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100년 역사’ 용산기지…일제 침탈 흔적 보존한다

입력 2019.04.10 (16:29) 수정 2019.04.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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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주둔지에서 미군 주둔지로…굴곡진 백년 역사 담긴 '미군기지'

대한민국 심장부인 서울, 그 중에서도 정중앙에 1백여 년 동안 사실상 '남의 땅'이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주한미군의 주둔 기지가 자리 잡은 용산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 캠프 코이너, 캠프 킴 등 미군기지 면적을 모두 합치면 243만 제곱미터에 달하는데요. 서울 용산구 전체 면적의 10분의 1이 넘습니다.

하지만, 용산이 미군기지 이전에 일제 통치의 핵심인 일본군 기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실제로 용산기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2대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용산구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해서 일본군사령부를 건설한 것인데요.

지금으로 치면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대교 북단, 서빙고와 남산, 삼각지를 잇는 무려 1천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이때의 강제수용으로 용산에 있던 대촌, 신촌 등 옛 마을들은 모두 사라졌고요.

일본군사령부에는 총독관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 병영과 군수창고, 사격장, 연병장까지 각종 군사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 통치의 심장부였던 셈이죠.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광복이 찾아온 이후에도 일본군이 쓰던 건물 대부분은 주인만 바뀐 채 군사시설로 다시 이용됐는데요. 1945년 9월에 미24군단 예하 7사단이 인천상륙 이후에 용산기지에 머물렀고요. 1952년 2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용산기지를 미군에 정식으로 공여했습니다.

일본군사령부가 방공작전실로 쓰던 건물은 미7사단이 벙커로 쓰다가 현재는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사우스포스트 벙커가 됐습니다.

현재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이 쓰고 있는 건물은 1098년 완공된 일본 육군장교들의 숙소였습니다. 해방직후에는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군 대표단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 고초 겪은 일본군 위수감옥 그대로 남아

사법권을 빼앗아간 일제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죄수들을 가두던 위수감옥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건물입니다. 역시 일부가 아직 남아있는데, 현재도 미군이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위수감옥은 당시 항일운동을 벌이던 독립운동가들도 거쳐 간 곳인데요. 의병으로 경기북부에서 전투를 벌이며 대일항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강기동 선생(姜基東, 1884. 3. 5 ~ 1911. 4. 17)이 그런 예입니다.


강기동 선생은 무장투쟁을 위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붙잡혔고 서울으로 압송된 뒤에 용산 위수감옥에 투옥됐는데요. 1911년 4월 17일 오전 8시에 용산 일본군 주둔지의 형해장에서 총살 당해 순국했습니다. 당시 매일신보 1911년 4월 19일자 지면에도 같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용산 미군기지에 남아있는 또 다른 일제의 흔적은 기지 곳곳에 만개한 벚꽃인데요. 직접 가보니 봄철을 맞아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군부대에 화사한 활기를 불어넣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벚꽃들은 당시 주둔했던 일본군이 심어놓은 것인데요. 아름다운 벚꽃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일본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던 민족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미군 기지 내 기존 건물 81동 보존 검토

용산미군기지에는 현재 모두 975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남겨 놓은 건물과 미군이 새로 지은 건물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용산 미군기지에 국가공원을 추진 중인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말 외부 업체에 용역을 맡겨 기존 건축물에 대해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역사적 가치를 평가한 뒤 새롭게 조성될 국가공원에 건축물을 남겨둘지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역을 맡은 건축사무소 이로재의 평가 결과 기존 건축물 975동 가운데 81동은 존치하고, 53동은 평가를 일단 보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요.

평가에 참여했던 함은하 건축가는 "자연과 문화, 역사를 회복이라는 용산 국가공원의 개념에 맞춰서 건축물을 평가했다"고 밝혔습니다. 함 건축가는 또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물이 간직한 이야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도 아울러 고려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이같은 용역 결과를 토대로 각계각층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존치 건축물 대상을 최종 확정할 계획입니다.

남은 과제는 결국 이전과 반환이 얼마나 신속하게 이뤄지느냐일 텐데요. 미군이 이전 완료 시점을 확답하지 않은 데다, SOFA 규정에 따른 반환 협상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환협상에는 현재 시설물 이전을 포함해 오염 정화 등 민감한 이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 반환이 완료된 용산 미군기지 인근 유엔군사령부 부지를 통해 오염정화에 얼마나 큰 비용이 들지 가늠해 볼 수 있는데요. 조사 결과 주거기준의 8배가 넘는 석유계총탄화수소(TPH)와 불소 등의 오염이 발견돼 LH가 4월부터 100억 원을 들여 오염 정화 작업에 착수한 상황입니다.

유엔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면적이 넓은 용산 미군기지의 경우 토양의 유류오염이 심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토양 오염 정화 등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으로 전망됩니다. 시민들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완전 개방까지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민족의 상처 치유하는 '힐링명소'로 거듭날까

'용산미군기지온전히되찾기주민모임'의 김은희 대표는 "공원이 만들어질 때까지 1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며 "아프고 상처가 있는 땅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던 장소인데 제대로 반환되어서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생태평화공원으로 시민들이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상처받은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용산이 이제는 민족의 아픔을 보듬고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는 국가공원으로 거듭나길 바라봅니다.

