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K] 백년 전 3월 1일 날씨 맑음…하늘도 도운 만세운동

입력 2019.02.2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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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알리는 당당한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 퍼졌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도 학생들이 주도한 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의 물결이 광화문과 대한문, 명동, 동대문 등지로 확산됐고, 3·1운동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3.1 독립선언서3.1 독립선언서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독립선언서에 등장하는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라는 문구처럼 3월 1일은 기상학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혹독한 일제의 지배에 떨치고 일어서 찬란한 봄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데요. 과연 100년 전 만세운동이 있었던 그 날의 날씨는 어땠을까요? 먼저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러일전쟁 ‘전초기지’ 인천, 국내 첫 기상 관측

응봉산 정상에 위치한 인천 기상대응봉산 정상에 위치한 인천 기상대

서해를 접하고 있는 인천 응봉산 정상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기상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04년 당시 러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일본은 인천에 기상관측소를 세우고 제물포 관측소로 명명했습니다. 해전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인천을 비롯한 목포와 부산, 원산, 신의주 이렇게 5곳에서 근대적 기상 관측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중요한 항구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해상 기상정보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일본강점기 인천 관측소의 모습 / 출처:인천 개항 25년사과거 일본강점기 인천 관측소의 모습 / 출처:인천 개항 25년사

이후 1907년에는 서울과 평양, 대구에도 측후소가 세워지는 등 기상 관측망이 점차 확대됩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까지 본청 역할은 인천에서 담당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화재 피해를 입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국립중앙관상대는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인천기상대에는 일본강점기 관측자료를 보관하던 창고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도 기온과 기압, 습도, 풍향, 풍속, 운량, 기상현상 등을 지금과 다름없이 관측했고 4시간 간격으로 하루 6번 기록을 남겼습니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과 부산, 목포, 강릉, 대구, 전주 등 남한에만 7곳의 관측소가 존재했습니다. 관측 자료는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에서 원본으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KBS가 처음으로 공개해드립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100년 전 3.1절의 날씨 관측 기록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100년 전 3.1절의 날씨 관측 기록

1919년 3월 1일 날씨…‘맑음’, 아침엔 서리도

100년 전 3월 1일 아침은 다소 추웠습니다.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3.3도로 예년(영하 1도)보다 낮았습니다. 전국적으로 영하 3도에서 영상 5도 분포로 구름 없이 맑은 날씨였는데, 야간 복사냉각으로 안개도 끼고 서리도 내렸습니다.


당시의 일기도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낮부터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서풍이 불어 들었습니다. 쌀쌀했던 아침과 달리 정오를 넘어서며 기온이 크게 올랐는데요.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오후 2시 서울은 12.6도로 기록돼있었습니다. 예년 기온이 7.3도 수준이니 5.3도나 높은 겁니다. 부산의 낮 기온은 무려 19.3도까지 올랐고, 강릉 18.8도, 전주 15.1도 등으로 4월 중·하순에 해당하는 따뜻한 날씨였습니다.

계절 한 달 이상 앞서, 맑고 화창했던 그 날

1919년 3월 1일 서울 대한문 앞에 모여 있는 만세운동 인파1919년 3월 1일 서울 대한문 앞에 모여 있는 만세운동 인파

지금까지 남아있는 3.1절 당시의 흑백 사진 속에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 실제 기상 관측 기록을 분석해본 결과, 1919년 3월 1일에는 계절을 한 달 이상 앞서간 맑고 화창한 봄 날씨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기온이나 기압 표기법이 지금과 조금 달라서 날씨 기록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는 기상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안개나 서리, 연무 같은 기상현상을 표기하는 기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KBS가 취재한 좀 더 생생한 이야기는 3월 1일 [특집 뉴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대문 사진 출처: 대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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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K] 백년 전 3월 1일 날씨 맑음…하늘도 도운 만세운동
    • 입력 2019-02-28 07:02:37
    취재K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알리는 당당한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 퍼졌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도 학생들이 주도한 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이 이어졌습니다.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의 물결이 광화문과 대한문, 명동, 동대문 등지로 확산됐고, 3·1운동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3.1 독립선언서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독립선언서에 등장하는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라는 문구처럼 3월 1일은 기상학적으로 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혹독한 일제의 지배에 떨치고 일어서 찬란한 봄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함성이 들리는 듯한데요. 과연 100년 전 만세운동이 있었던 그 날의 날씨는 어땠을까요? 먼저 인천으로 향했습니다.

러일전쟁 ‘전초기지’ 인천, 국내 첫 기상 관측

응봉산 정상에 위치한 인천 기상대
서해를 접하고 있는 인천 응봉산 정상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기상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04년 당시 러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일본은 인천에 기상관측소를 세우고 제물포 관측소로 명명했습니다. 해전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인천을 비롯한 목포와 부산, 원산, 신의주 이렇게 5곳에서 근대적 기상 관측을 시작했습니다. 모두 중요한 항구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해상 기상정보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일본강점기 인천 관측소의 모습 / 출처:인천 개항 25년사
이후 1907년에는 서울과 평양, 대구에도 측후소가 세워지는 등 기상 관측망이 점차 확대됩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까지 본청 역할은 인천에서 담당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화재 피해를 입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국립중앙관상대는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인천기상대에는 일본강점기 관측자료를 보관하던 창고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에도 기온과 기압, 습도, 풍향, 풍속, 운량, 기상현상 등을 지금과 다름없이 관측했고 4시간 간격으로 하루 6번 기록을 남겼습니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과 부산, 목포, 강릉, 대구, 전주 등 남한에만 7곳의 관측소가 존재했습니다. 관측 자료는 대전에 있는 국가기록원에서 원본으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KBS가 처음으로 공개해드립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100년 전 3.1절의 날씨 관측 기록
1919년 3월 1일 날씨…‘맑음’, 아침엔 서리도

100년 전 3월 1일 아침은 다소 추웠습니다.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3.3도로 예년(영하 1도)보다 낮았습니다. 전국적으로 영하 3도에서 영상 5도 분포로 구름 없이 맑은 날씨였는데, 야간 복사냉각으로 안개도 끼고 서리도 내렸습니다.


당시의 일기도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낮부터는 이동성 고기압의 영향으로 남서풍이 불어 들었습니다. 쌀쌀했던 아침과 달리 정오를 넘어서며 기온이 크게 올랐는데요.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오후 2시 서울은 12.6도로 기록돼있었습니다. 예년 기온이 7.3도 수준이니 5.3도나 높은 겁니다. 부산의 낮 기온은 무려 19.3도까지 올랐고, 강릉 18.8도, 전주 15.1도 등으로 4월 중·하순에 해당하는 따뜻한 날씨였습니다.

계절 한 달 이상 앞서, 맑고 화창했던 그 날

1919년 3월 1일 서울 대한문 앞에 모여 있는 만세운동 인파
지금까지 남아있는 3.1절 당시의 흑백 사진 속에는 계절을 느낄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 실제 기상 관측 기록을 분석해본 결과, 1919년 3월 1일에는 계절을 한 달 이상 앞서간 맑고 화창한 봄 날씨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기온이나 기압 표기법이 지금과 조금 달라서 날씨 기록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는 기상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안개나 서리, 연무 같은 기상현상을 표기하는 기호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KBS가 취재한 좀 더 생생한 이야기는 3월 1일 [특집 뉴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대문 사진 출처: 대구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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