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귀한 자식’ 건드리지 마세요! 이제는 ‘매너 소비자’ 시대

입력 2019.03.31 (08:02) 수정 2019.03.3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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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귀한 아들딸들 건드리지 말고 불만사항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사장놈"

서울 동대문에 있는 한 편의점에서 이 문구를 붙여두고 영업하는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편의점을 운영한 지 4년째, 더 이상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막말을 하는 손님들을 두고 볼 수 없어 계산대 옆에 경고문을 붙였습니다. 혹여 손님들이 불쾌할까, 자신을 '사장놈'이라고 몸소 낮췄습니다.

또 다른 호프집. 이번에는 아예 아르바이트생이 입는 티셔츠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술 취한 손님들이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반말을 하고 메뉴판을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해, 호프집 사장이 주문 제작해서 입힌 티셔츠입니다. 효과는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손님들이 막말을 하려다가도 '멈칫' 하는 걸 느낀다고 합니다.

매너 소비자, 그리고 '워커밸'(worker and customer balance)

전문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소비 트렌드는 ‘매너 소비자’입니다. 소비자들의 도를 넘는 횡포를 막고, 노동자도 손님도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2018년의 중요한 화두는 주 52시간 노동을 필두로 한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노동의 '양적인' 개선을 두고 사회가 고민해왔다면, 이제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인간답게 노동할 수 있을 것인지, '질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노동자(worker)와 손님(customer) 사이의 균형 (balance)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워커밸'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정당한 서비스와 질 좋은 물건을 제공받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돈이 오가는 사이에 엄연히 사람이 있는데, '돈 값'을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가 아니라 갑질에 불과하다는 것이 워커밸의 기본 취지입니다.


"직원이 당신의 가족일 수 있다" 메시지 전하는 업계

자영업자들뿐만 아니라, 업계도 분주합니다. 한 백화점에서는 직원들에게 감정노동 관리사 자격증을 따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에게 입은 상처나 스트레스를 직원들 스스로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회사가 직원들이 자격증을 취득하는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있습니다.

외식업계, 슈퍼마켓, 백화점 등지에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이 당신의 가족일 수 있다'는 문구를 곳곳에 내걸고 있습니다. 한 업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아빠가) 상담해드릴 예정입니다" 라는 통화 연결음을 따로 제작해 각 콜센터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음을 만든 이후, 콜센터 직원들의 스트레스는 54% 줄었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등의 친절한 말을 남기는 손님이 늘었다고 합니다.

각 유통업계들은 손님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서 직원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직원도 한 사람의 인간이고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호소하고, 갑질은 자제해달라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읍소하고 있는 겁니다. 직원들에게는 이제 무조건 참으라고 요구하기보다, 예의바르지만 정당한 대응은 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감정노동자보호법' 시행 6개월 째. 하지만 성과는…

법적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폭언이나 폭력을 당하면 고용주가 보호와 예방조치를 마련하고, 이것을 어기면 과태료를 무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지난해 10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법 위반으로 적발된 경우는 한 건도 없습니다. 이 법은 노동자가 직접 법 위반을 하는 고용주를 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로서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자리를 걸고 신고를 해야 하는 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 근로자는 법의 보호망에서 빠져 있습니다. 서비스직 직원들의 상당수가 파견직이거나 아르바이트생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직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셈입니다. 법으로 손님들의 매너를 강제하기에는 한계에 부딪힌 상황입니다.


취재를 하면서 편의점 사장님께 물었습니다. "법이 좀 강화되면 이런 문제가 좀 해결될까요?" 사장님은 반문했습니다. "법이 바뀐다고 되겠습니까. 사람들 생각이 그대로면 다 소용 없죠."

이제 사장들도 직원들에게 무조건 참으라고만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손님이 귀한만큼 직원도 귀하다는 생각을 하는 고용주가 늘어났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병원에서, 비행기 안에서, 백화점에서, 마트에서, 콜센터 직원과의 통화에서,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들을 우리 모두는 날마다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시행되고, 매너소비자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제 이런 변화가 문화가 되고, 나아가 자연스런 일상이 되는 사회가 오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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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의 집 귀한 자식’ 건드리지 마세요! 이제는 ‘매너 소비자’ 시대
    • 입력 2019-03-31 08:02:02
    • 수정2019-03-31 19:35:14
    취재K
"남의 집 귀한 아들딸들 건드리지 말고 불만사항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사장놈"

서울 동대문에 있는 한 편의점에서 이 문구를 붙여두고 영업하는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편의점을 운영한 지 4년째, 더 이상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막말을 하는 손님들을 두고 볼 수 없어 계산대 옆에 경고문을 붙였습니다. 혹여 손님들이 불쾌할까, 자신을 '사장놈'이라고 몸소 낮췄습니다.

