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관광지입니까?”…재선충 덮친 국립공원

입력 2019.03.24 (12:00) 수정 2019.03.2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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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본 경남 거제시 몽돌해수욕장 인근 해안림의 모습. 해송림 곳곳에 색이 바랜 채 죽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한려해상국립공원·창녕 우포늪 '소나무 재선충' 피해로 생태계, 관광 분야 타격
재선충 방제 담당하는 산림청과 자치단체는 역량 부족… 환경부는 '뒷짐'
보존가치 높은 국립공원과 생태계 보전지역 소나무는 특별 관리해야

"저기 산 밑에 좀 보세요. 이게 무슨 관광지입니까?"

경남 거제시 해안가를 돌아보던 산림기술사 정규원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 박사가 가리킨 몽돌해변 인근 야산에는 벌겋게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사시사철 푸르러야 할 소나무를 이렇게 만든 건 '소나무 재선충'병이다. 치사율 100%, 아직 치료 약도 없어 그냥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

소나무의 천적, 골칫덩이 '재선충'

몸길이 1mm의 작은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에 기생한다. 그러다 4~8월 사이 솔수염하늘소 성충이 솔잎을 갉아 먹을 때 소나무로 옮겨간다.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는 3~4개월 안에 말라죽는다. 솔수염하늘소는 썩은 나무에 또 알을 낳고, 이 과정이 반복되며 감염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걸리자마자 소나무 색이 변하는 게 아니어서 겉으론 잎이 파랗더라도 감염목일 수 있다. 주변 나무가 얼마나 감염됐는지는 나무에 하나하나 구멍을 내 송진을 채취해봐야만 알 수 있다.

한해 7백만 명 찾는 한려해상국립공원도 갉아먹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서 감염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제도 해안림과 야산 곳곳에는 벌채 대상 표식이 붙은 불그죽죽한 소나무들이 위태로이 서 있었다.

벌채 대상을 알리는 표식이 붙은 소나무. 사람으로 치면 ‘사망 선고’ 딱지다.벌채 대상을 알리는 표식이 붙은 소나무. 사람으로 치면 ‘사망 선고’ 딱지다.

현장에서 본 피해목들은 대부분 수령 20~30년 정도였다. 정 박사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바닷가라 나무가 한번 죽으면 다시 자라기 힘든데 너무 아깝다"며 "염분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해안림을 이대로 방치하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또 "남해안 해안림은 대부분 해송인데, 결국 이 소나무들이 국립공원의 절경을 만들어내는 것" 이라며 "소나무가 다 사라지면 저 섬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솔숲을 보러 먼 길을 찾아온 관광객들도 실망할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 휴양하러 왔다는 65살 도승백 씨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온 건데 곳곳에 죽은 소나무가 많아 흉물스러웠다"고 말했다.

우포늪에도 재선충병… 국내 최고 습지 명성에 '생채기'

거제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창녕 우포늪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늪지 생태계에 필수적인 배후 숲에도 재선충병이 번져있었다.

우포늪 주변 재선충병 발생 현황. 피해 고사목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돼있다. (자료 제공: 산림청)우포늪 주변 재선충병 발생 현황. 피해 고사목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돼있다. (자료 제공: 산림청)

천연기념물 제524호인 우포늪은 1997년 7월 생태계 특별보전구역으로 지정된 국내 최고의 천연 습지다. 우포늪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은 습지와 배후 숲을 오가며 살고 있어 숲이 망가지면 늪의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우포늪에 재선충병이 발생한 건 2년 전부터다. 올해 3월까지 관찰된 감염목은 모두 2천 500그루에 이른다. 빠른 시간 내에 이렇게 많은 나무가 병에 걸린 건 발생 초기 대응을 제대로 못 한 탓이 크다.

전문성·예산·인력 부족… 당국은 사실상 '자포자기'

2005년 제정된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 제4조에 따르면 소나무 재선충 방제 책임은 산림청에 있다. 하지만 실제 방제 작업은 자치단체가 전담한다. 산림청이 현장 예찰 활동을 통해 감염목을 찾아내고 자치단체가 현장 작업을 하는 시스템이다.

