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기와집 20채 가격에 고려 청자 사들인 사연은?

입력 2019.03.14 (18:10) 수정 2019.03.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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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 전형필 선생

20대 조선 청년이 사과 몇 알 사듯 '덜컥'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일본 골동계 인사들 사이에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장안 한복판에서, 나이 서른도 채 안 된 조선인 청년이 나타나 일본인들이 침만 꿀꺽꿀꺽 삼키던 희대의 명품 고려청자를 덜컥 사버린 겁니다.

청과시장에서 과일 몇 개 고르듯, 값 하나 깎지 않고 거금 2만 원을 내밀었습니다. 당시 기와집 한 채의 가격은 대략 천 원가량. 이 청년은 기와집 20채 값을 망설임 없이 지불한 겁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누군지 눈치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문화재 분야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간송 전형필' 선생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을 세운 인물로 종종 다큐멘터리와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대체 간송은 이 도자기가 뭐라고 거금 2만 원씩이나 주고 구입했던 걸까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이름도 긴 이 고려청자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고려청자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화려했습니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유려하게 뻗어 내려오는 곡선'은 이제 이 명품 청자를 대표하는 수식어가 됐습니다. 표면은 학 69마리가 가득 메우고 있는데 원안에 있는 학들은 위로, 원 밖의 학들은 아래로 날고 있습니다. 회청색 유약을 바른 표면에 빙렬(氷裂, 표면이 갈라져서 생긴 무늬)이 세세히 남아있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희대의 '명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자 한쪽에 특이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청자는 처음에 어느 호리꾼에 의해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도굴을 하던 호리꾼이 뾰족한 창으로 무덤을 여기저기 찔러보는 과정에서 청자 표면에 일종의 '흠집'을 냈다는 겁니다.

골동계 원로인 이영섭 씨의 회고담에 따르면, 발굴 직후 이 청자는 한 골동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골동상은 이를 일본의 거물급 수장가에게 팔기 위해 대구로 향했지만 이 수장가는 이미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고 합니다. 이때 만약 일본인 수장가 손에 넘어갔다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이 땅에서 영영 못 보게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골동상은 이 청자를 치과의원을 운영하던 신창재 씨에게 팔았고, 신 씨는 다시 이를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마에다는 이 희대의 명품을 팔아 큰 이문을 남길 생각을 했는데 이를 간송이 거금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겁니다.

일본인이 뒤늦게 알고 되사려 했지만...

간송이 명품 청자를 손에 넣은 사건은 장안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간송에게 청자를 판 마에다의 장인 '아마이케' 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위가 청자를 팔아버린 것을 뒤늦게 알고는 나무랐지만, 장사는 장사였던 겁니다. 그의 주요 단골이었던 일본인 거상 '무라카미'가 간송과 접촉하게 됩니다.

무라카미 : 구하신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실례인 줄 알지만 배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간송 : 이 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에게 주시면 대신 이 매병을 본금에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남만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변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간송이 진실한 말과 겸손한 성품으로 사람을 대했다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대한 콜렉숀대한 콜렉숀



간송 보물의 마지막 외출 '대한콜랙숀'

간송이 지켜낸 우리의 소중한 보물(국보 6점, 보물 8점)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달 말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진행되는 특별전 <대한콜랙숀>입니다. 2014년을 시작으로 모두 열두 차례 간송미술관 밖에서 연 외부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입니다.

외출을 끝낸 보물들은 간송이 건립한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으로 돌아갑니다. 간송미술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1년에 봄과 가을 딱 두 차례만 열리는 특별전을 보기 위해 수백 미터씩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런 진풍경을 곧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화각보화각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미술관의 신축 수장고 건물을 만들 예정이고 내년쯤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연구소의 기능이 옮겨지면 한국전쟁 이전 간송이 사용하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 다시 시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1938년 완공된 뒤 80년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간송이 지킨 문화재들은 미술관에 고이 간직돼 있습니다. 아낌없이 사비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친 간송의 정신은 지금도 보물을 지키는 집 '보화각(葆華閣)'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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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4 18:10:29
    • 수정2019-03-14 18:13:48
    취재후·사건후
▲ 간송 전형필 선생

20대 조선 청년이 사과 몇 알 사듯 '덜컥'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일본 골동계 인사들 사이에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장안 한복판에서, 나이 서른도 채 안 된 조선인 청년이 나타나 일본인들이 침만 꿀꺽꿀꺽 삼키던 희대의 명품 고려청자를 덜컥 사버린 겁니다.

