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침덧·배뭉침…들어봤나요? 임신의 실체를 ②

입력 2019.04.14 (18:45) 수정 2019.04.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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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기사] 오로·침덧·배뭉침…들어봤나요? 임신의 실체를 ①

송 씨는 지난해 1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트위터에 '임신일기'라는 이름으로 임신·출산·육아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을 헤집는 걱정과 널뛰는 호르몬으로 인한 몸의 괴로움을 구체화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송 씨의 기록이 다른 사람에게는 '경악'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신일기를 쓰는 동안 많은 분들이 제 일기를 보시면서 경악을 하셨어요. 아주 새로운 사실을 목도했다는 듯이요. 인류의 역사는 여성이 아기를 낳은 역사가 아니고서는 시작조차 못해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라요."

■ "모성애로 극복하라며 실제 경험은 무시...차별·멸시 바뀌지 않는 이유"

송 씨는 자신이 배우자와 충분히 논의해 임신을 선택했을 뿐, 임신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무지와 차별, 멸시까지 떠안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 스스로 임신 중에 겪는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임신 자체를 인생의 실패처럼 여기고 여성을 공격하는 데에 빌미가 될 수는 없다는 게 송 씨의 입장입니다.

기사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 요청을 할 때에도, 송 씨는 여성들의 경험이 피해자의 언어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우려를 여러 차례 드러냈습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경험은 평면적이지 않아요. 임신 당사자의 성격이나 체력, 일상의 모습에 따라 천차만별이고요. 제 이야기가 다른 모든 사람의 경험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길 바랍니다."

대신 송 씨는 우리 사회가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신을 하고 나니, 사회는 저라는 존재는 모두 무시한 채 ‘임산부’로만 호명하더라고요. 임신 중에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모성애로 극복하고, 그 몫을 혼자서만 감당하라는 사회적 강요가 실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하는 임부가 회사에서 겪는 고충이나, 대중교통 같은 공공 장소에서 당하는 멸시, 임부를 차별하고 존중하지 않는 문화 역시 개선할 필요가 없어지거든요."


■ "'제 몫은 못 하면서 요구만 하는 존재' 취급...인식이 제도 못 쫓아가"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활동하는 이한나(36)씨는 2014년 첫 아이를 낳은 뒤 이제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임신을 겪으며 느낀 사회·제도적 변화가 있는지 묻자, 이 씨는 "출산휴가나 출산 지원금 등은 조금이나마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긴 한데, 출산을 장려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인식은 어떨까?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던 이 씨는 "별로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임신·출산과 관련해서 우리나라가 제도적으로 낙후되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도는 굉장히 좋은데, 그 제도가 주는 권리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좀 강한 것 같아요."

이 씨는 우리 사회가 임산부를 '제 몫은 다하지 못하면서, 뭔가를 요구하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지난 9달 동안 직장에서, 대중교통에서, 일상에서 이 씨가 받아야 했던 취급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이 있다고는 하지만...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게 임산부 혐오를 주장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사회 인식이 오히려 제도를 못 따라가는 게 아닐까요?" 이 씨는 이 기사를 읽을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당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성 입장에선 남의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임신·출산과 무관하지 않은 거잖아요. 동료 시민으로서 임산부를 대할 때에도 그 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 "훈수 두지 말고 쳐다보지 말고...말로만 '국위선양' 대신 실질적 배려를"

마찬가지로 시민들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A씨는 "그냥 놔달라"고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쓸데없이 태아 건강이나 태교법에 훈수를 두거나, 갑자기 배를 만지거나, 낯선 사람이 위아래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 따위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말로는 '국위선양 한다', '좋은 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왜 그렇게 임신부가 실질적인 배려를 못 받는지 생각을 해봤는데...결국에는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게 정말 배만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임산부가 겪는 변화가 어떤 건지 사람들이 보다 많이 알아야 임산부 입장을 배려할 수 있고,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1일, 두 명의 헌법 재판관은 '우리 모두 태아였다'는 문장으로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의 서두를 열었습니다. 만일 두 남성 재판관이 '우리는 한 번도 여성이었던 적 없다'거나 '우리는 결코 임신해 본 적이 없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다면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임신도, 아이를 낳는 일도, 임신을 멈추는 일도 모두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 봐야 하는 건 '우리는 과연 임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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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로·침덧·배뭉침…들어봤나요? 임신의 실체를 ②
    • 입력 2019-04-14 18:45:06
    • 수정2019-04-15 09:12:28
    취재K
[연관 기사] 오로·침덧·배뭉침…들어봤나요? 임신의 실체를 ①

송 씨는 지난해 1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트위터에 '임신일기'라는 이름으로 임신·출산·육아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머릿속을 헤집는 걱정과 널뛰는 호르몬으로 인한 몸의 괴로움을 구체화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송 씨의 기록이 다른 사람에게는 '경악'이 되기도 했습니다.

