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K] 이승만이 본 대한민국의 기원은?

입력 2019.04.10 (18:02) 수정 2019.04.10 (18:0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시작됐다는 주장의 핵심 키워드는 이승만과 헌법이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소집돼 제헌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주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발언과 헌법의 기원을 통해 이 주장을 검증해봤다.


"3.1혁명에 궐기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의 함성 이후 헌법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헌장을 발표한다.
30년 후, 1948년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밝힌다.
이 전문의 정신은 현행 헌법의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로 이어진다.


1919년을 계승·재건한 1948년 헌법을 탄생시킨 의회의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제헌의회 의장인 이승만이 공들인 건 무엇보다 제헌 헌법의 전문이었다. 1948년 7월 1일 이승만은 헌법 독회 중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내 생각은 총강 전의 전문 이것이 긴요한 일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국시, 국체가 어떻다 하는 것이 표시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어 "우리가 헌법 벽두에 전문에 더 써 넣을 것은 '우리들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 재건을 하기로 함'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제의하는 것입니다." 라며 "이것이 나의 요청이며 또 부탁"이라고강조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탄생했고, 1948년 당시는 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했다. 이승만의 당시 발언들은 그가 국가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을 무엇보다 시급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1919년에 시작됐다.

먼저 대한민국을 국호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의회에서는 과연 대한민국이 국호로 적절한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됐다. 의원들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의장이 돼 제헌의회를 개시할 때부터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선언했다. 1919년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대한민국 원년을 선포한 데 따른 것이다. 한 의원은 이미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선언한 점을 근거로 대한민국 국호 논쟁을 정리하자고 하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은 기미년 9월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다. 그 전에는 한성정부의 대통령(집정관총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시원은 4월 11일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였다. 또 헌법 첫 머리에 오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은 9월 임시정부 헌법에는 없으며 4월 상해 임정이 선포한 헌장에서 비롯됐다.

'대한민국 30년' 논쟁은 8월 5일 국회에서 또 이어졌다. 7월 24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30년을 선언한데 따른 것이다. 심지어 위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결국 신익희 의장이 마무리를 지어 이 논쟁의 결정을 보류하자고 했다. 그만큼 논쟁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계승과 재건을 중시한 셈이다.

'혁명'은 포기...헌법 전문에 매달린 이승만


심지어 자신이 주장하던 '3.1혁명'이란 표현도 반대가 생기자 별 다른 토론없이 정정하며 헌법 전문의 통과를 추진한다. 7월 7일 조국현 의원은 '혁명'이라는 건 국내적인 일이라며 일본 정부에 대한 '항쟁'이 맞는 표현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바로 자신이 써왔던 혁명이라는 표현을 정정한다.

"지금 말씀에 대해서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말을 내가 찬성합니다. 혁명이라면 우리 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놓는 것은 혁명이라는 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말은 좋으나 거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이어 이승만은 "그 기미년의 민주 정신에 아무 다른 계획이 없고 문구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다른 얘기가 없고 …, 맨 벽두에 내놀 것이 필요한 것은 기미년의 우리 민주정부를 수립해 가지고 국가를 지금 와서 우리가 재건해 나간다는 것을 넣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재건'이란 표현 모순되지 않는다"...'대한민국 30년'에 대통령 취임

이승만이 추진한 헌법 전문을 두고 이재형 의원이 "다소 모순이 있다."며 질의했다.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그 다음에 가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문구를 보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과 재건한다는 민주독립국가와 연관이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차라리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재건'이란 표현을 빼자고 제의했다.

이 질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전문에 "별로 모순될 것이 없을 것 같다"면서 "더들 말씀 마시고 가부 작정하시기 바란다."며 회의를 마친다. 7월 17일 헌법이 발표되고 7일 후 이승만은 본인의 선언대로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하고 통일 조국을 추진했다. 때문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측에는 국가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늘날 '건국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이승만이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계승·재건에 집중한 이유라는 분석다.

※참고 문헌
국회 제1대 국회 제1회 제1차~제40차 회의록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팩트체크K] 이승만이 본 대한민국의 기원은?
    • 입력 2019-04-10 18:02:17
    • 수정2019-04-10 18:02:54
    팩트체크K
대한민국이 1948년에 시작됐다는 주장의 핵심 키워드는 이승만과 헌법이다. 1948년 제헌 국회가 소집돼 제헌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토대로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면서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주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의 발언과 헌법의 기원을 통해 이 주장을 검증해봤다.


