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남용’ 연루 판사들이 사랑한 영장전담 판사들…이유는?

입력 2019.03.0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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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모 법원의 수석부장판사실. 수석부장이 다른 판사 2명을 불러놓고 뭔가를 조용히 지시합니다. 그의 입에서는 "보고", "복사"라는 단어가 반복해 나옵니다. 판사 2명은 연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장면2. 모 법원의 판사실. 부속실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가운데, 한 판사가 복사기를 이용해 문서 수십 장을 복사하고 있습니다. 조작이 상당히 서툰 모습입니다.

장면3. 모 법원의 법원장실. 한 판사가 법원장에게 정신없이 혼이 나고 있습니다. "압수수색" "영장 발부" "보고 누락"이라는 말들이 그의 귓등을 마구 때립니다.

이른바 '사법남용' 사건에 대한 검찰 공소장의 일부분을 각색한 내용입니다. 위 장면에 나오는 판사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영장전담 판사'였다는 겁니다. 피의자를 구속해달라, 피의자의 주거지나 소지품에 대한 압수를 허용해달라며 검찰이 청구한 각종 영장을 심사해,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법관들입니다. 그만큼 수사기관에서 넘어온 민감한 기밀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겠지요. 한 판사는 "영장전담은 방에 갇혀 일만 한다고 보면 된다. 동료인 우리도 만나기 힘들다"면서 "가까운 지인들의 연락도 거절하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사법남용' 공소장에 적힌 영장전담 판사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 "영장 내주고 왜 보고 안해" 혼난 영장전담 판사, 결국엔…

2016년, 서울 서부지검은 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소속 사무원 10명의 인건비 횡령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합니다. 이윽고 검찰이 법원 사무원에 대한 계좌추적영장을 서부지법에 청구하자, 이태종 당시 서부지법원장은 이를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고합니다. 검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다른 법원으로까지 검찰 수사가 확대될 경우 상고법원 설립 등 대법원의 사법정책 추진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 전 원장은 곧 영장전담 판사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검찰이 보낸 영장청구서와 첨부 기록을 확인하면 검찰이 어떤 증거와 진술을 확보했는지, 향후 수사는 어떻게 진행될지 등의 수사 기밀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 전 원장은 일단 '군기'를 잡았습니다. 2016년 10월, 검찰은 서부지법 소속 집행관사무소를 압수수색했는데요. 이 전 원장은 당시 압수수색 영장을 내준 영장전담판사를 불러, 왜 영장 발부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냐고 질책한 걸로 전해집니다.

영장전담판사는 이후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기존보다 엄격히 심사하고, 영장을 기각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 원장과 행정처를 의식한 결과로 풀이됩니다.

그는 또 영장 접수와 심사 결과, 수사 기밀을 법원 기획법관 등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기획법관은 이를 이 전 원장에게, 이 전 원장은 임종헌 행정처 차장에게 각각 누설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행정처로 보낸 보고서만 5편이라고 검찰은 밝혔습니다.

