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연호는 왜 종묘에 있을까…‘昭和’ 추적기

입력 2019.03.11 (17:02) 수정 2019.03.11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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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 八年 三月 改築'의 육하원칙

종묘 담장에 새겨진 '昭和 八年 三月 改築(소화 8년 3월 개축)'. 따로 취재할 것도 없이 여덟 자 글귀에 대부분의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 육하원칙으로 따져 보면, '일제가 1933년 3월에 종묘에서 담장을 고쳐 쌓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빠진 것은 단 하나, '왜'였습니다.


일제는 왜 그때 종묘 담장을 수리했을까? 문구가 있는 돌은 가장 긴 변의 길이가 1m 정도 되는 큰 돌로 담장 가장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위치와 크기로 볼 때, 문구가 있는 돌만 교체하거나 수리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 위에 있는 작은 돌과 기와 부분까지 새로 쌓아야 했을 겁니다.


종묘 외벽 담장은 둘레가 2km가 훨씬 넘습니다. 취재진은 전체 구간에서 일본 연호가 새겨진 돌을 9개 찾았는데,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문을 바라보며 좌우를 나눴을 때 왼편에 8개, 오른편에 1개가 있었습니다. 전체 담장을 새로 쌓았다면 불규칙한 간격으로 기록을 남기진 않았을 테고 문구가 있는 구간만 부분적으로 수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제가 갈라버린 창덕궁과 종묘

일제가 종묘 담장에 손을 댄 이유로 추정해 볼 만 한 것은 현재 지하화를 추진하고 있는 율곡로입니다. 종묘는 조선 시대 창덕궁과 연결돼 있었는데 일제가 율곡로를 개통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나뉘게 됐습니다. 일제는 경술국치 2년 만인 1912년 종묘관통 도로를 계획해 이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합니다. 창덕궁에 머물던 역대 왕들이 수시로 참배하던 종묘를 궁궐에서 끊어낸다는 소식에 당시 고종과 순종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종묘관통 도로 개통소식을 전하는 1932년 4월 22일 자 동아일보 사진기사를 보면, 지금은 반쯤 철거된 창덕궁-종묘 육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1912년에 계획했던 도로를 20년 만에 개통했으니 일제가 반대 여론을 조금은 의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의 홍순민 교수는 "사직단을 크게 훼손하고 공원을 만든 일제가 조선인들의 반감을 우려해 조선 왕조의 궁궐과 능묘, 종묘는 비교적 훼손을 하지 않은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관통 도로를 뚫긴 했지만, 종묘 담장의 문구도 훼손이 아닌 수리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설명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통 도로를 내면서 종묘 담장을 일부 신축하고 기존 담장도 함께 수리한 것은 아닐까? 시간상으로도 도로가 개통되고 11개월 뒤에 담장을 수리했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일제는 우리 궁궐이나 문화재들을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수리하면서 꽤 많은 문서기록을 남겼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있는 검색시스템을 통해 '종묘, 대묘,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 기록을 검색해보고 당시 신문기사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제 검색은 실패였습니다. 담장을 아홉 군데나 허물고 새로 쌓았다면 기록을 남길 법하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기록이 원래 없었거나 보존이 되지 않았거나 제 검색이 부족했을 수 있는데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담장에 새겨진 60갑자는 누가 언제 남겨 놓았나?


방송에 담지는 못했지만, 종묘 담장에는 일왕의 연호 말고도 '임진년'의 '임진'과 같은 60갑자가 새겨진 돌이 많습니다. 숫자도 일왕 연호보다 훨씬 많은 40여 개에 이릅니다. 새겨진 위치가 일왕 연호와 같은 담장 아랫부분이어서 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데, 글자의 형식이나 서체가 확연히 다릅니다. 새겨진 간격도 규칙성이 없고 60가지 갑자가 모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왕 연호보다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앞서 자문했던 홍순민 교수는 "한양도성의 경우 천자문의 한자를 순서대로 일정 간격으로 새겨 놓아 방위나 위치 등을 표기한 사례가 있는데 종묘의 60갑자는 이와는 다르다"면서 "글자를 새길 때의 연도를 뜻할 가능성이 있는데 현재로써는 관련 문헌이나 근거 자료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을 정도로 종묘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종묘 담장에 60갑자를 별 뜻 없이 허투루 새겼을 리 없습니다. 일왕 연호처럼 일제가 새겼을 가능성도 낮습니다. '일왕 연호' 추적도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60갑자는 더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문화재청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문화재청도 일왕 연호와 60갑자의 존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에 소개한 것처럼 문화재청은 일왕 연호가 단순한 수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시급한 철거나 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알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볼까 싶어 서둘러 없애버렸다면 더 아쉬움이 남았을 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부족한 추적기를 바탕으로 문화재청의 능력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일왕 연호와 60갑자의 '육하원칙'에 대한 문헌 자료 발굴과 전문가 자문 등을 진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제가 종묘 담장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관람객에게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홍순민 교수의 지적대로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한다면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네거티브 헤리티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기왕 실태조사를 하신다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개집(?)과 배설물이 즐비한 동편 담장 일대도 부디 함께 정비해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일왕 연호 추적기를 미완성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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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왕 연호는 왜 종묘에 있을까…‘昭和’ 추적기
    • 입력 2019-03-11 17:02:00
    • 수정2019-03-11 22:06:36
    취재K
'昭和 八年 三月 改築'의 육하원칙

종묘 담장에 새겨진 '昭和 八年 三月 改築(소화 8년 3월 개축)'. 따로 취재할 것도 없이 여덟 자 글귀에 대부분의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 육하원칙으로 따져 보면, '일제가 1933년 3월에 종묘에서 담장을 고쳐 쌓았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빠진 것은 단 하나, '왜'였습니다.