"3.1혁명에 궐기해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의 함성 이후 헌법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헌장을 발표한다.
30년 후, 1948년 제헌헌법은 전문에서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밝힌다.
이 전문의 정신은 현행 헌법의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로 이어진다.


1919년을 계승·재건한 1948년 헌법을 탄생시킨 의회의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제헌의회 의장인 이승만이 공들인 건 무엇보다 제헌 헌법의 전문이었다. 1948년 7월 1일 이승만은 헌법 독회 중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내 생각은 총강 전의 전문 이것이 긴요한 일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국시, 국체가 어떻다 하는 것이 표시될 것입니다."
이승만은 이어 "우리가 헌법 벽두에 전문에 더 써 넣을 것은 '우리들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1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 재건을 하기로 함'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제의하는 것입니다." 라며 "이것이 나의 요청이며 또 부탁"이라고강조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1919년에 탄생했고, 1948년 당시는 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했다. 이승만의 당시 발언들은 그가 국가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을 무엇보다 시급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1919년에 시작됐다.

먼저 대한민국을 국호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의회에서는 과연 대한민국이 국호로 적절한가를 두고 논란이 제기됐다. 의원들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의장이 돼 제헌의회를 개시할 때부터 대한민국 30년이라고 선언했다. 1919년 임시정부를 수립하며 대한민국 원년을 선포한 데 따른 것이다. 한 의원은 이미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선언한 점을 근거로 대한민국 국호 논쟁을 정리하자고 하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은 기미년 9월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다. 그 전에는 한성정부의 대통령(집정관총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시원은 4월 11일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였다. 또 헌법 첫 머리에 오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은 9월 임시정부 헌법에는 없으며 4월 상해 임정이 선포한 헌장에서 비롯됐다.

'대한민국 30년' 논쟁은 8월 5일 국회에서 또 이어졌다. 7월 24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대한민국 30년을 선언한데 따른 것이다. 심지어 위헌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결국 신익희 의장이 마무리를 지어 이 논쟁의 결정을 보류하자고 했다. 그만큼 논쟁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계승과 재건을 중시한 셈이다.

'혁명'은 포기...헌법 전문에 매달린 이승만


심지어 자신이 주장하던 '3.1혁명'이란 표현도 반대가 생기자 별 다른 토론없이 정정하며 헌법 전문의 통과를 추진한다. 7월 7일 조국현 의원은 '혁명'이라는 건 국내적인 일이라며 일본 정부에 대한 '항쟁'이 맞는 표현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바로 자신이 써왔던 혁명이라는 표현을 정정한다.

"지금 말씀에 대해서 혁명이라는 것이 옳은 문구가 아니라는 말을 내가 찬성합니다. 혁명이라면 우리 나라 정부를 전복하자는 것인데 원수의 나라에 와서 있는 것을 뒤집어놓는 것은 혁명이라는 게 그릇된 말인데 '항쟁'이라는 말은 좋으나 거기다 좀 더 노골적으로 '독립운동'이라고 그러면 어떱니까?"

이어 이승만은 "그 기미년의 민주 정신에 아무 다른 계획이 없고 문구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다른 얘기가 없고 …, 맨 벽두에 내놀 것이 필요한 것은 기미년의 우리 민주정부를 수립해 가지고 국가를 지금 와서 우리가 재건해 나간다는 것을 넣는 것"이라고 다시 강조했다.

"'재건'이란 표현 모순되지 않는다"...'대한민국 30년'에 대통령 취임

이승만이 추진한 헌법 전문을 두고 이재형 의원이 "다소 모순이 있다."며 질의했다.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그 다음에 가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는 문구를 보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과 재건한다는 민주독립국가와 연관이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차라리 독립국가 건설에 있어서 '재건'이란 표현을 빼자고 제의했다.

이 질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전문에 "별로 모순될 것이 없을 것 같다"면서 "더들 말씀 마시고 가부 작정하시기 바란다."며 회의를 마친다. 7월 17일 헌법이 발표되고 7일 후 이승만은 본인의 선언대로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당시 김구는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하고 통일 조국을 추진했다. 때문에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측에는 국가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늘날 '건국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이승만이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의 계승·재건에 집중한 이유라는 분석다.

※참고 문헌
국회 제1대 국회 제1회 제1차~제40차 회의록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