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일부는 배신자”…北이 바라보는 3·1절은?

입력 2019.03.01 (19:09) 수정 2019.03.01 (19:1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앵커]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북한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3.1운동에 대한 남북 간의 인식 차, 길어진 분단의 시간 만큼이나 간극이 큰데요.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필요할까요?

허효진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혁명 역사' 자료를 전시한 북한의 혁명박물관.

3.1운동을 김정은 위원장 증조부인 김형직이 주도했고, 김일성 주석도 7살 나이로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북한 조선중앙TV /2017년 : "3.1인민봉기는 자신을 인민 대오 속에 세워 주고 자신에게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중 일부를 배신자라 부르는 등 3.1운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강순정/北 혁명박물관 강사 : "독립선언서과 관련한 축배를 들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서 투항 변절했습니다. 비록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과 그에 겁을 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배신 행위로 3.1인민봉기는 실패했지만..."]

북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닙니다.

1946년 광복 뒤 처음 맞는 3.1절에는 평양에서 30만 명이 모인 기념대회가 열려 김일성 주석이 연설도 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인 1951년에도 애국정신을 기리는 논평이 실렸고, 해마다 3.1운동을 회고하고 만세운동 장소를 답사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체제 공고화를 위해 김일성 주석의 항일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상징되는 3.1운동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축소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김광운/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1950년대 말, 1960년대 후반까지는 3.1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민족운동이었다고 하면 그 이후에는 김일성 주석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의 각 사건들을 부각하면서 (3.1운동이) 상대적으로 강조가 안된거죠."]

우리 정부가 제안한 3.1운동 100주년 공동 기념행사에 북측이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은 것도 이런 이유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커진 3.1운동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

전문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간 학술 교류와 공동연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허효진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민족대표 일부는 배신자”…北이 바라보는 3·1절은?
    • 입력 2019-03-01 19:11:34
    • 수정2019-03-01 19:16:18
    뉴스 7
[앵커]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북한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3.1운동에 대한 남북 간의 인식 차, 길어진 분단의 시간 만큼이나 간극이 큰데요.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필요할까요?

허효진 기자가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혁명 역사' 자료를 전시한 북한의 혁명박물관.

3.1운동을 김정은 위원장 증조부인 김형직이 주도했고, 김일성 주석도 7살 나이로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주장합니다.

[북한 조선중앙TV /2017년 : "3.1인민봉기는 자신을 인민 대오 속에 세워 주고 자신에게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민족대표 33인중 일부를 배신자라 부르는 등 3.1운동을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강순정/北 혁명박물관 강사 : "독립선언서과 관련한 축배를 들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서 투항 변절했습니다. 비록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과 그에 겁을 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배신 행위로 3.1인민봉기는 실패했지만..."]

북한이 처음부터 3.1운동을 부정적으로 본 건 아닙니다.

1946년 광복 뒤 처음 맞는 3.1절에는 평양에서 30만 명이 모인 기념대회가 열려 김일성 주석이 연설도 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인 1951년에도 애국정신을 기리는 논평이 실렸고, 해마다 3.1운동을 회고하고 만세운동 장소를 답사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체제 공고화를 위해 김일성 주석의 항일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상징되는 3.1운동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축소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김광운/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1950년대 말, 1960년대 후반까지는 3.1운동이 가장 대표적인 민족운동이었다고 하면 그 이후에는 김일성 주석 중심의 항일무장투쟁의 각 사건들을 부각하면서 (3.1운동이) 상대적으로 강조가 안된거죠."]

우리 정부가 제안한 3.1운동 100주년 공동 기념행사에 북측이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은 것도 이런 이유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됩니다.

분단의 세월만큼이나 커진 3.1운동에 대한 남북의 인식 차.

전문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간 학술 교류와 공동연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허효진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