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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헐리고 사라진 항일 운동가의 흔적…기념관 건립은 ‘요원’
입력 2019.03.15 (08:58)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헐리고 사라진 항일 운동가의 흔적…기념관 건립은 ‘요원’
▲이범진 공사 순국 장소(상트페테르부르크 란스꼬예 거리)


이범진 러시아 초대 공사 이범진 러시아 초대 공사

헐리고 사라진 이범진 공사 순국 장소…표지석 하나 없는 현실

1911년 1월 26일 정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한 2층 가옥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진 공사가 자결하기 위해 쏜 총성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고종황제에게 보낸 유서에서 "태황제 폐하 신(臣)의 고국인 조선은 멸망하고 폐하는 갖고 있던 권세를 잃고 신은 구적(仇敵)에 대해 보복할 수 없고 또 책벌을 가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스러워 자살 외에 취할 어떠한 수단을 알지 못하는 오늘 마침내 자살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경술국치에 항의해 자결한 대한민국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의 유서였다. 이범진은 순국 전 외국 동포사회를 위해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 7천 루블,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류민회에 5천 루블 총 1만 2천 루블을 남겼다.

당시 이범진 공사의 순국 장소는 헐리고 없어졌는데 정확한 장소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이범진 공사가 근무하던 공사관(1901~1905)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이범진 공사가 근무하던 공사관(1901~1905)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

공사관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기념관 건립 요원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에 있는 공사관 건물에서 이범진 공사가 5년 동안 근무를 한 뒤 공사관이 폐쇄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면서 이범진 공사의 외교관 신분 역시 박탈당했기 때문인데 이범진은 본국 소환령에 불응하고 순국한 장소로 옮겨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이범진 공사의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절차를 몇 차례 밟았으나 포기했다.

2008년 국가보훈처는 공사관이 있던 층수와 호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건물은 맞는다며 예산을 배정해 건물 1층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곧 현지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세계금융위기 속에 한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등의 이유로 중단됐다.

20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측은 광복 70주년과 한러 수교 25주년을 맞아 기념관 설립 추진을 재건의했으나 국가보훈처는 이번에는 건물 내 층수와 호수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보류 방침을 내렸다. 7년 전 1층에 기념관 건립하려던 당시 계획마저 뒤집혔다.

20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측은 러시아 고문서실에 보관된 외교 문서를 입수해 공사관이 있던 층수와 호수를 마침내 확인했다. 건물 5층에 있는 아파트 4채다. 직후 총영사관 측은 다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아파트 매입 비용으로 국가보훈처에 예산배정을 위한 사업 심의 대상에 포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 없이 사업 심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됐다.

지난 10년 동안 기념관 건립을 위한 계획이 표류하는 사이 현지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현지 아파트 주인들은 이곳에 기념관을 지으려는 것을 미리 알고 아파트 매매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고 있다. 기념관 건립을 위한 조건이 더 나빠진 것은 분명하다.

이범진 공사 장례식 (1911년 2월)이범진 공사 장례식 (1911년 2월)

 이범진 공사 순국비(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묘지) 이범진 공사 순국비(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묘지)

유해가 없는 이범진 공사 묘역

이범진 공사의 장례식은 그가 순국한 지 약 1주일여 뒤 열렸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북쪽으로 차로 4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스펜스키 묘지에 안장됐다.

현재 그의 묘지에는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순국비에는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한국 서울에서 탄생해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라고 한글과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묘역에는 이범진 공사의 유해가 묻혀 있지 않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시는 이전의 묘지에 새로운 ‘북방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계획을 승인하면서 방문객이 있는 묘지만 보존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오래된 대다수 묘지가 없어졌고 유실됐다. 이범진 공사의 묘를 조성해 놨을 뿐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새 공동묘지 조성과정에서 훼손되고 사라진 것이다.

