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납작 몸 낮춘 중국’…“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

입력 2019.03.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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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중국 정부 업무보고서

숨죽인 인민대회당… 한숨 소리가 들렸다.

중국 국무원 리커창 총리가 우리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발표한 정부 업무 보고서다. 35쪽, 2만 자 분량. 리커창 총리는 전례대로 이 보고서를 전인대 개막일인 5일 인민대회당에서 낭독했다. 1시간 40분이 걸렸다. 자리를 채운 2,900여 명의 전인대 위원들은 지난해 경제성과가 소개될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런 풍경도 잠시, 이내 인민대회당은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석단에 자리한 시진핑 주석도 내내 특유의 무표정이었다. 폐쇄적인 정치 문화 때문이려니 했다. 그런데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때로는 탄식까지...중국 정부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담긴 걸까?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 2019.3.5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 2019.3.5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이다”

내외신 기자들이 전인대에 주목하는 이유는 G2 국가 중국의 주요 경제정책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특히 미·중 무역전쟁이 진행되는 중에 열린 전인대여서 대외 정세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엿 볼 수 있어 관심이 더 높았다. 그럼 리커창 총리가 낭독한 중국 정부 업무보고서를 보자.

"우리는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외부환경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미 무역마찰은 일부 기업의 생산과 경영, 시장기대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무역마찰로 중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솔직한 고백. 그리고는 전국에서 올라온 전인대 위원들에게 위기에 걸맞은 자세와 태도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우리나라는 예상할 수 있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위험과 도전이 더욱 많아지고 커질 것이므로 격전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합니다."

이것으로는 최고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본 것일까? 세계 최고 무역 대국,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 G2 국가의 위신을 스스로 내팽개쳐 버린다.

"우리나라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장기간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돌며 위안화의 위력을 과시하던 패기가 사라졌다. 조만간 미국을 따라잡을 거라는 호기도 없다. 국민 소득 상 중국이 개발도상국 위치에 있는 건 맞지만, 세계 어느 나라가 중국의 정치력과 경제력을 개발도상국 수준의 나라로 바라볼까? 그런데 중국은 자신을 스스로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미국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른바 '기술 굴기(崛起, 우뚝 일어섬)'를 상징하는 '중국제조 2025'도 보고서에서 사라졌다. '중국제조 2025'는 2025년까지 의료·바이오, 로봇, 통신장비, 항공 우주, 반도체 등 10개 첨단제조업을 육성하는 시진핑 정부의 핵심 정책이다. 2015년 전인대 정부 업무 보고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매년 업무 보고에 등장했다. 2016년엔 "중국제조 2025가 실시 단계에 들어섰다.". 2017년에 "깊이 있게 실시한다". 지난해에는 "중국제조 2025 시범구를 만들겠다"로 차츰 발전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올해 업무 보고에선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피한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얼마나 큰 내상(內傷)을 입었는지 짐작게 한다.


몸 낮춘 중국, 도광양회((韜光養晦)로 회귀하나?

세계 유수의 외교·안보 연구소와 학자, 그리고 각국의 정보 부분은 아마도 중국의 올해 업무 보고서 분석으로 분주할 것이다. 경제정책뿐 아니라 중국의 외교·안보 방향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마도 덩샤오핑의 '28자 방침'을 살펴볼 것이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하며 28자로 구성된 중국의 대외관계 지도방침을 밝힌다. 그중에서도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내내 중국정부의 외교·안보 지침으로 작동했다. 도광양회는 '도광(韜光)'과 '양회(養誨)'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감출 도(韜)'와 '빛 광(光)'은 '빛을 감춘다'는 뜻이다. 양회는 '기를 양(養)'에 '어두울 회(晦)'로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국력을 더 키울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자타가 공인하는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중국의 모습이 달라진다. 도광양회에서 덩샤오핑이 말한 마지막 외교방침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한다)로 옮겨간 것이다. 시진핑 정권이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과 '싸움에 능하고, 싸워서 이기는' 강군몽(强軍夢)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빛을 감추고 실력을 길러서 이제 국제무대의 신흥 강대국임을 선언한 시진핑. 그런데 아뿔싸 미국이 있었다. 'America First'를 외치는 트럼프와의 힘겨루기에서 처참하게 밀렸다. 올해 정부 업무 보고를 보면 중국은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린 듯하다. 중국은 도광양회로 회귀한 것일까?


