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이 쓰면 무조건 진리?…정치권의 외신 ‘아전인수’

입력 2019.03.20 (16:38) 수정 2019.03.20 (17:0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김정은 수석대변인' 외신 인용했다는 말이 더 괘씸해"

지난 12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문재인 대통령이) 더 이상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얘기 듣지 않도록 해 달라"는 나 원내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고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이 거세자 나 원내대표는 수차례 "외신에 나온 말"임을 강조하며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표현이 문제 될 게 없다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외신의 권위에 기대 자신의 발언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민주당 의원은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표현보다 '외신을 인용했다'는 항변이 더 괘씸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문제가 될 걸 알고 비겁하게 외신이라는 알리바이를 마련해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민주당의 뒤끝?…'검은 머리 외신' 논란

결국, 불똥은 해당 기사를 처음 작성한 블룸버그 통신 기자에로까지 튀었습니다. 민주당은 다음날(13일) 대변인 명의 논평에서 이 기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賣國)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기자가 한국인임을 상기시키며 "한국인 외신 주재원이 쓴 '검은 머리 외신' 기사"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외신기자클럽과 아시안 아메리칸 기자협회(Asian American Journalists Association, 이하 AAJA) 서울지부가 기자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라며 민주당에 논평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민주당도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며 어제(19일) 다시 서면 브리핑을 통해 사과 의사를 밝히고 문제가 된 논평에서 기자의 이름, 개인 이력을 삭제했습니다. 최근도 아니고, 지난해 9월 작성된 외신 기사 한 건이 그야말로 한 주 내내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권의 외신 '아전인수' 이번이 처음 아냐"

정치권이 외신이 작성한 한국 정치 관련 기사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17년 19대 대선을 닷새 앞두고 타임 아시아판이 표지에 '협상가'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당시 후보의 정면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문재인이 김정은을 상대할 남한의 리더가 되려 한다'는 부제도 달렸습니다. 당시 문재인 캠프는 보도자료까지 배포하며 타임지에 문 후보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18대 대선에서도 역시 타임지 기사가 화제가 됐습니다.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타임 아시아판을 박근혜 당시 후보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며 'The Storngman's Daughter'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표현을 두고 새누리당은 '실력자의 딸'로 해석해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 캠프에선 '독재자의 딸'이 맞는 표현이라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정치권이 외신의 서울발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외신이 갖는 권위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1987>을 보신 분이라면 아마 기억나실 장면이 있습니다. 하정우가 품속에서 뉴스위크지를 꺼내 김윤식 앞에서 흔들어 보이던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가로막는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에게 '외신에 폭로하겠다'는 시위를 한 거죠.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국내 언론들이 사실상 제 역할을 못 하던 당시, 외신은 독재의 실상을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의 폭력 참상을 외부 세계에 알린 것도 국내 언론이 아니라 외신이었습니다. 우리 정치권에서 외신이 내신에 비해 큰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습니다.


외신 '아전인수'보다 소통에 방점 둬야

그렇다면 외신의 '오늘'은 어떨까요. 서울외신기자클럽에는 270여 명의 외신기자가 등록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현지 채용된 한국인 주재원이고,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외국인 기자'는 그보다 적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울발 외신 기사 상당수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 기자에 의해 작성됩니다. 또 과거처럼 국내 언론에 대한 통제가 없기 때문에, 외신이든 내신이든 자유롭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외신이 인력과 정보 면에서 국내 언론에 비해 열세이다 보니 서울발 외신에서 국내 언론을 인용하는 빈도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외신이라고 해서 더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인 겁니다. 그런데도 야당은 외신의 권위에 기대 청와대와 여당을 비판하고, 또 여당은 그 비판에 발끈해 외신 기자의 실명까지 거론해가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논평을 내고 있는 게 지금 정치권 현실입니다.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을 지낸 이창호 전 로이터 기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정치권이 외신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외신의 서울발 기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으면서도 정작 외신을 전담하는 공보인력은 현재 어느 당에서도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수석대변인' 표현을 두고 소모적 정쟁을 하기보다는 전 세계 독자들이 우리 정치 현실과 한반도 상황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외신과의 소통을 강화하기를 기대해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외신이 쓰면 무조건 진리?…정치권의 외신 ‘아전인수’
    • 입력 2019-03-20 16:38:46
    • 수정2019-03-20 17:01:14
    취재K
"'김정은 수석대변인' 외신 인용했다는 말이 더 괘씸해"

