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선고했는데 판결문 고쳐라?…‘사법남용’ 수석판사의 특별한 첨삭

입력 2019.03.0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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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판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이미지가 있죠. 높은 법대 위에 앉아, 피고인에게 법이 정한 죗값을 선고하는 준엄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준엄한 얼굴 뒤에, 재판 결과를 조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어떨까요? 검찰에 따르면,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공소장에 담긴 얘기는 이렇습니다.

선고 끝났는데…"판결문 고쳐 써라"
공소장에 적힌 사건은 2015년 8월 20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28부는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변호사 4명에게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사태 관련 집회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하다 경찰의 팔을 잡고 끌고 간 혐의 등으로 기소된 사건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를 지키고자 이 사건 집회를 연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 직무집행도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피고인들이 잘못을 하긴 했지만, 목적에 정당성이 있고 경찰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판결문은 선고 뒤인 오후 3시 50분, 법원 전산망에 등록됐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 7분, 임성근 당시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가 판결문과 보도자료를 이메일로 받아본 뒤 일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내용을 살펴본 임 수석부장, 판결문의 외부 배포 보류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담당 재판부에게 이런 지적을 한 것으로 공소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양한 논란이 예상된다. 양형의 이유 부분에서 논란이 있을 만한 표현들이 있는 것 같다. 톤을 다운하는 방향으로 검토를 해 봐라."

판결문 작성은 담당 재판부의 고유 권한이고 개별 판사는 독립적으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합니다. 임 수석부장이 담당 판사의 상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재판이 아닌 법관 사무에 대해서만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을 받은 재판장은 전산망에 판결문을 올린 지 34분 만인 오후 4시 24분, 판결문 등록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일부분을 고쳐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피고인들에게 일부 내용을 설명했고, 등록까지 했던 그 판결문을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의 자유를 지키고자 이 사건 집회를 개최한 것", "징역형을 선고하기 보다는, 이번에 한해 특별히 선처하기로 한다"라는 판결문 문장이 아예 삭제됐습니다.

"피해자(경찰 측)의 직무집행도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표현도 "피고인들의 행위는 … 동기 및 경위에 관해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지시에 따라 수정된 판결문이 오후 5시 54분에 전산망에 다시 등록됐습니다. 선고가 내려진 지 이미 3시간가량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공소장에 적시된 '판결문 고쳐 쓰기'의 전말입니다.


■ 판결 원본 선고 원칙 지키라더니…

검찰은 공소장에서 형사소송법을 들어, 이미 재판이 끝났다면 법원이 스스로 판결을 취소하거나 변경, 철회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20년 넘게 법관 생활을 한, 그런데도 '판결문 고쳐 쓰기'를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임성근 수석부장도 이를 몰랐을 리는 없을 겁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임 수석부장은 평소 법관들에게, 판결 원본 선고 원칙을 지키고 판결문 등록 오류를 방지하라고 당부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정작 본인은 원칙을 어겼던 걸까요?

곧 중앙지법 형사27부 심리로 임 판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됩니다. 그가 법정에서 무슨 말을 할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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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 선고했는데 판결문 고쳐라?…‘사법남용’ 수석판사의 특별한 첨삭
    • 입력 2019-03-07 18:49:25
    취재K
흔히 판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이미지가 있죠. 높은 법대 위에 앉아, 피고인에게 법이 정한 죗값을 선고하는 준엄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준엄한 얼굴 뒤에, 재판 결과를 조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어떨까요? 검찰에 따르면,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법농단 의혹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의 공소장에 담긴 얘기는 이렇습니다.

선고 끝났는데…"판결문 고쳐 써라"
공소장에 적힌 사건은 2015년 8월 20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날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28부는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변호사 4명에게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 사태 관련 집회에서 경찰과 실랑이를 하다 경찰의 팔을 잡고 끌고 간 혐의 등으로 기소된 사건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를 지키고자 이 사건 집회를 연 것으로 보인다", "경찰의 직무집행도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피고인들이 잘못을 하긴 했지만, 목적에 정당성이 있고 경찰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판결문은 선고 뒤인 오후 3시 50분, 법원 전산망에 등록됐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 7분, 임성근 당시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가 판결문과 보도자료를 이메일로 받아본 뒤 일이 묘하게 흘러갑니다. 내용을 살펴본 임 수석부장, 판결문의 외부 배포 보류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담당 재판부에게 이런 지적을 한 것으로 공소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양한 논란이 예상된다. 양형의 이유 부분에서 논란이 있을 만한 표현들이 있는 것 같다. 톤을 다운하는 방향으로 검토를 해 봐라."

판결문 작성은 담당 재판부의 고유 권한이고 개별 판사는 독립적으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합니다. 임 수석부장이 담당 판사의 상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재판이 아닌 법관 사무에 대해서만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지적을 받은 재판장은 전산망에 판결문을 올린 지 34분 만인 오후 4시 24분, 판결문 등록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일부분을 고쳐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피고인들에게 일부 내용을 설명했고, 등록까지 했던 그 판결문을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고인들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의 자유를 지키고자 이 사건 집회를 개최한 것", "징역형을 선고하기 보다는, 이번에 한해 특별히 선처하기로 한다"라는 판결문 문장이 아예 삭제됐습니다.

"피해자(경찰 측)의 직무집행도 적법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표현도 "피고인들의 행위는 … 동기 및 경위에 관해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지시에 따라 수정된 판결문이 오후 5시 54분에 전산망에 다시 등록됐습니다. 선고가 내려진 지 이미 3시간가량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공소장에 적시된 '판결문 고쳐 쓰기'의 전말입니다.


■ 판결 원본 선고 원칙 지키라더니…

검찰은 공소장에서 형사소송법을 들어, 이미 재판이 끝났다면 법원이 스스로 판결을 취소하거나 변경, 철회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20년 넘게 법관 생활을 한, 그런데도 '판결문 고쳐 쓰기'를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임성근 수석부장도 이를 몰랐을 리는 없을 겁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임 수석부장은 평소 법관들에게, 판결 원본 선고 원칙을 지키고 판결문 등록 오류를 방지하라고 당부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정작 본인은 원칙을 어겼던 걸까요?

곧 중앙지법 형사27부 심리로 임 판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됩니다. 그가 법정에서 무슨 말을 할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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