(자료 출처 : 용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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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곡진 100년 역사’ 용산기지…일제 침탈 흔적 보존한다
    • 입력 2019-04-10 16:29:29
    • 수정2019-04-10 16:29:59
    취재K
일본군 주둔지에서 미군 주둔지로…굴곡진 백년 역사 담긴 '미군기지'

대한민국 심장부인 서울, 그 중에서도 정중앙에 1백여 년 동안 사실상 '남의 땅'이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주한미군의 주둔 기지가 자리 잡은 용산입니다. 이곳에 위치한 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 캠프 코이너, 캠프 킴 등 미군기지 면적을 모두 합치면 243만 제곱미터에 달하는데요. 서울 용산구 전체 면적의 10분의 1이 넘습니다.

하지만, 용산이 미군기지 이전에 일제 통치의 핵심인 일본군 기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실 겁니다.


실제로 용산기지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2대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용산구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해서 일본군사령부를 건설한 것인데요.

지금으로 치면 원효대교 북단에서 한강대교 북단, 서빙고와 남산, 삼각지를 잇는 무려 1천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이때의 강제수용으로 용산에 있던 대촌, 신촌 등 옛 마을들은 모두 사라졌고요.

일본군사령부에는 총독관저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 병영과 군수창고, 사격장, 연병장까지 각종 군사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 통치의 심장부였던 셈이죠.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광복이 찾아온 이후에도 일본군이 쓰던 건물 대부분은 주인만 바뀐 채 군사시설로 다시 이용됐는데요. 1945년 9월에 미24군단 예하 7사단이 인천상륙 이후에 용산기지에 머물렀고요. 1952년 2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용산기지를 미군에 정식으로 공여했습니다.

일본군사령부가 방공작전실로 쓰던 건물은 미7사단이 벙커로 쓰다가 현재는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사우스포스트 벙커가 됐습니다.

현재 주한 미합동군사업무단이 쓰고 있는 건물은 1098년 완공된 일본 육군장교들의 숙소였습니다. 해방직후에는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군 대표단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 고초 겪은 일본군 위수감옥 그대로 남아

사법권을 빼앗아간 일제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죄수들을 가두던 위수감옥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건물입니다. 역시 일부가 아직 남아있는데, 현재도 미군이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위수감옥은 당시 항일운동을 벌이던 독립운동가들도 거쳐 간 곳인데요. 의병으로 경기북부에서 전투를 벌이며 대일항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강기동 선생(姜基東, 1884. 3. 5 ~ 1911. 4. 17)이 그런 예입니다.


강기동 선생은 무장투쟁을 위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붙잡혔고 서울으로 압송된 뒤에 용산 위수감옥에 투옥됐는데요. 1911년 4월 17일 오전 8시에 용산 일본군 주둔지의 형해장에서 총살 당해 순국했습니다. 당시 매일신보 1911년 4월 19일자 지면에도 같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용산 미군기지에 남아있는 또 다른 일제의 흔적은 기지 곳곳에 만개한 벚꽃인데요. 직접 가보니 봄철을 맞아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삭막해 보일 수 있는 군부대에 화사한 활기를 불어넣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벚꽃들은 당시 주둔했던 일본군이 심어놓은 것인데요. 아름다운 벚꽃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일본의 압제에 시달려야 했던 민족의 아픔이 자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미군 기지 내 기존 건물 81동 보존 검토

용산미군기지에는 현재 모두 975동의 건물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남겨 놓은 건물과 미군이 새로 지은 건물을 다 포함한 것입니다.

용산 미군기지에 국가공원을 추진 중인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말 외부 업체에 용역을 맡겨 기존 건축물에 대해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역사적 가치를 평가한 뒤 새롭게 조성될 국가공원에 건축물을 남겨둘지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역을 맡은 건축사무소 이로재의 평가 결과 기존 건축물 975동 가운데 81동은 존치하고, 53동은 평가를 일단 보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요.

평가에 참여했던 함은하 건축가는 "자연과 문화, 역사를 회복이라는 용산 국가공원의 개념에 맞춰서 건축물을 평가했다"고 밝혔습니다. 함 건축가는 또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건물이 간직한 이야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도 아울러 고려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이같은 용역 결과를 토대로 각계각층의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존치 건축물 대상을 최종 확정할 계획입니다.

남은 과제는 결국 이전과 반환이 얼마나 신속하게 이뤄지느냐일 텐데요. 미군이 이전 완료 시점을 확답하지 않은 데다, SOFA 규정에 따른 반환 협상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환협상에는 현재 시설물 이전을 포함해 오염 정화 등 민감한 이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 반환이 완료된 용산 미군기지 인근 유엔군사령부 부지를 통해 오염정화에 얼마나 큰 비용이 들지 가늠해 볼 수 있는데요. 조사 결과 주거기준의 8배가 넘는 석유계총탄화수소(TPH)와 불소 등의 오염이 발견돼 LH가 4월부터 100억 원을 들여 오염 정화 작업에 착수한 상황입니다.

유엔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면적이 넓은 용산 미군기지의 경우 토양의 유류오염이 심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토양 오염 정화 등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으로 전망됩니다. 시민들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완전 개방까지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민족의 상처 치유하는 '힐링명소'로 거듭날까

'용산미군기지온전히되찾기주민모임'의 김은희 대표는 "공원이 만들어질 때까지 1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며 "아프고 상처가 있는 땅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던 장소인데 제대로 반환되어서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생태평화공원으로 시민들이 안전하고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상처받은 민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용산이 이제는 민족의 아픔을 보듬고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는 국가공원으로 거듭나길 바라봅니다.

(자료 출처 : 용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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