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에 깃든 시간의 지층…서용선의 역사풍경화

입력 2019.04.10 (10:44) 수정 2019.04.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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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 24.3×33.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당신과 함께 머무를 수 있다면 나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아요. 새가 되고 싶어요.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새처럼 날고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는 없다 해도, 언젠가 꿈꾸다 보면 그 하늘만큼 물만큼 깊고 푸른 기억을 갖게 되겠죠. 지상에서의 붉은 기억 따윈 헛잠에 꾼 흉몽처럼 아스라이 잊고. 당신, 영원한 나의 임! 기다리세요. 내가 곧 갑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열다섯 어린 나이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 산다는 것이 참으로 모질어 여든두 살에야 그토록 그리던 임의 곁으로 떠나간 여인.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송 씨. 김별아의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2014)은 정순왕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잔인한 시대의 기록입니다. 위에 소개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주는 먹먹함은 생각 외로 깊었답니다. 이보다 더 슬픈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인왕산’, 24.3×33.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인왕산’, 24.3×33.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단종과 안평의 시대를 품은 인왕산

인왕산은 단종의 시대를 품고 있는 중요한 역사의 무대입니다. 단종과 함께 희생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 또한 인왕산 수성동 계곡 위쪽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죠. 안평이 누군가요.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으로 하여금 조선 회화 사상 불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계곡 입구에서 서 있는 안내판만이 먼 옛날 이곳 어디쯤 안평의 거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역사가 깃들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하늘 아래 인왕산은 녹음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서양화가 서용선은 그런 산을 그려왔습니다.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산, 세월의 흔적과 기억을 품은 산. 그래서 이번 전시 제목을 '산을 넘은 시간들'이라 했나 봅니다.

‘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 300×5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 300×5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서용선의 그림은 역사에서 출발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30년을 헤아리는 시간 동안 화가 서용선이 끈질기게 천착해온 화두는 '단종의 죽음'이었습니다. 1986년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친구로부터 장소의 내력을 듣게 된 것이 단종 연작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 터치를 특징으로 하는 서용선 특유의 역사화 - 풍경화가 탄생합니다.

"한때는 왕비였다 평민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인의 처지가 상상되었다. (중략) 노산은 청령포에서 바라보고 있다. 유배된 처지에서, 송씨부인은 동대문 정업원에 들어가 있다. 정업원은 궁궐과 연관된 비구니들의 절이었다 한다. 동대문 근처의 상인들이 송씨부인을 동정했다고 한다." - 2013.12.16 서용선

깊고도 넓은 서용선의 역사화

청령포를 휘감은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의 거리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화가는 그래서 살아서 다시는 재회할 수 없었던 단종과 정순왕후를 한 화폭에 그렸습니다. 마주 보고 있지는 않지만, 아니 너무도 가까워서 더 애달픈 이 젊은 부부의 가련한 운명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은 2009년 '올해의 작가'로 서용선을 선정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깊이를 결여한 피상적인 유희가 난무하고 각광받는 현대미술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와 성찰을 바탕으로 진중한 연마와 탐구를 통해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서용선의 작가적 자세는 오늘날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서 많은 미술인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부여 낙화암’, 72.5×60.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부여 낙화암’, 72.5×60.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화가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과 들을 찾아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지요. 바다에서 온 돌로 된 배에서 검은 소가 튀어나와 산을 오르다 넘어진 자리에 세웠다는 '미황사 설화'가 전해오는 한반도 남쪽 땅끝의 달마산, 망해가는 백제의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 하늘도 물도 붉게 물든 낙화암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서용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선 굵은 감성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회화 본연의 '멋'을 보여주다

화가 서용선을 처음 각인시켜 준 건 2011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연 기념비적인 전시 《코리안 랩소디》에 출품된 <동학농민운동>(2004)이란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화가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들을 모으고 전시회 때마다 찾아가서 작품을 보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게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용선의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행위'가 주는 회화 본연의 멋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철암’, 90.7×116.7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2019‘철암’, 90.7×116.7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2019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적어놓은 연도가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을 그린 <철암>만 해도 2016년에 그리기 시작해 2017년과 2019년에 거듭 손을 봐 완성한 작품이더군요. 역사가 깃든 풍경을 그리면서 시간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화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입니다. '묵직하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기 힘든 서용선의 신작 30여 점이 걸렸습니다. 이 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입니다.