이범진 공사의 첫째아들 이기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객사했고 헤이그 특사 자격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둘째 아들 이위종은 아버지가 순국하자 러시아 군대에 입대해 외곽에서 항일 운동을 이어가다 역시 타국에서 숨졌다.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다 모두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이범진 공사의 묘는 그대로 방치돼 있다시피 했고 후세들의 무관심으로 그의 유해와 묘지는 없어진 것이다.

아버지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 아버지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

이준·이상설 선생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위종(사진 맨 오른쪽)이준·이상설 선생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위종(사진 맨 오른쪽)

러시아 항일 운동가였던 부자(父子)의 비극적인 삶

1907년 이범진 공사의 둘째 아들인 이위종 선생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선생과 함께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파견됐다.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 공사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관에서 근무하는 등 러시아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의 지시로 연해주에서 의병조직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활발한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순국하자 러시아 군대에 장교로 입대해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그의 죽음과 행적에 관해서 알려진 게 많이 없다. 유물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증손녀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나 사진 몇 장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범진 공사 기념물이 보관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공관이범진 공사 기념물이 보관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공관

기념관 건립 서둘러 아버지와 아들의 항일 행적 생생히 보관해야!

현재 상트페테레부르크 총영사가 머무는 공관에 이범진 공사의 기념품이 일부 남아 있다. 일반인들이 전혀 방문할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이범진 공사의 유물이 아니라 그의 사진과 관련 서적, 기록 등 이 대부분이며 복사본들이다. 그가 직접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남겼던 유물 등은 한점도 없다.

그의 순국장소와 공사관. 묘지조차 제대로 유지되거나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물이 남아 있길 바라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아마도 중국 등 타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해 조명을 덜 받은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하루속히 기념관을 건립해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선생의 유물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으로 그의 흔적을 복원하고 아들 이위종 선생의 행적과 유물 등도 적극적으로 찾아내 기념관에 같이 보관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 동토의 땅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쓸쓸히 영면에 든 그들에 대한 후손들의 마지막 책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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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5 (08:58)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헐리고 사라진 항일 운동가의 흔적…기념관 건립은 ‘요원’
▲이범진 공사 순국 장소(상트페테르부르크 란스꼬예 거리)


이범진 러시아 초대 공사 이범진 러시아 초대 공사

헐리고 사라진 이범진 공사 순국 장소…표지석 하나 없는 현실

1911년 1월 26일 정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한 2층 가옥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진 공사가 자결하기 위해 쏜 총성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고종황제에게 보낸 유서에서 "태황제 폐하 신(臣)의 고국인 조선은 멸망하고 폐하는 갖고 있던 권세를 잃고 신은 구적(仇敵)에 대해 보복할 수 없고 또 책벌을 가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스러워 자살 외에 취할 어떠한 수단을 알지 못하는 오늘 마침내 자살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썼다.

경술국치에 항의해 자결한 대한민국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의 유서였다. 이범진은 순국 전 외국 동포사회를 위해 미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에 7천 루블, 블라디보스토크의 거류민회에 5천 루블 총 1만 2천 루블을 남겼다.

당시 이범진 공사의 순국 장소는 헐리고 없어졌는데 정확한 장소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 현재 이곳에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 있다.

이범진 공사가 근무하던 공사관(1901~1905)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이범진 공사가 근무하던 공사관(1901~1905)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

공사관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기념관 건립 요원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5번지에 있는 공사관 건물에서 이범진 공사가 5년 동안 근무를 한 뒤 공사관이 폐쇄됐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면서 이범진 공사의 외교관 신분 역시 박탈당했기 때문인데 이범진은 본국 소환령에 불응하고 순국한 장소로 옮겨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그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이범진 공사의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절차를 몇 차례 밟았으나 포기했다.

2008년 국가보훈처는 공사관이 있던 층수와 호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건물은 맞는다며 예산을 배정해 건물 1층에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곧 현지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세계금융위기 속에 한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등의 이유로 중단됐다.