■ "제가 영장을 봤는데요…" '복사 전담'된 영장전담 판사들

검찰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서울 서초동에서도 영장전담 판사 두 명이 수사기밀을 바쁘게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조의연·성창호 당시 서울 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 얘기입니다. 둘을 지휘한 건 상관인 신광렬 형사수석부장판사. 검찰은 지난 5일 세 사람을 한 번에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정운호 게이트'가 있습니다. 김수천 당시 부장판사가 뇌물 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정운호 게이트'가 법관 비리 문제로 번져나가던 시기.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신광렬 서울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특별 지시를 내립니다. 영장전담판사에게 들어오는 수사 정보를 빼내서 보고하라는 겁니다. '정운호 게이트'로 현직 법관들의 비리가 밝혀지면 사법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 상고법원 설립 등 대법원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이 힘을 잃게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임 차장은 '정운호 게이트'와 연관된 현직 부장판사 7명의 가족 등을 포함해 31명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해, 암호를 건 보안 문건 형태로 신 수석판사에게 전달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임 차장은 이어 "이 자료를 토대로 영장 청구 대상에 비위 혐의 법관들의 가족이 포함됐는지 잘 살피고, 통상적인 경우보다 엄격히 심사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영장전담판사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검찰은 조의연·성창호 영장전담판사가 이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지킨 걸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 김수천 부장판사 등 일부 법관과 가족에 대한 계좌추적·통신영장 등을 기각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영장을 들여다본 뒤에는, 영장에 적힌 수사 진행 상황을 상부에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수사 단서가 아직 없는 것 같다" "변호사 A가 아직까지는 현직 법관 상대 청탁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등 법관 비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진술 내용까지 보고에 포함됐습니다. 특히 이들을 통해 "김수천 부장판사 딸 명의 계좌로 천 8백만 원이 입금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수사 기록까지 유출되면서, 피의자인 김 부장판사가 뇌물공여자에게 허위 진술을 부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영장전담판사들의 또 다른 업무, 수사기록 복사였습니다. 주요 보고와 관련된 검찰 수사기록을 직접 복사해, 신광렬 수석판사에게 전달한 겁니다. 검찰은 '정운호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던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5달 동안 모두 10차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영장전담판사들은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평소 잘 쓰지 않는 복사기를 직접 조작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영장전담 판사가 '복사 전담'으로 전락한 순간입니다.

■ '법원 조직' 지키려고 '법관 양심' 버렸나?

공소 사실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은 검찰 수사에 맞서 조직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수사의 열쇠'를 쥔 영장전담 판사들을 가까이 두며 오염시키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법관이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영장심사 업무를 수행할 거라는 사회적 신뢰는 크게 무너졌습니다. 최근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기각 때마다 유독 큰 사회적 논란이 이는 이유입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법관 양심의 대량 실종 사태, 이른바 '사법 농단' 사태로 한국 사회가 입은 상처는 쉬이 치유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첫 재판은, 오는 25일 오전 10시에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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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법남용’ 연루 판사들이 사랑한 영장전담 판사들…이유는?
    • 입력 2019-03-08 07:01:42
    취재K
장면1. 모 법원의 수석부장판사실. 수석부장이 다른 판사 2명을 불러놓고 뭔가를 조용히 지시합니다. 그의 입에서는 "보고", "복사"라는 단어가 반복해 나옵니다. 판사 2명은 연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장면2. 모 법원의 판사실. 부속실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가운데, 한 판사가 복사기를 이용해 문서 수십 장을 복사하고 있습니다. 조작이 상당히 서툰 모습입니다.

장면3. 모 법원의 법원장실. 한 판사가 법원장에게 정신없이 혼이 나고 있습니다. "압수수색" "영장 발부" "보고 누락"이라는 말들이 그의 귓등을 마구 때립니다.

이른바 '사법남용' 사건에 대한 검찰 공소장의 일부분을 각색한 내용입니다. 위 장면에 나오는 판사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영장전담 판사'였다는 겁니다. 피의자를 구속해달라, 피의자의 주거지나 소지품에 대한 압수를 허용해달라며 검찰이 청구한 각종 영장을 심사해, 발부 여부를 결정하는 법관들입니다. 그만큼 수사기관에서 넘어온 민감한 기밀을 많이 접할 수밖에 없겠지요. 한 판사는 "영장전담은 방에 갇혀 일만 한다고 보면 된다. 동료인 우리도 만나기 힘들다"면서 "가까운 지인들의 연락도 거절하는 분위기"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사법남용' 공소장에 적힌 영장전담 판사들의 모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 "영장 내주고 왜 보고 안해" 혼난 영장전담 판사, 결국엔…

2016년, 서울 서부지검은 서부지법 집행관사무소 소속 사무원 10명의 인건비 횡령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합니다. 이윽고 검찰이 법원 사무원에 대한 계좌추적영장을 서부지법에 청구하자, 이태종 당시 서부지법원장은 이를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보고합니다. 검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다른 법원으로까지 검찰 수사가 확대될 경우 상고법원 설립 등 대법원의 사법정책 추진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이 전 원장은 곧 영장전담 판사들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검찰이 보낸 영장청구서와 첨부 기록을 확인하면 검찰이 어떤 증거와 진술을 확보했는지, 향후 수사는 어떻게 진행될지 등의 수사 기밀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이 전 원장은 일단 '군기'를 잡았습니다. 2016년 10월, 검찰은 서부지법 소속 집행관사무소를 압수수색했는데요. 이 전 원장은 당시 압수수색 영장을 내준 영장전담판사를 불러, 왜 영장 발부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냐고 질책한 걸로 전해집니다.