길이 20m에 달하는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고, 잘게 잘라서 옮겨 파쇄하는 데 드는 비용은 6만 원 정도다. 우포늪만 해도 피해목이 수천 그루에 달하니 군청에는 큰 부담이 된다.

현장에서 만난 창녕군청 관계자는 초기 대응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예산 부족을 꼽았다. 환경부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만 해놓고 정작 예산 배정에는 별 신경을 안 써준다는 것이다.

창녕군청 방제단이 우포늪 내 감염목을 잘라내고 있다.창녕군청 방제단이 우포늪 내 감염목을 잘라내고 있다.

앞서 들렀던 거제에서 본 시청 직영 방제단의 작업 역시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었다. 감염된 나무는 하늘소 유충이 살 수 없도록 지금 2cm 이하로 잘게 쪼개고, 깨끗이 치워야 한다. 까다로운 작업이라 현장에 산림기사들이 감독해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도 접근이 쉬운 도로변 등에 있는 나무는 제거 작업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바위섬에 있는 감염목들은 그대로 방치돼있었다.

현장을 지켜본 정 박사는 "겉으로 보이는 곳만 살짝 작업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정도로 방치된 곳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국립공원 등 보존 가치 큰 숲은 특별 관리해야

전문가들은 재선충 방제 작업과 관련해 '모든 숲에 똑같은 처방을 내리는 게 문제'라고 분석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나 창녕 우포늪처럼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큰 숲은 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해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재에 동행한 전문가들 역시 "국립공원이나 생태계 특별보호구역은 환경부와 산림청이 자치단체와 협력해 연 2회 이상 철저한 방제 작업을 하고, 재선충 예방주사를 비롯한 방제 기술을 보다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소나무 재선충 분야 전문가인 산림기술사 정규원 박사가 야산에 방치된 썩은 소나무를 쪼개 살펴보고 있다.소나무 재선충 분야 전문가인 산림기술사 정규원 박사가 야산에 방치된 썩은 소나무를 쪼개 살펴보고 있다.

1988년 우리나라에 재선충병이 처음 들어온 뒤로 방제에 쏟아부은 예산만 9천70억 원에 달한다. 제대로 된 방제 정책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이를 지킬 때나 의미가 있는 돈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한다는 애국가 속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옛말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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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게 무슨 관광지입니까?”…재선충 덮친 국립공원
    • 입력 2019-03-24 12:00:25
    • 수정2019-03-24 15:32:55
    취재K
▲ 하늘에서 본 경남 거제시 몽돌해수욕장 인근 해안림의 모습. 해송림 곳곳에 색이 바랜 채 죽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한려해상국립공원·창녕 우포늪 '소나무 재선충' 피해로 생태계, 관광 분야 타격
재선충 방제 담당하는 산림청과 자치단체는 역량 부족… 환경부는 '뒷짐'
보존가치 높은 국립공원과 생태계 보전지역 소나무는 특별 관리해야

"저기 산 밑에 좀 보세요. 이게 무슨 관광지입니까?"

경남 거제시 해안가를 돌아보던 산림기술사 정규원 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 박사가 가리킨 몽돌해변 인근 야산에는 벌겋게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사시사철 푸르러야 할 소나무를 이렇게 만든 건 '소나무 재선충'병이다. 치사율 100%, 아직 치료 약도 없어 그냥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

소나무의 천적, 골칫덩이 '재선충'

몸길이 1mm의 작은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와 같은 매개충에 기생한다. 그러다 4~8월 사이 솔수염하늘소 성충이 솔잎을 갉아 먹을 때 소나무로 옮겨간다.

재선충에 감염된 소나무는 3~4개월 안에 말라죽는다. 솔수염하늘소는 썩은 나무에 또 알을 낳고, 이 과정이 반복되며 감염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걸리자마자 소나무 색이 변하는 게 아니어서 겉으론 잎이 파랗더라도 감염목일 수 있다. 주변 나무가 얼마나 감염됐는지는 나무에 하나하나 구멍을 내 송진을 채취해봐야만 알 수 있다.

한해 7백만 명 찾는 한려해상국립공원도 갉아먹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에서 감염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제도 해안림과 야산 곳곳에는 벌채 대상 표식이 붙은 불그죽죽한 소나무들이 위태로이 서 있었다.

