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 오도독] 기계적 중립은 ‘사기’다

입력 2019.02.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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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중립적인‘척’할 수 있는 수많은 잔기술들을 터득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들을 들어보자.

1. 헤리티지 재단이라는 곳이 있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다. 재단 홈페이지에 스스로 자신들의 “사명은 보수적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증진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지상파 방송사들이나 중앙일보 등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헤리티지 재단을 인용할 때면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라고 말한다. 조선일보는 이걸 자주 빠뜨린다. 지난 1월 2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나온 뒤 보도에서도 그랬다. 그냥 헤리티지 재단의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유는? 헤리티지 재단을 보수적인 싱크탱크라고 소개하면 조선일보가 객관적인‘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미국의 싱크탱크라고 소개해야 자신들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진보적인 싱크탱크의 분석을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다. 독자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미국의 싱크탱크가 북미관계를 분석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보수적인 곳을 보수적이라고 미리 알려놓지 않으면 오히려 이는 독자들을 기망하는 행위가 된다. 속이는 것이다. 인터뷰이의 핵심 정보를 누락함으로써 자신의 독자들이 오히려 객관적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꼴이다.

2. 이해 관계 당사자를 전문가로만 소개하는 것도 비슷한 기법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전문가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치 못해서 이들을 언론이 인터뷰이로 활용할 경우가 잦아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욱 더 이들이 어떤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알려주는 게 독자나 시청자들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자기들만 객관적으로 보이면 그뿐이다. 그래서 부동산 투자 자문을 하거나 시행업 또는 땅장사까지 겸하고 있는 부동산 업계의 이해 당사자들을 불러다가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게 한다. 투기꾼이 투기 규제정책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3. 인터뷰를 똑같은 양으로 잘라 붙여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장 우측에 있는 사람을 불러놓고 우파의 대표로, 아주 온건한 좌파 정치인을 불러놓고 좌파의 대표인 양 토론을 붙이거나, 인터뷰를 대립적으로 사용한다면, 우파의 중간 지대에 있는 나머지 많은 의견들, 아주 온건한 좌파보다는 더 좌측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생략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일단 외견상으로는 1대 1, 50대 50처럼 보이니 사뭇 공정해 보인다.

4. 총선때 정치인들의 발언을 똑같은 길이로 잘라서 방송에서 15초씩 붙인다고 하더라도 한쪽에 철저히 유리한 보도를 할 수도 있다. 양이 같다고 인터뷰 내용의 질이 똑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선때 그 지역구의 현안이 지하철을 놓는 것이라면, 편들고 싶어하는 정치인의 15초는 “우리 지역에 반드시 지하철역이 들어오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의 15초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싶습니다”라는 추상적이고 구호적 이야기로 채우면, 지역구 유권자들의 표심이 어디로 갈지는 자명하다. 기계적 균형을 통해 사기를 치는 건 너무나 쉽다. 실제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들이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학자들은 기계적 중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언론 윤리학 교과서에도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언론학계는 이런 50 대 50의 기계적 중립 보도를 통해 객관적인‘척’하는 언론의 행태를 ‘거짓 등가성’(False Equivalence)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거짓 등가성이라고 하니 기계적 중립의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가? 5 대 5로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행위 자체가 거짓이고 '사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한국에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횡행하는가? 현재의 기형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에 누가 “기계적 중립”보도를 강조했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홍보 특보였다가 KBS 사장을 했던 김인규씨, KBS 사장으로 있다가 새누리당에 입당해 공천을 받았던 길환영씨 등이 주장했던 보도의 원칙이 “기계적 중립”이었다.

KBS가 그렇게 기계적 중립을 지켰을 때의 방송 보도가 공정했는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보도와 박근혜 정부때의 세월호 참사보도만 떠올려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 앞에 예를 든 것처럼 독자나 시청자를 속이기 쉽다 →기자는 마치 자신이 최소한의 윤리적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허위 의식 속에 살 수도 있다 → 게다가 진실을 찾아내지도 않고, 사실을 검증하지도 하지 않으니 몸은 편하다 →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은 언론이 이렇게 행동하면 거짓말을 해도 검증을 하지 않으니 자꾸 거짓 선동 주장을 하게 된다 → 반면 기자들은 이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고, 저 정치인은 저렇게 말했다는 “팩트”만 전달했다고 강변할 수 있으니 사후 책임으로부터도 벗어난다 → 결국 유권자는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투표에 나서게 되어 민주주의는 약화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어떤 정치인도, 언론사도 지지 않으니 사회는 결국 기계적 중립이 불러오는 악순환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996년 미국 기자협회 SPJ(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가 왜 객관이라는 윤리적 규정을 삭제하고 진실 추구를 언론의 제 1 사명으로 놓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상상을 해보자. 지금은 감옥에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가 2007년에 제대로 검증이 됐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태민, 최순실의 관계가 2012년 대선 당시 정확히 제대로 보도가 됐다면 과연 그때의 대통령 선거 결과들은 그래도 똑같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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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4 09:01:23
    한국언론 오도독
언론은 중립적인‘척’할 수 있는 수많은 잔기술들을 터득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들을 들어보자.

