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의 핵심은 ‘검사 조서’…“공판중심주의 강화해야”

입력 2019.03.26 (14:45) 수정 2019.03.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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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 개혁의 핵심은 고위 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나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만은 아닙니다. 핵심은 딴 데 있죠.”

한 전직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법조인이 가장 시급하게 꼽는 검찰 개혁의 제1 과제는 바로 검사가 작성하는 피의자 신문조서의 문제다. 과연 이 조서가 뭐길래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일까.

피의자 신문조서란?

사법 경찰관이나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작성하는 조서는 형사소송법 제244조 1항 ‘피의자의 진술은 조서에 기재돼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법원에 제출된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작성되는 피의자 신문조서는, 법적 효력이 하늘과 땅 차이다.

예를 들어 조사 과정에서 경찰 조서와 검사 조서가 각각 작성됐다고 치자.

경찰조서에 대해서는 피고인(혹은 변호인)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할 수 있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경찰 조사 때는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간단하게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다.

검찰조서는 다르다.

피고인이 “검찰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말은 맞다”고 인정하는 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증거로 인정된다. 고문에 의한 진술임이 인정되는 등 임의성 등에 문제가 없으면 쉽게 증거로 인정된다.


슈퍼 파워 ‘조서 권력’

이렇게 검사 작성 조서가 법정에서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면서 검사 조서는 수사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다. 이번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판사들은 검사 조서의 문제점을 절감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 의하면 검사 조서에는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뀐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조사의 근간을 흔드는 예상외의 답변이 나오면 아예 관련 부분을 없앴기도 했다고 한다.

검사의 미묘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적혀 있는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리한 문답만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대한 분량의 조서를 일일이 고쳐달라고 할 수 없어 포기했다는 증언도 있다. 죄가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검사는 "나중에 법정에서 얘기하시죠"하면서 조서에는 반영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검사의 의도에 맞게 맞춰진 조서는 법정에 제출되는데, 중요 사건의 경우 분량이 수천, 수만 페이지에 달한다. 오로지 종이로만 제공되기 때문에 피고인 측이 이를 모두 복사해 공판에 대비하기조차 쉽지 않다.


방어권 취약, 이중조사 문제

이렇게 검사 작성 조서가 법정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되면서 검찰 수사는 자연스럽게 자백에 의존하게 된다. 공개 재판이 아닌 검찰청 작은 방에서 밤샘 조사를 받으며, 각종 불이익을 암시하며 자백을 압박하는 검사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당당해질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게 받은 자백으로 조서가 꾸려지고, 이를 수단으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게 2019년 대한민국 검찰 수사의 관행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형사법 절차의 모델이 된 독일이나 다른 선진국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판사가 직접 원고와 피고의 공방을 들으면서 판단하는 직접 심리주의, 공판 중심주의를 취하고 있다. 우리처럼 검찰 조사에 증거능력을 부여해, ‘일단 믿고 들어가는’ 식의 우월한 권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만 유독 검사 작성 조서에 우월한 힘을 부여한다. 당장 검경의 진술조서 증거력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건을 경찰과 검찰이 이중으로 조사하는 공권력 낭비도 발생한다.

경찰은 이런 조서의 증거능력 차이 때문에 검찰보다는 오히려 경찰이 증거 위주의 과학적 수사에 더 가까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성택 성남수정경찰서 형사과장은 한 신문 기고에서 “경찰은 피고인의 내용 부인 시 증거 능력이 없어지는 제도 아래 일찍부터 객관적, 과학적 증거로써 피의자를 조사하는 인권 친화적 수사 절차 구현에 애써왔다”며 “앞으로 (검사조사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검찰도 자백보다는 과학수사를 통해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원 책임론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수사 기관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내용을 인정했을 경우에만 증거능력을 인정하자는 견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회에서도 이런 내용의 형소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현재 검경수사권 조정법안을 두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전망은 밝지 않다.


전문가들은 설사 법 개정이 되지 않더라도 현행 제도에서도 법원의 의지만 있으면 검사 작성 조서의 문제를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검사 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증명력이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308조에 규정된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이 자유판단에 따라 인정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 즉 검사 조사가 증거가 될 수 있는 능력(증거능력)은 부인하지 못해도 실제로 기소 사실을 입증하는 증명력이 있는지는 공판 과정에서 법관이 얼마든지 걸러낼 수 있다.

그럼에도 검찰의 조서 능력이 재판의 유력한 증거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업무 과중 등을 이유로 법원이 공판중심주의에 소극적인 탓도 크다. "조서를 집어 던져라"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충고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형사 법정에서 판사들이 제 역할을 못 해주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검찰은 공권력을 상징으로 범죄에 맞서는 집단이지만, 인권 보호를 중요 가치로 삼는 형사소송법체계에서는 피고와 맞서는 원고, 즉 당사자일 뿐이다.

한 변호사는 "예를 들어 밤샘 조사 등의 잘못된 관행 하에 작성된 검사 조서에 대해 법원이 깐깐한 잣대를 적용하면 밤샘 조사 관행은 간단히 없어질 것"이라며 "검찰이 수집한 증거에 쉽게 편승하려는 사법부의 태도도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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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9-03-26 14: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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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찰 개혁의 핵심은 고위 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나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만은 아닙니다. 핵심은 딴 데 있죠.”