숨켜 놓은 발톱…유소작위(有所作爲)를 꿈꾼다.

그러면 중국정부 업무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먼저 국방비다. 명목상 중국의 국방예산 증가율은 지난해 8.1%보다 줄어든 7.5%다. 장예쑤이 전인대 대변인은 "중국의 국방비는 다른 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2018년 국방비도 GDP의 1.3%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산규모를 보면 올해 국방비는 1조 1천900억 위안(199조 8천여억 원)으로 지난해 1조 1천100억 위안(186조 4천여억 원)보다 더 늘었다. 블룸버그 통신은 중국이 발표한 국방예산에 대해 시진핑 주석이 말한 '세계 일류 군대'건설 구상에는 충분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더구나 중국이 실제 투입하는 국방예산은 공식 발표치보다 많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중국은 공식 발표보다 상당히 많은 국방예산을 쓰고 있으며, 2017년 국방 예산 추정치가 GDP의 1.9%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기술 굴기' 중국제조 2025도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곳곳에 숨겨 놓았다. 리커창 총리는 "선진 제조업과 현대 서비스업의 융합 발전을 촉진해 제조 강국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제조업의 고도 발전을 추진하고, 공업 기초와 기술 혁신 능력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지난해보다 13.4%나 증액한 3천543억 1천만 위안(60조 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맞짱 승부에서 쓴맛을 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겉보기로는 다시 납작 몸을 낮춰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모습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머리에는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하는 중국이 담겨 있다. 몸은 낮추데. 발톱은 숨겨 놓은 모양새다. 시진핑 주석의 와신상담은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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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07 14:30:21
    특파원 리포트
▲ 2019년 중국 정부 업무보고서

숨죽인 인민대회당… 한숨 소리가 들렸다.

중국 국무원 리커창 총리가 우리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발표한 정부 업무 보고서다. 35쪽, 2만 자 분량. 리커창 총리는 전례대로 이 보고서를 전인대 개막일인 5일 인민대회당에서 낭독했다. 1시간 40분이 걸렸다. 자리를 채운 2,900여 명의 전인대 위원들은 지난해 경제성과가 소개될 때마다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런 풍경도 잠시, 이내 인민대회당은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석단에 자리한 시진핑 주석도 내내 특유의 무표정이었다. 폐쇄적인 정치 문화 때문이려니 했다. 그런데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때로는 탄식까지...중국 정부 보고서에 무슨 내용이 담긴 걸까?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 2019.3.5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이다”

내외신 기자들이 전인대에 주목하는 이유는 G2 국가 중국의 주요 경제정책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특히 미·중 무역전쟁이 진행되는 중에 열린 전인대여서 대외 정세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엿 볼 수 있어 관심이 더 높았다. 그럼 리커창 총리가 낭독한 중국 정부 업무보고서를 보자.

"우리는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외부환경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미 무역마찰은 일부 기업의 생산과 경영, 시장기대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무역마찰로 중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솔직한 고백. 그리고는 전국에서 올라온 전인대 위원들에게 위기에 걸맞은 자세와 태도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우리나라는 예상할 수 있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위험과 도전이 더욱 많아지고 커질 것이므로 격전을 치를 각오를 단단히 다져야 합니다."

이것으로는 최고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본 것일까? 세계 최고 무역 대국, 미국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 G2 국가의 위신을 스스로 내팽개쳐 버린다.