1. 헤리티지 재단이라는 곳이 있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다. 재단 홈페이지에 스스로 자신들의 “사명은 보수적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증진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지상파 방송사들이나 중앙일보 등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헤리티지 재단을 인용할 때면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라고 말한다. 조선일보는 이걸 자주 빠뜨린다. 지난 1월 2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나온 뒤 보도에서도 그랬다. 그냥 헤리티지 재단의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유는? 헤리티지 재단을 보수적인 싱크탱크라고 소개하면 조선일보가 객관적인‘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미국의 싱크탱크라고 소개해야 자신들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면 진보적인 싱크탱크의 분석을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다. 독자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미국의 싱크탱크가 북미관계를 분석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보수적인 곳을 보수적이라고 미리 알려놓지 않으면 오히려 이는 독자들을 기망하는 행위가 된다. 속이는 것이다. 인터뷰이의 핵심 정보를 누락함으로써 자신의 독자들이 오히려 객관적으로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꼴이다.

2. 이해 관계 당사자를 전문가로만 소개하는 것도 비슷한 기법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전문가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치 못해서 이들을 언론이 인터뷰이로 활용할 경우가 잦아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더욱 더 이들이 어떤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알려주는 게 독자나 시청자들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자기들만 객관적으로 보이면 그뿐이다. 그래서 부동산 투자 자문을 하거나 시행업 또는 땅장사까지 겸하고 있는 부동산 업계의 이해 당사자들을 불러다가 정부의 정책을 평가하게 한다. 투기꾼이 투기 규제정책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3. 인터뷰를 똑같은 양으로 잘라 붙여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장 우측에 있는 사람을 불러놓고 우파의 대표로, 아주 온건한 좌파 정치인을 불러놓고 좌파의 대표인 양 토론을 붙이거나, 인터뷰를 대립적으로 사용한다면, 우파의 중간 지대에 있는 나머지 많은 의견들, 아주 온건한 좌파보다는 더 좌측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생략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일단 외견상으로는 1대 1, 50대 50처럼 보이니 사뭇 공정해 보인다.

4. 총선때 정치인들의 발언을 똑같은 길이로 잘라서 방송에서 15초씩 붙인다고 하더라도 한쪽에 철저히 유리한 보도를 할 수도 있다. 양이 같다고 인터뷰 내용의 질이 똑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선때 그 지역구의 현안이 지하철을 놓는 것이라면, 편들고 싶어하는 정치인의 15초는 “우리 지역에 반드시 지하철역이 들어오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의 15초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싶습니다”라는 추상적이고 구호적 이야기로 채우면, 지역구 유권자들의 표심이 어디로 갈지는 자명하다. 기계적 균형을 통해 사기를 치는 건 너무나 쉽다. 실제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들이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학자들은 기계적 중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언론 윤리학 교과서에도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언론학계는 이런 50 대 50의 기계적 중립 보도를 통해 객관적인‘척’하는 언론의 행태를 ‘거짓 등가성’(False Equivalence)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거짓 등가성이라고 하니 기계적 중립의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가? 5 대 5로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균형을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행위 자체가 거짓이고 '사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한국에는 “기계적 중립”이라는 말이 횡행하는가? 현재의 기형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근에 누가 “기계적 중립”보도를 강조했는지를 따져보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홍보 특보였다가 KBS 사장을 했던 김인규씨, KBS 사장으로 있다가 새누리당에 입당해 공천을 받았던 길환영씨 등이 주장했던 보도의 원칙이 “기계적 중립”이었다.

KBS가 그렇게 기계적 중립을 지켰을 때의 방송 보도가 공정했는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보도와 박근혜 정부때의 세월호 참사보도만 떠올려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 앞에 예를 든 것처럼 독자나 시청자를 속이기 쉽다 →기자는 마치 자신이 최소한의 윤리적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허위 의식 속에 살 수도 있다 → 게다가 진실을 찾아내지도 않고, 사실을 검증하지도 하지 않으니 몸은 편하다 →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은 언론이 이렇게 행동하면 거짓말을 해도 검증을 하지 않으니 자꾸 거짓 선동 주장을 하게 된다 → 반면 기자들은 이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고, 저 정치인은 저렇게 말했다는 “팩트”만 전달했다고 강변할 수 있으니 사후 책임으로부터도 벗어난다 → 결국 유권자는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투표에 나서게 되어 민주주의는 약화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이 잦아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어떤 정치인도, 언론사도 지지 않으니 사회는 결국 기계적 중립이 불러오는 악순환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996년 미국 기자협회 SPJ(Society of Professional Journalists)가 왜 객관이라는 윤리적 규정을 삭제하고 진실 추구를 언론의 제 1 사명으로 놓았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상상을 해보자. 지금은 감옥에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가 2007년에 제대로 검증이 됐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태민, 최순실의 관계가 2012년 대선 당시 정확히 제대로 보도가 됐다면 과연 그때의 대통령 선거 결과들은 그래도 똑같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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