벌채 대상을 알리는 표식이 붙은 소나무. 사람으로 치면 ‘사망 선고’ 딱지다.
현장에서 본 피해목들은 대부분 수령 20~30년 정도였다. 정 박사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바닷가라 나무가 한번 죽으면 다시 자라기 힘든데 너무 아깝다"며 "염분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해안림을 이대로 방치하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또 "남해안 해안림은 대부분 해송인데, 결국 이 소나무들이 국립공원의 절경을 만들어내는 것" 이라며 "소나무가 다 사라지면 저 섬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솔숲을 보러 먼 길을 찾아온 관광객들도 실망할 수밖에 없다. 가족들과 휴양하러 왔다는 65살 도승백 씨는 "남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온 건데 곳곳에 죽은 소나무가 많아 흉물스러웠다"고 말했다.

우포늪에도 재선충병… 국내 최고 습지 명성에 '생채기'

거제에서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창녕 우포늪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늪지 생태계에 필수적인 배후 숲에도 재선충병이 번져있었다.

우포늪 주변 재선충병 발생 현황. 피해 고사목의 위치가 빨간 점으로 표시돼있다. (자료 제공: 산림청)
천연기념물 제524호인 우포늪은 1997년 7월 생태계 특별보전구역으로 지정된 국내 최고의 천연 습지다. 우포늪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은 습지와 배후 숲을 오가며 살고 있어 숲이 망가지면 늪의 생태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우포늪에 재선충병이 발생한 건 2년 전부터다. 올해 3월까지 관찰된 감염목은 모두 2천 500그루에 이른다. 빠른 시간 내에 이렇게 많은 나무가 병에 걸린 건 발생 초기 대응을 제대로 못 한 탓이 크다.

전문성·예산·인력 부족… 당국은 사실상 '자포자기'

2005년 제정된 <소나무재선충병 방제특별법> 제4조에 따르면 소나무 재선충 방제 책임은 산림청에 있다. 하지만 실제 방제 작업은 자치단체가 전담한다. 산림청이 현장 예찰 활동을 통해 감염목을 찾아내고 자치단체가 현장 작업을 하는 시스템이다.

길이 20m에 달하는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고, 잘게 잘라서 옮겨 파쇄하는 데 드는 비용은 6만 원 정도다. 우포늪만 해도 피해목이 수천 그루에 달하니 군청에는 큰 부담이 된다.

현장에서 만난 창녕군청 관계자는 초기 대응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예산 부족을 꼽았다. 환경부가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만 해놓고 정작 예산 배정에는 별 신경을 안 써준다는 것이다.

창녕군청 방제단이 우포늪 내 감염목을 잘라내고 있다.
앞서 들렀던 거제에서 본 시청 직영 방제단의 작업 역시 그야말로 주먹구구식이었다. 감염된 나무는 하늘소 유충이 살 수 없도록 지금 2cm 이하로 잘게 쪼개고, 깨끗이 치워야 한다. 까다로운 작업이라 현장에 산림기사들이 감독해야 하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도 접근이 쉬운 도로변 등에 있는 나무는 제거 작업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바위섬에 있는 감염목들은 그대로 방치돼있었다.

현장을 지켜본 정 박사는 "겉으로 보이는 곳만 살짝 작업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정도로 방치된 곳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국립공원 등 보존 가치 큰 숲은 특별 관리해야

전문가들은 재선충 방제 작업과 관련해 '모든 숲에 똑같은 처방을 내리는 게 문제'라고 분석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이나 창녕 우포늪처럼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큰 숲은 특별관리구역으로 지정해 선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재에 동행한 전문가들 역시 "국립공원이나 생태계 특별보호구역은 환경부와 산림청이 자치단체와 협력해 연 2회 이상 철저한 방제 작업을 하고, 재선충 예방주사를 비롯한 방제 기술을 보다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소나무 재선충 분야 전문가인 산림기술사 정규원 박사가 야산에 방치된 썩은 소나무를 쪼개 살펴보고 있다.
1988년 우리나라에 재선충병이 처음 들어온 뒤로 방제에 쏟아부은 예산만 9천70억 원에 달한다. 제대로 된 방제 정책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이를 지킬 때나 의미가 있는 돈이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한다는 애국가 속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옛말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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