한 전직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법조인이 가장 시급하게 꼽는 검찰 개혁의 제1 과제는 바로 검사가 작성하는 피의자 신문조서의 문제다. 과연 이 조서가 뭐길래 이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일까.

피의자 신문조서란?

사법 경찰관이나 검사가 수사 과정에서 작성하는 조서는 형사소송법 제244조 1항 ‘피의자의 진술은 조서에 기재돼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법원에 제출된다.


그런데 경찰과 검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작성되는 피의자 신문조서는, 법적 효력이 하늘과 땅 차이다.

예를 들어 조사 과정에서 경찰 조서와 검사 조서가 각각 작성됐다고 치자.

경찰조서에 대해서는 피고인(혹은 변호인)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할 수 있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경찰 조사 때는 그런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간단하게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다.

검찰조서는 다르다.

피고인이 “검찰에서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 말은 맞다”고 인정하는 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증거로 인정된다. 고문에 의한 진술임이 인정되는 등 임의성 등에 문제가 없으면 쉽게 증거로 인정된다.


슈퍼 파워 ‘조서 권력’

이렇게 검사 작성 조서가 법정에서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면서 검사 조서는 수사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다. 이번 사법농단 의혹 수사에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판사들은 검사 조서의 문제점을 절감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에 의하면 검사 조서에는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뀐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조사의 근간을 흔드는 예상외의 답변이 나오면 아예 관련 부분을 없앴기도 했다고 한다.

검사의 미묘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적이 없는데 그렇게 적혀 있는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유리한 문답만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방대한 분량의 조서를 일일이 고쳐달라고 할 수 없어 포기했다는 증언도 있다. 죄가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검사는 "나중에 법정에서 얘기하시죠"하면서 조서에는 반영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검사의 의도에 맞게 맞춰진 조서는 법정에 제출되는데, 중요 사건의 경우 분량이 수천, 수만 페이지에 달한다. 오로지 종이로만 제공되기 때문에 피고인 측이 이를 모두 복사해 공판에 대비하기조차 쉽지 않다.


방어권 취약, 이중조사 문제

이렇게 검사 작성 조서가 법정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되면서 검찰 수사는 자연스럽게 자백에 의존하게 된다. 공개 재판이 아닌 검찰청 작은 방에서 밤샘 조사를 받으며, 각종 불이익을 암시하며 자백을 압박하는 검사의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 당당해질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게 받은 자백으로 조서가 꾸려지고, 이를 수단으로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는 게 2019년 대한민국 검찰 수사의 관행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형사법 절차의 모델이 된 독일이나 다른 선진국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판사가 직접 원고와 피고의 공방을 들으면서 판단하는 직접 심리주의, 공판 중심주의를 취하고 있다. 우리처럼 검찰 조사에 증거능력을 부여해, ‘일단 믿고 들어가는’ 식의 우월한 권력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만 유독 검사 작성 조서에 우월한 힘을 부여한다. 당장 검경의 진술조서 증거력 차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건을 경찰과 검찰이 이중으로 조사하는 공권력 낭비도 발생한다.

경찰은 이런 조서의 증거능력 차이 때문에 검찰보다는 오히려 경찰이 증거 위주의 과학적 수사에 더 가까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성택 성남수정경찰서 형사과장은 한 신문 기고에서 “경찰은 피고인의 내용 부인 시 증거 능력이 없어지는 제도 아래 일찍부터 객관적, 과학적 증거로써 피의자를 조사하는 인권 친화적 수사 절차 구현에 애써왔다”며 “앞으로 (검사조사의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검찰도 자백보다는 과학수사를 통해 범죄 사실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원 책임론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수사 기관에서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내용을 인정했을 경우에만 증거능력을 인정하자는 견해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회에서도 이런 내용의 형소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현재 검경수사권 조정법안을 두고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전망은 밝지 않다.


전문가들은 설사 법 개정이 되지 않더라도 현행 제도에서도 법원의 의지만 있으면 검사 작성 조서의 문제를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검사 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되더라도 결국 중요한 건 증명력이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308조에 규정된 자유심증주의에 따라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이 자유판단에 따라 인정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 즉 검사 조사가 증거가 될 수 있는 능력(증거능력)은 부인하지 못해도 실제로 기소 사실을 입증하는 증명력이 있는지는 공판 과정에서 법관이 얼마든지 걸러낼 수 있다.

그럼에도 검찰의 조서 능력이 재판의 유력한 증거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업무 과중 등을 이유로 법원이 공판중심주의에 소극적인 탓도 크다. "조서를 집어 던져라"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의 충고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형사 법정에서 판사들이 제 역할을 못 해주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검찰은 공권력을 상징으로 범죄에 맞서는 집단이지만, 인권 보호를 중요 가치로 삼는 형사소송법체계에서는 피고와 맞서는 원고, 즉 당사자일 뿐이다.

한 변호사는 "예를 들어 밤샘 조사 등의 잘못된 관행 하에 작성된 검사 조서에 대해 법원이 깐깐한 잣대를 적용하면 밤샘 조사 관행은 간단히 없어질 것"이라며 "검찰이 수집한 증거에 쉽게 편승하려는 사법부의 태도도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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