지난 12일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문재인 대통령이) 더 이상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얘기 듣지 않도록 해 달라"는 나 원내대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고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민주당 의원들의 반발이 거세자 나 원내대표는 수차례 "외신에 나온 말"임을 강조하며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표현이 문제 될 게 없다고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외신의 권위에 기대 자신의 발언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민주당 의원은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란 표현보다 '외신을 인용했다'는 항변이 더 괘씸하다고도 말했습니다. "처음부터 문제가 될 걸 알고 비겁하게 외신이라는 알리바이를 마련해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민주당의 뒤끝?…'검은 머리 외신' 논란

결국, 불똥은 해당 기사를 처음 작성한 블룸버그 통신 기자에로까지 튀었습니다. 민주당은 다음날(13일) 대변인 명의 논평에서 이 기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賣國)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 기자가 한국인임을 상기시키며 "한국인 외신 주재원이 쓴 '검은 머리 외신' 기사"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외신기자클럽과 아시안 아메리칸 기자협회(Asian American Journalists Association, 이하 AAJA) 서울지부가 기자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라며 민주당에 논평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민주당도 일부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며 어제(19일) 다시 서면 브리핑을 통해 사과 의사를 밝히고 문제가 된 논평에서 기자의 이름, 개인 이력을 삭제했습니다. 최근도 아니고, 지난해 9월 작성된 외신 기사 한 건이 그야말로 한 주 내내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권의 외신 '아전인수' 이번이 처음 아냐"

정치권이 외신이 작성한 한국 정치 관련 기사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17년 19대 대선을 닷새 앞두고 타임 아시아판이 표지에 '협상가'라는 제목으로 문재인 당시 후보의 정면 사진을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문재인이 김정은을 상대할 남한의 리더가 되려 한다'는 부제도 달렸습니다. 당시 문재인 캠프는 보도자료까지 배포하며 타임지에 문 후보가 표지 모델로 등장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18대 대선에서도 역시 타임지 기사가 화제가 됐습니다.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타임 아시아판을 박근혜 당시 후보를 표지 모델로 내세우며 'The Storngman's Daughter'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표현을 두고 새누리당은 '실력자의 딸'로 해석해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 캠프에선 '독재자의 딸'이 맞는 표현이라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정치권이 외신의 서울발 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외신이 갖는 권위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1987>을 보신 분이라면 아마 기억나실 장면이 있습니다. 하정우가 품속에서 뉴스위크지를 꺼내 김윤식 앞에서 흔들어 보이던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가로막는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에게 '외신에 폭로하겠다'는 시위를 한 거죠. 전두환 정권의 '보도 통제'로 국내 언론들이 사실상 제 역할을 못 하던 당시, 외신은 독재의 실상을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군부의 폭력 참상을 외부 세계에 알린 것도 국내 언론이 아니라 외신이었습니다. 우리 정치권에서 외신이 내신에 비해 큰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습니다.


외신 '아전인수'보다 소통에 방점 둬야

그렇다면 외신의 '오늘'은 어떨까요. 서울외신기자클럽에는 270여 명의 외신기자가 등록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현지 채용된 한국인 주재원이고,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외국인 기자'는 그보다 적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울발 외신 기사 상당수가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 기자에 의해 작성됩니다. 또 과거처럼 국내 언론에 대한 통제가 없기 때문에, 외신이든 내신이든 자유롭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외신이 인력과 정보 면에서 국내 언론에 비해 열세이다 보니 서울발 외신에서 국내 언론을 인용하는 빈도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외신이라고 해서 더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인 겁니다. 그런데도 야당은 외신의 권위에 기대 청와대와 여당을 비판하고, 또 여당은 그 비판에 발끈해 외신 기자의 실명까지 거론해가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논평을 내고 있는 게 지금 정치권 현실입니다.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을 지낸 이창호 전 로이터 기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정치권이 외신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외신의 서울발 기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으면서도 정작 외신을 전담하는 공보인력은 현재 어느 당에서도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김정은의 수석대변인' 표현을 두고 소모적 정쟁을 하기보다는 전 세계 독자들이 우리 정치 현실과 한반도 상황을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외신과의 소통을 강화하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