"우리나라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장기간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돌며 위안화의 위력을 과시하던 패기가 사라졌다. 조만간 미국을 따라잡을 거라는 호기도 없다. 국민 소득 상 중국이 개발도상국 위치에 있는 건 맞지만, 세계 어느 나라가 중국의 정치력과 경제력을 개발도상국 수준의 나라로 바라볼까? 그런데 중국은 자신을 스스로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미국을 누를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른바 '기술 굴기(崛起, 우뚝 일어섬)'를 상징하는 '중국제조 2025'도 보고서에서 사라졌다. '중국제조 2025'는 2025년까지 의료·바이오, 로봇, 통신장비, 항공 우주, 반도체 등 10개 첨단제조업을 육성하는 시진핑 정부의 핵심 정책이다. 2015년 전인대 정부 업무 보고에서 처음 언급한 이후 매년 업무 보고에 등장했다. 2016년엔 "중국제조 2025가 실시 단계에 들어섰다.". 2017년에 "깊이 있게 실시한다". 지난해에는 "중국제조 2025 시범구를 만들겠다"로 차츰 발전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올해 업무 보고에선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피한 것으로 분석했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얼마나 큰 내상(內傷)을 입었는지 짐작게 한다.


몸 낮춘 중국, 도광양회((韜光養晦)로 회귀하나?

세계 유수의 외교·안보 연구소와 학자, 그리고 각국의 정보 부분은 아마도 중국의 올해 업무 보고서 분석으로 분주할 것이다. 경제정책뿐 아니라 중국의 외교·안보 방향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아마도 덩샤오핑의 '28자 방침'을 살펴볼 것이다.

1989년 톈안먼 사태로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하며 28자로 구성된 중국의 대외관계 지도방침을 밝힌다. 그중에서도 도광양회(韜光養晦)는 내내 중국정부의 외교·안보 지침으로 작동했다. 도광양회는 '도광(韜光)'과 '양회(養誨)'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감출 도(韜)'와 '빛 광(光)'은 '빛을 감춘다'는 뜻이다. 양회는 '기를 양(養)'에 '어두울 회(晦)'로 '어둠 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한마디로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국력을 더 키울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자타가 공인하는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중국의 모습이 달라진다. 도광양회에서 덩샤오핑이 말한 마지막 외교방침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한다)로 옮겨간 것이다. 시진핑 정권이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과 '싸움에 능하고, 싸워서 이기는' 강군몽(强軍夢)을 대내외적으로 공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빛을 감추고 실력을 길러서 이제 국제무대의 신흥 강대국임을 선언한 시진핑. 그런데 아뿔싸 미국이 있었다. 'America First'를 외치는 트럼프와의 힘겨루기에서 처참하게 밀렸다. 올해 정부 업무 보고를 보면 중국은 자신의 처지를 알아차린 듯하다. 중국은 도광양회로 회귀한 것일까?


숨켜 놓은 발톱…유소작위(有所作爲)를 꿈꾼다.

그러면 중국정부 업무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자. 먼저 국방비다. 명목상 중국의 국방예산 증가율은 지난해 8.1%보다 줄어든 7.5%다. 장예쑤이 전인대 대변인은 "중국의 국방비는 다른 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며 2018년 국방비도 GDP의 1.3% 수준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산규모를 보면 올해 국방비는 1조 1천900억 위안(199조 8천여억 원)으로 지난해 1조 1천100억 위안(186조 4천여억 원)보다 더 늘었다. 블룸버그 통신은 중국이 발표한 국방예산에 대해 시진핑 주석이 말한 '세계 일류 군대'건설 구상에는 충분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더구나 중국이 실제 투입하는 국방예산은 공식 발표치보다 많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중국은 공식 발표보다 상당히 많은 국방예산을 쓰고 있으며, 2017년 국방 예산 추정치가 GDP의 1.9% 수준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기술 굴기' 중국제조 2025도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곳곳에 숨겨 놓았다. 리커창 총리는 "선진 제조업과 현대 서비스업의 융합 발전을 촉진해 제조 강국 건설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며 "제조업의 고도 발전을 추진하고, 공업 기초와 기술 혁신 능력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 과학기술 분야 예산은 지난해보다 13.4%나 증액한 3천543억 1천만 위안(60조 원)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맞짱 승부에서 쓴맛을 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겉보기로는 다시 납작 몸을 낮춰 도광양회(韜光養晦)의 모습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의 머리에는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하는 중국이 담겨 있다. 몸은 낮추데. 발톱은 숨겨 놓은 모양새다. 시진핑 주석의 와신상담은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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