또 다른 호프집. 이번에는 아예 아르바이트생이 입는 티셔츠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술 취한 손님들이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반말을 하고 메뉴판을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해, 호프집 사장이 주문 제작해서 입힌 티셔츠입니다. 효과는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손님들이 막말을 하려다가도 '멈칫' 하는 걸 느낀다고 합니다.

매너 소비자, 그리고 '워커밸'(worker and customer balance)

전문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소비 트렌드는 ‘매너 소비자’입니다. 소비자들의 도를 넘는 횡포를 막고, 노동자도 손님도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2018년의 중요한 화두는 주 52시간 노동을 필두로 한 '일과 삶의 균형', 이른바 '워라밸'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노동의 '양적인' 개선을 두고 사회가 고민해왔다면, 이제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인간답게 노동할 수 있을 것인지, '질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노동자(worker)와 손님(customer) 사이의 균형 (balance)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워커밸'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정당한 서비스와 질 좋은 물건을 제공받는 것이 소비자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돈이 오가는 사이에 엄연히 사람이 있는데, '돈 값'을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가 아니라 갑질에 불과하다는 것이 워커밸의 기본 취지입니다.


"직원이 당신의 가족일 수 있다" 메시지 전하는 업계

자영업자들뿐만 아니라, 업계도 분주합니다. 한 백화점에서는 직원들에게 감정노동 관리사 자격증을 따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에게 입은 상처나 스트레스를 직원들 스스로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회사가 직원들이 자격증을 취득하는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있습니다.

외식업계, 슈퍼마켓, 백화점 등지에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직원이 당신의 가족일 수 있다'는 문구를 곳곳에 내걸고 있습니다. 한 업체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아빠가) 상담해드릴 예정입니다" 라는 통화 연결음을 따로 제작해 각 콜센터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연결음을 만든 이후, 콜센터 직원들의 스트레스는 54% 줄었고, "좋은 하루 보내라"는 등의 친절한 말을 남기는 손님이 늘었다고 합니다.

각 유통업계들은 손님 대응 매뉴얼을 제작해서 직원들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직원도 한 사람의 인간이고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호소하고, 갑질은 자제해달라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읍소하고 있는 겁니다. 직원들에게는 이제 무조건 참으라고 요구하기보다, 예의바르지만 정당한 대응은 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감정노동자보호법' 시행 6개월 째. 하지만 성과는…

법적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폭언이나 폭력을 당하면 고용주가 보호와 예방조치를 마련하고, 이것을 어기면 과태료를 무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지난해 10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법 위반으로 적발된 경우는 한 건도 없습니다. 이 법은 노동자가 직접 법 위반을 하는 고용주를 신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노동자로서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자리를 걸고 신고를 해야 하는 만큼,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청업체나 협력업체 근로자는 법의 보호망에서 빠져 있습니다. 서비스직 직원들의 상당수가 파견직이거나 아르바이트생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직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셈입니다. 법으로 손님들의 매너를 강제하기에는 한계에 부딪힌 상황입니다.


취재를 하면서 편의점 사장님께 물었습니다. "법이 좀 강화되면 이런 문제가 좀 해결될까요?" 사장님은 반문했습니다. "법이 바뀐다고 되겠습니까. 사람들 생각이 그대로면 다 소용 없죠."

이제 사장들도 직원들에게 무조건 참으라고만 말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손님이 귀한만큼 직원도 귀하다는 생각을 하는 고용주가 늘어났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병원에서, 비행기 안에서, 백화점에서, 마트에서, 콜센터 직원과의 통화에서,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감정노동자들을 우리 모두는 날마다 만나며 살고 있습니다.

감정노동자보호법이 시행되고, 매너소비자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제 이런 변화가 문화가 되고, 나아가 자연스런 일상이 되는 사회가 오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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