영장전담판사는 이후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기존보다 엄격히 심사하고, 영장을 기각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 원장과 행정처를 의식한 결과로 풀이됩니다.

그는 또 영장 접수와 심사 결과, 수사 기밀을 법원 기획법관 등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기획법관은 이를 이 전 원장에게, 이 전 원장은 임종헌 행정처 차장에게 각각 누설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행정처로 보낸 보고서만 5편이라고 검찰은 밝혔습니다.

■ "제가 영장을 봤는데요…" '복사 전담'된 영장전담 판사들

검찰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 서울 서초동에서도 영장전담 판사 두 명이 수사기밀을 바쁘게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조의연·성창호 당시 서울 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 얘기입니다. 둘을 지휘한 건 상관인 신광렬 형사수석부장판사. 검찰은 지난 5일 세 사람을 한 번에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정운호 게이트'가 있습니다. 김수천 당시 부장판사가 뇌물 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정운호 게이트'가 법관 비리 문제로 번져나가던 시기.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신광렬 서울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 특별 지시를 내립니다. 영장전담판사에게 들어오는 수사 정보를 빼내서 보고하라는 겁니다. '정운호 게이트'로 현직 법관들의 비리가 밝혀지면 사법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건 물론, 상고법원 설립 등 대법원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이 힘을 잃게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임 차장은 '정운호 게이트'와 연관된 현직 부장판사 7명의 가족 등을 포함해 31명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수집해, 암호를 건 보안 문건 형태로 신 수석판사에게 전달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임 차장은 이어 "이 자료를 토대로 영장 청구 대상에 비위 혐의 법관들의 가족이 포함됐는지 잘 살피고, 통상적인 경우보다 엄격히 심사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영장전담판사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검찰은 조의연·성창호 영장전담판사가 이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지킨 걸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 김수천 부장판사 등 일부 법관과 가족에 대한 계좌추적·통신영장 등을 기각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영장을 들여다본 뒤에는, 영장에 적힌 수사 진행 상황을 상부에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수사 단서가 아직 없는 것 같다" "변호사 A가 아직까지는 현직 법관 상대 청탁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등 법관 비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진술 내용까지 보고에 포함됐습니다. 특히 이들을 통해 "김수천 부장판사 딸 명의 계좌로 천 8백만 원이 입금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수사 기록까지 유출되면서, 피의자인 김 부장판사가 뇌물공여자에게 허위 진술을 부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영장전담판사들의 또 다른 업무, 수사기록 복사였습니다. 주요 보고와 관련된 검찰 수사기록을 직접 복사해, 신광렬 수석판사에게 전달한 겁니다. 검찰은 '정운호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던 2016년 5월부터 9월까지 5달 동안 모두 10차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영장전담판사들은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평소 잘 쓰지 않는 복사기를 직접 조작한 걸로 조사됐습니다. 영장전담 판사가 '복사 전담'으로 전락한 순간입니다.

■ '법원 조직' 지키려고 '법관 양심' 버렸나?

공소 사실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은 검찰 수사에 맞서 조직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수사의 열쇠'를 쥔 영장전담 판사들을 가까이 두며 오염시키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법관이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영장심사 업무를 수행할 거라는 사회적 신뢰는 크게 무너졌습니다. 최근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기각 때마다 유독 큰 사회적 논란이 이는 이유입니다.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법관 양심의 대량 실종 사태, 이른바 '사법 농단' 사태로 한국 사회가 입은 상처는 쉬이 치유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태의 책임자로 지목된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의 첫 재판은, 오는 25일 오전 10시에 서울 중앙지법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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