■전시정보
제목: 서용선 - 산을 넘은 시간들
기간: 2019년 5월 3일까지
장소: 서울시 종로구 누크갤러리
작품: 회화 19점, 드로잉 14점, 설치 작품 등 30여 점

‘오대산 노인봉에서’, 72.7×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1·2019‘오대산 노인봉에서’, 72.7×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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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경에 깃든 시간의 지층…서용선의 역사풍경화
    • 입력 2019-04-10 10:44:50
    • 수정2019-04-10 10:46:15
    취재K
  ‘인왕산’, 24.3×33.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당신과 함께 머무를 수 있다면 나는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좋아요. 새가 되고 싶어요.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새처럼 날고 물고기처럼 헤엄칠 수는 없다 해도, 언젠가 꿈꾸다 보면 그 하늘만큼 물만큼 깊고 푸른 기억을 갖게 되겠죠. 지상에서의 붉은 기억 따윈 헛잠에 꾼 흉몽처럼 아스라이 잊고. 당신, 영원한 나의 임! 기다리세요. 내가 곧 갑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열다섯 어린 나이에 혼인해 열여덟에 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 산다는 것이 참으로 모질어 여든두 살에야 그토록 그리던 임의 곁으로 떠나간 여인.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의 비였던 정순왕후 송 씨. 김별아의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2014)은 정순왕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잔인한 시대의 기록입니다. 위에 소개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주는 먹먹함은 생각 외로 깊었답니다. 이보다 더 슬픈 사랑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인왕산’, 24.3×33.5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단종과 안평의 시대를 품은 인왕산

인왕산은 단종의 시대를 품고 있는 중요한 역사의 무대입니다. 단종과 함께 희생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 또한 인왕산 수성동 계곡 위쪽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죠. 안평이 누군가요.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으로 하여금 조선 회화 사상 불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계곡 입구에서 서 있는 안내판만이 먼 옛날 이곳 어디쯤 안평의 거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 역사가 깃들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푸른 하늘 아래 인왕산은 녹음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서양화가 서용선은 그런 산을 그려왔습니다.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산, 세월의 흔적과 기억을 품은 산. 그래서 이번 전시 제목을 '산을 넘은 시간들'이라 했나 봅니다.

‘백성들의 생각_정순왕후’, 300×50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서용선의 그림은 역사에서 출발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30년을 헤아리는 시간 동안 화가 서용선이 끈질기게 천착해온 화두는 '단종의 죽음'이었습니다. 1986년 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친구로부터 장소의 내력을 듣게 된 것이 단종 연작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 터치를 특징으로 하는 서용선 특유의 역사화 - 풍경화가 탄생합니다.

"한때는 왕비였다 평민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던 여인의 처지가 상상되었다. (중략) 노산은 청령포에서 바라보고 있다. 유배된 처지에서, 송씨부인은 동대문 정업원에 들어가 있다. 정업원은 궁궐과 연관된 비구니들의 절이었다 한다. 동대문 근처의 상인들이 송씨부인을 동정했다고 한다." - 2013.12.16 서용선

깊고도 넓은 서용선의 역사화

청령포를 휘감은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의 거리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화가는 그래서 살아서 다시는 재회할 수 없었던 단종과 정순왕후를 한 화폭에 그렸습니다. 마주 보고 있지는 않지만, 아니 너무도 가까워서 더 애달픈 이 젊은 부부의 가련한 운명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은 2009년 '올해의 작가'로 서용선을 선정하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깊이를 결여한 피상적인 유희가 난무하고 각광받는 현대미술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주제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와 성찰을 바탕으로 진중한 연마와 탐구를 통해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서용선의 작가적 자세는 오늘날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으로서 많은 미술인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부여 낙화암’, 72.5×60.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19
화가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과 들을 찾아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렸지요. 바다에서 온 돌로 된 배에서 검은 소가 튀어나와 산을 오르다 넘어진 자리에 세웠다는 '미황사 설화'가 전해오는 한반도 남쪽 땅끝의 달마산, 망해가는 백제의 궁녀들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 하늘도 물도 붉게 물든 낙화암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서용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선 굵은 감성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회화 본연의 '멋'을 보여주다

화가 서용선을 처음 각인시켜 준 건 2011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연 기념비적인 전시 《코리안 랩소디》에 출품된 <동학농민운동>(2004)이란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화가에 대한 이런저런 자료들을 모으고 전시회 때마다 찾아가서 작품을 보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용선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게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용선의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행위'가 주는 회화 본연의 멋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철암’, 90.7×116.7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2019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가 적어놓은 연도가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을 그린 <철암>만 해도 2016년에 그리기 시작해 2017년과 2019년에 거듭 손을 봐 완성한 작품이더군요. 역사가 깃든 풍경을 그리면서 시간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화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흔적입니다. '묵직하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기 힘든 서용선의 신작 30여 점이 걸렸습니다. 이 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전시입니다.

■전시정보
제목: 서용선 - 산을 넘은 시간들
기간: 2019년 5월 3일까지
장소: 서울시 종로구 누크갤러리
작품: 회화 19점, 드로잉 14점, 설치 작품 등 30여 점

‘오대산 노인봉에서’, 72.7×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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