일제는 왜 그때 종묘 담장을 수리했을까? 문구가 있는 돌은 가장 긴 변의 길이가 1m 정도 되는 큰 돌로 담장 가장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위치와 크기로 볼 때, 문구가 있는 돌만 교체하거나 수리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 위에 있는 작은 돌과 기와 부분까지 새로 쌓아야 했을 겁니다.


종묘 외벽 담장은 둘레가 2km가 훨씬 넘습니다. 취재진은 전체 구간에서 일본 연호가 새겨진 돌을 9개 찾았는데,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정문을 바라보며 좌우를 나눴을 때 왼편에 8개, 오른편에 1개가 있었습니다. 전체 담장을 새로 쌓았다면 불규칙한 간격으로 기록을 남기진 않았을 테고 문구가 있는 구간만 부분적으로 수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제가 갈라버린 창덕궁과 종묘

일제가 종묘 담장에 손을 댄 이유로 추정해 볼 만 한 것은 현재 지하화를 추진하고 있는 율곡로입니다. 종묘는 조선 시대 창덕궁과 연결돼 있었는데 일제가 율곡로를 개통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나뉘게 됐습니다. 일제는 경술국치 2년 만인 1912년 종묘관통 도로를 계획해 이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합니다. 창덕궁에 머물던 역대 왕들이 수시로 참배하던 종묘를 궁궐에서 끊어낸다는 소식에 당시 고종과 순종이 격렬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종묘관통 도로 개통소식을 전하는 1932년 4월 22일 자 동아일보 사진기사를 보면, 지금은 반쯤 철거된 창덕궁-종묘 육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1912년에 계획했던 도로를 20년 만에 개통했으니 일제가 반대 여론을 조금은 의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지대 기록정보대학원의 홍순민 교수는 "사직단을 크게 훼손하고 공원을 만든 일제가 조선인들의 반감을 우려해 조선 왕조의 궁궐과 능묘, 종묘는 비교적 훼손을 하지 않은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관통 도로를 뚫긴 했지만, 종묘 담장의 문구도 훼손이 아닌 수리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설명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통 도로를 내면서 종묘 담장을 일부 신축하고 기존 담장도 함께 수리한 것은 아닐까? 시간상으로도 도로가 개통되고 11개월 뒤에 담장을 수리했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일제는 우리 궁궐이나 문화재들을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수리하면서 꽤 많은 문서기록을 남겼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 있는 검색시스템을 통해 '종묘, 대묘, 창덕궁, 창경궁'의 수리 기록을 검색해보고 당시 신문기사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제 검색은 실패였습니다. 담장을 아홉 군데나 허물고 새로 쌓았다면 기록을 남길 법하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기록이 원래 없었거나 보존이 되지 않았거나 제 검색이 부족했을 수 있는데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담장에 새겨진 60갑자는 누가 언제 남겨 놓았나?


방송에 담지는 못했지만, 종묘 담장에는 일왕의 연호 말고도 '임진년'의 '임진'과 같은 60갑자가 새겨진 돌이 많습니다. 숫자도 일왕 연호보다 훨씬 많은 40여 개에 이릅니다. 새겨진 위치가 일왕 연호와 같은 담장 아랫부분이어서 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데, 글자의 형식이나 서체가 확연히 다릅니다. 새겨진 간격도 규칙성이 없고 60가지 갑자가 모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왕 연호보다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앞서 자문했던 홍순민 교수는 "한양도성의 경우 천자문의 한자를 순서대로 일정 간격으로 새겨 놓아 방위나 위치 등을 표기한 사례가 있는데 종묘의 60갑자는 이와는 다르다"면서 "글자를 새길 때의 연도를 뜻할 가능성이 있는데 현재로써는 관련 문헌이나 근거 자료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태조가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을 정도로 종묘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종묘 담장에 60갑자를 별 뜻 없이 허투루 새겼을 리 없습니다. 일왕 연호처럼 일제가 새겼을 가능성도 낮습니다. '일왕 연호' 추적도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60갑자는 더 알아낸 것이 없습니다.

문화재청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문화재청도 일왕 연호와 60갑자의 존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방송에 소개한 것처럼 문화재청은 일왕 연호가 단순한 수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시급한 철거나 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알면서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가 볼까 싶어 서둘러 없애버렸다면 더 아쉬움이 남았을 만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부족한 추적기를 바탕으로 문화재청의 능력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일왕 연호와 60갑자의 '육하원칙'에 대한 문헌 자료 발굴과 전문가 자문 등을 진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일제가 종묘 담장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관람객에게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홍순민 교수의 지적대로 관련 내용을 잘 정리한다면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네거티브 헤리티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또, 기왕 실태조사를 하신다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개집(?)과 배설물이 즐비한 동편 담장 일대도 부디 함께 정비해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일왕 연호 추적기를 미완성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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