청과시장에서 과일 몇 개 고르듯, 값 하나 깎지 않고 거금 2만 원을 내밀었습니다. 당시 기와집 한 채의 가격은 대략 천 원가량. 이 청년은 기와집 20채 값을 망설임 없이 지불한 겁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누군지 눈치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문화재 분야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간송 전형필' 선생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을 세운 인물로 종종 다큐멘터리와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대체 간송은 이 도자기가 뭐라고 거금 2만 원씩이나 주고 구입했던 걸까요.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이름도 긴 이 고려청자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봤던 고려청자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화려했습니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 '유려하게 뻗어 내려오는 곡선'은 이제 이 명품 청자를 대표하는 수식어가 됐습니다. 표면은 학 69마리가 가득 메우고 있는데 원안에 있는 학들은 위로, 원 밖의 학들은 아래로 날고 있습니다. 회청색 유약을 바른 표면에 빙렬(氷裂, 표면이 갈라져서 생긴 무늬)이 세세히 남아있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희대의 '명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청자 한쪽에 특이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청자는 처음에 어느 호리꾼에 의해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도굴을 하던 호리꾼이 뾰족한 창으로 무덤을 여기저기 찔러보는 과정에서 청자 표면에 일종의 '흠집'을 냈다는 겁니다.

골동계 원로인 이영섭 씨의 회고담에 따르면, 발굴 직후 이 청자는 한 골동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골동상은 이를 일본의 거물급 수장가에게 팔기 위해 대구로 향했지만 이 수장가는 이미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고 합니다. 이때 만약 일본인 수장가 손에 넘어갔다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이 땅에서 영영 못 보게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골동상은 이 청자를 치과의원을 운영하던 신창재 씨에게 팔았고, 신 씨는 다시 이를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마에다는 이 희대의 명품을 팔아 큰 이문을 남길 생각을 했는데 이를 간송이 거금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겁니다.

일본인이 뒤늦게 알고 되사려 했지만...

간송이 명품 청자를 손에 넣은 사건은 장안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간송에게 청자를 판 마에다의 장인 '아마이케' 였다고 합니다. 그는 사위가 청자를 팔아버린 것을 뒤늦게 알고는 나무랐지만, 장사는 장사였던 겁니다. 그의 주요 단골이었던 일본인 거상 '무라카미'가 간송과 접촉하게 됩니다.

무라카미 : 구하신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실례인 줄 알지만 배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간송 : 이 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에게 주시면 대신 이 매병을 본금에 드리겠습니다. 대가는 남만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변에서 바라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간송이 진실한 말과 겸손한 성품으로 사람을 대했다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대한 콜렉숀


간송 보물의 마지막 외출 '대한콜랙숀'

간송이 지켜낸 우리의 소중한 보물(국보 6점, 보물 8점)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달 말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진행되는 특별전 <대한콜랙숀>입니다. 2014년을 시작으로 모두 열두 차례 간송미술관 밖에서 연 외부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자리입니다.

외출을 끝낸 보물들은 간송이 건립한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으로 돌아갑니다. 간송미술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1년에 봄과 가을 딱 두 차례만 열리는 특별전을 보기 위해 수백 미터씩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관람객들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런 진풍경을 곧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화각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전형필 선생의 손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미술관의 신축 수장고 건물을 만들 예정이고 내년쯤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연구소의 기능이 옮겨지면 한국전쟁 이전 간송이 사용하던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 다시 시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1938년 완공된 뒤 80년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간송이 지킨 문화재들은 미술관에 고이 간직돼 있습니다. 아낌없이 사비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 일생을 바친 간송의 정신은 지금도 보물을 지키는 집 '보화각(葆華閣)'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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