힌 것처럼 인도·미얀마 전선에도 투입됐다.

초모공작을 떠나는 동지를 환송하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 1945초모공작을 떠나는 동지를 환송하는 광복군 제1지대 대원 1945

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1943 /1줄 왼쪽:나동규 김성호 2줄 왼쪽:김상준 문응국 박영진 한지성 영국군 연락장교 베이컨인도·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광복군 1943 /1줄 왼쪽:나동규 김성호 2줄 왼쪽:김상준 문응국 박영진 한지성 영국군 연락장교 베이컨

광복군, 한반도 진격을 준비하다.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비행대 편성 계획도 수립했다. 이 작전 진행을 위해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돼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와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도 시행했다. 이 훈련에는 일본 학도병에서 탈출한 장준하 선생 등 광복군 제2지대와 3지대 대원들이 참가했다.

한반도 진격을 준비했던 광복군 제2지대한반도 진격을 준비했던 광복군 제2지대

미군은 OSS 써전트(Clyde, B,Sargent) 대위와 윔스(Clarence, N.Weems) 대위를 파견해 훈련을 도왔다. 1945년 8월 4일 마침내 1기생 50명의 훈련이 끝났다. 나머지 훈련생들의 교육 수료도 임박했다. 이제 한반도 출격 명령만 남았다. 광복군과 미군 OSS의 작전은 이랬다. 중국 산둥에서 미군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가 일본군 거점을 파괴하거나 점령한다. 이후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고 전면전을 진행한다.

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 작전 회의 1945.8.7 /엄항섭 김구 주석 이청천 이범석 William, J.Donovan 소장김구 주석과 도노반 OSS 소장 작전 회의 1945.8.7 /엄항섭 김구 주석 이청천 이범석 William, J.Donovan 소장

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군 OSS 대원 1945 /1줄 왼쪽:노태준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광복군 제2지대 간부와 미군 OSS 대원 1945 /1줄 왼쪽:노태준 Sargent 이범석 안춘생 노복선

그러나 광복군의 한반도 진격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이 작전이 진행됐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작전이 무위로 끝나면서 임시정부의 발언권은 크게 약화됐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했다.

중국 산둥 성에 불시착한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 1945.8.19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는 전날인 18일 서울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본국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연료가 떨어져 중국 산둥 성 유현에 불시착했다.중국 산둥 성에 불시착한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 1945.8.19 /광복군 탑승 미군 비행기는 전날인 18일 서울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본국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입국을 거부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연료가 떨어져 중국 산둥 성 유현에 불시착했다.

김구 주석은 광복군이 30여 년에 걸친 항일 무장투쟁의 계승자이자, 민족 혁명을 수행하는 혁명군, 또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건국군의 임무를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무장해제된 광복군은 1946년 6월 쓸쓸히 해체됐다. 국군의 주력도 일제 강점기 일본에 부역했던 반민족주의자들이 차지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두 분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지금은 과연 풀렸을까?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과 김구 주석 1940.9.17.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에서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지청천) 장군과 김구 주석 1940.9.17. /광복군총사령부 성립식에서

참고> 이 기사는 국사편찬위원회 등 관련 기관에서 발굴 보관중인 광복군 사료를 연대기로 구성한 것으로 더 자세한 설명과 사진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청천 장군은 독립운동 당시 안전 등을 위해 가명 '이청천'을 사용했으나, 광복이후 본인의 실명이 '지청천'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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