"임신일기를 쓰는 동안 많은 분들이 제 일기를 보시면서 경악을 하셨어요. 아주 새로운 사실을 목도했다는 듯이요. 인류의 역사는 여성이 아기를 낳은 역사가 아니고서는 시작조차 못해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라요."

■ "모성애로 극복하라며 실제 경험은 무시...차별·멸시 바뀌지 않는 이유"

송 씨는 자신이 배우자와 충분히 논의해 임신을 선택했을 뿐, 임신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무지와 차별, 멸시까지 떠안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성 스스로 임신 중에 겪는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고통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임신 자체를 인생의 실패처럼 여기고 여성을 공격하는 데에 빌미가 될 수는 없다는 게 송 씨의 입장입니다.

기사 취지를 설명하고 인터뷰 요청을 할 때에도, 송 씨는 여성들의 경험이 피해자의 언어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우려를 여러 차례 드러냈습니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경험은 평면적이지 않아요. 임신 당사자의 성격이나 체력, 일상의 모습에 따라 천차만별이고요. 제 이야기가 다른 모든 사람의 경험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길 바랍니다."

대신 송 씨는 우리 사회가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신을 하고 나니, 사회는 저라는 존재는 모두 무시한 채 ‘임산부’로만 호명하더라고요. 임신 중에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모성애로 극복하고, 그 몫을 혼자서만 감당하라는 사회적 강요가 실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하는 임부가 회사에서 겪는 고충이나, 대중교통 같은 공공 장소에서 당하는 멸시, 임부를 차별하고 존중하지 않는 문화 역시 개선할 필요가 없어지거든요."


■ "'제 몫은 못 하면서 요구만 하는 존재' 취급...인식이 제도 못 쫓아가"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에서 활동하는 이한나(36)씨는 2014년 첫 아이를 낳은 뒤 이제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임신을 겪으며 느낀 사회·제도적 변화가 있는지 묻자, 이 씨는 "출산휴가나 출산 지원금 등은 조금이나마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긴 한데, 출산을 장려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인식은 어떨까?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하던 이 씨는 "별로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임신·출산과 관련해서 우리나라가 제도적으로 낙후되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도는 굉장히 좋은데, 그 제도가 주는 권리를 그대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좀 강한 것 같아요."

이 씨는 우리 사회가 임산부를 '제 몫은 다하지 못하면서, 뭔가를 요구하는 불편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지난 9달 동안 직장에서, 대중교통에서, 일상에서 이 씨가 받아야 했던 취급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일 겁니다.

"지하철에 임산부 배려석이 있다고는 하지만...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게 임산부 혐오를 주장하는 데 쓰이기도 하고. 사회 인식이 오히려 제도를 못 따라가는 게 아닐까요?" 이 씨는 이 기사를 읽을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당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성 입장에선 남의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임신·출산과 무관하지 않은 거잖아요. 동료 시민으로서 임산부를 대할 때에도 그 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 "훈수 두지 말고 쳐다보지 말고...말로만 '국위선양' 대신 실질적 배려를"

마찬가지로 시민들에게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을 때 A씨는 "그냥 놔달라"고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쓸데없이 태아 건강이나 태교법에 훈수를 두거나, 갑자기 배를 만지거나, 낯선 사람이 위아래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 따위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말로는 '국위선양 한다', '좋은 일 한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왜 그렇게 임신부가 실질적인 배려를 못 받는지 생각을 해봤는데...결국에는 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게 정말 배만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임산부가 겪는 변화가 어떤 건지 사람들이 보다 많이 알아야 임산부 입장을 배려할 수 있고,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택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1일, 두 명의 헌법 재판관은 '우리 모두 태아였다'는 문장으로 낙태죄가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의 서두를 열었습니다. 만일 두 남성 재판관이 '우리는 한 번도 여성이었던 적 없다'거나 '우리는 결코 임신해 본 적이 없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했다면 결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임신도, 아이를 낳는 일도, 임신을 멈추는 일도 모두 여성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 봐야 하는 건 '우리는 과연 임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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