201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측은 광복 70주년과 한러 수교 25주년을 맞아 기념관 설립 추진을 재건의했으나 국가보훈처는 이번에는 건물 내 층수와 호수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보류 방침을 내렸다. 7년 전 1층에 기념관 건립하려던 당시 계획마저 뒤집혔다.

201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측은 러시아 고문서실에 보관된 외교 문서를 입수해 공사관이 있던 층수와 호수를 마침내 확인했다. 건물 5층에 있는 아파트 4채다. 직후 총영사관 측은 다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아파트 매입 비용으로 국가보훈처에 예산배정을 위한 사업 심의 대상에 포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 없이 사업 심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됐다.

지난 10년 동안 기념관 건립을 위한 계획이 표류하는 사이 현지 부동산 가격은 급등했다. 현지 아파트 주인들은 이곳에 기념관을 지으려는 것을 미리 알고 아파트 매매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고 있다. 기념관 건립을 위한 조건이 더 나빠진 것은 분명하다.

이범진 공사 장례식 (1911년 2월)이범진 공사 장례식 (1911년 2월)

 이범진 공사 순국비(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묘지) 이범진 공사 순국비(상트페테르부르크 북방묘지)

유해가 없는 이범진 공사 묘역

이범진 공사의 장례식은 그가 순국한 지 약 1주일여 뒤 열렸다. 그의 유해는 1911년 2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북쪽으로 차로 40여 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우스펜스키 묘지에 안장됐다.

현재 그의 묘지에는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순국비에는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한국 서울에서 탄생해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라고 한글과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그런데 정작 이 묘역에는 이범진 공사의 유해가 묻혀 있지 않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시는 이전의 묘지에 새로운 ‘북방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계획을 승인하면서 방문객이 있는 묘지만 보존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오래된 대다수 묘지가 없어졌고 유실됐다. 이범진 공사의 묘를 조성해 놨을 뿐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새 공동묘지 조성과정에서 훼손되고 사라진 것이다.

이범진 공사의 첫째아들 이기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 직후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객사했고 헤이그 특사 자격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둘째 아들 이위종은 아버지가 순국하자 러시아 군대에 입대해 외곽에서 항일 운동을 이어가다 역시 타국에서 숨졌다.

가족이 독립운동을 하다 모두 목숨을 잃은 상황에서 이범진 공사의 묘는 그대로 방치돼 있다시피 했고 후세들의 무관심으로 그의 유해와 묘지는 없어진 것이다.

아버지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 아버지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

이준·이상설 선생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위종(사진 맨 오른쪽)이준·이상설 선생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이위종(사진 맨 오른쪽)

러시아 항일 운동가였던 부자(父子)의 비극적인 삶

1907년 이범진 공사의 둘째 아들인 이위종 선생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선생과 함께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파견됐다.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 공사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관에서 근무하는 등 러시아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의 지시로 연해주에서 의병조직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활발한 항일 운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아버지가 순국하자 러시아 군대에 장교로 입대해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그의 죽음과 행적에 관해서 알려진 게 많이 없다. 유물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의 증손녀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나 사진 몇 장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범진 공사 기념물이 보관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공관이범진 공사 기념물이 보관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 공관

기념관 건립 서둘러 아버지와 아들의 항일 행적 생생히 보관해야!

현재 상트페테레부르크 총영사가 머무는 공관에 이범진 공사의 기념품이 일부 남아 있다. 일반인들이 전혀 방문할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이범진 공사의 유물이 아니라 그의 사진과 관련 서적, 기록 등 이 대부분이며 복사본들이다. 그가 직접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남겼던 유물 등은 한점도 없다.

그의 순국장소와 공사관. 묘지조차 제대로 유지되거나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물이 남아 있길 바라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아마도 중국 등 타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비해 조명을 덜 받은 것도 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하루속히 기념관을 건립해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선생의 유물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으로 그의 흔적을 복원하고 아들 이위종 선생의 행적과 유물 등도 적극적으로 찾아내 기념관에 같이 보관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 동토의 땅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쓸쓸히 영면에 든 그들에 대한 후손들의 마지막 책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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