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침덧·배뭉침…들어봤나요? 임신의 실체를 ①

입력 2019.04.14 (18:45) 수정 2019.04.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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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재 결정문 속 '임신 상태라는 표지'…. 그런데, 그게 뭔가요?

지난 12일, 헌법재판소는 66년 만에 낙태를 한 여성과 의사를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현행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합헌 의견을 낸 이는 2명, 조용호, 이종석 재판관입니다. 자기 낙태죄와 의사 낙태죄 조항 모두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명한 이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삶에 불편한 요소가 생기면 언제든지 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사고에 따라 낙태를 허용한다면 (...) 일반적인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 (중략)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출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위와 같은 헌법 정신에도 맞는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하여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태아를 살려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 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태아를 살리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요. 그런데 먼저, '임신 상태'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웩' 몇 번 하다가 힘 좀 주면 끝? 현실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

트위터에서 '임신을했다'는 계정으로 활동하는 A씨는 임신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너무 미화된 게 많잖아요. 드라마에서 보면 갑자기 '우웩' 몇 번 하다가 화장실 다녀오면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 '우리 아기 예쁜 아기' 하다가 힘 좀 주면 나오고. 병원에 찾아가도 '원래 임신하면 그렇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같은 말밖에 안 해주고."

임신의 실체는 이렇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는 A씨. 흔히 말하는 '임신 막달'인 A씨는 지난 10달간 신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찾아왔다고 강조했습니다. 쓰고 독한 양주를 위에 들이붓는 듯한 속 쓰림, 숙취가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입덧, 새벽에도 서너 번은 깨서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불편함. 숨이 턱턱 막혀 어느 자세로 누워도 한 시간 이상 유지할 수 없는 만삭 상태,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기분 변화까지.

"사실 전 기형 상태인 것 같아요. 인간의 몸에 배가 이렇게 나와서 다른 생명을 품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잖아요. 정상이라면 내가 이제까지 해왔던 생활들을 기본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점점 너무 힘들어지고 일상생활 유지가 안 되니까..."


이제까지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 신체에 한꺼번에 몰려올 때의 불안함. 발톱을 깎고 양말을 갈아신고, 혼자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처럼 당연하던 일들을 더는 할 수 없게 될 때 느끼는 우울함. 임산부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A씨는 '사회는 관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비물이 많아진다거나 하는 세세한 변화가 되게 많아서 의사 선생님께 이유를 물어보면 몰라요. 그분들도 '원래 임신이 그런 거예요',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애는 이래요.' 하면서 아이 이야기만 하시거든요. 이 시기에 태아는 눈썹이 나고 털이 나고, 눈 색깔이 변하고... 아이에 대한 정보는 무지막지하지만 정작 임산부는 병원에서 참으라는 말만 듣거나, 먹어도 되는 약이 뭔지 하나하나 직접 검색해서 찾아봐야 해요."

■ 유튜브 속 '출산 후기'·웹툰 '아기 낳는 만화'..."학교 성교육보다 나아요."

사실 A씨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는 이른바 가임기 여성으로 분류되는 제게도 생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임신하면 겨드랑이와 젖꼭지 부분이 새까맣게 착색된다는 것부터 침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잠도 못 자고 침을 뱉어야 할 정도라는 침덧, 잠이 끝없이 온다는 잠덧, 빈속이 울렁거려 오히려 먹어야 편해진다는 먹덧 등 입덧 증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 등은 모두 최근에야 알게 된 것들입니다.

'임신 전에는 이런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변화를 나만 겪는 줄 알고 말도 못하고 끙끙댔다'며 정보 부족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흔한데요. 그래서인지 요새는 임신·출산 정보가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 잡는 모습도 보입니다. 유튜브에서 '출산 후기'를 검색하면 연예인이나 인터넷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영상 수십 개가 뜨고요. 웹툰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특히 2017년부터 네이버에서 연재하다 책으로 출간된 쇼쇼 작가의 웹툰 '아기낳는 만화'가 대표적인데요. 댓글난에는 '작가님 웹툰이 학교에서 해주는 성교육보다 훨씬 좋다', '정말 이렇게 현실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줄을 잇습니다.

피임법으로 '질외사정' 소개하고 분량도 적어...여성은 '모체' 취급만

그렇다면 우리 교과서는 임신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서울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중고등학교 '기술·가정' 교과서 10종을 살펴봤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피임 성공률이 매우 떨어져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아예 피임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질외 사정법을 피임법으로 버젓이 소개해 놓은 교과서도 있었고요. 수정부터 착상, 출산 과정을 단 두 쪽에 걸쳐 가르치면서 여성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은 교과서, 아기 옷을 미리 빨아 두고 산후조리원을 결정하는 등 출산 전후 준비 과정을 모두 여성 혼자 하도록 그린 교과서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 임신 과정을 겪는 여성을 계속해서 '모체'로만 부르거나, '여성의 생식 기관은 생명을 만드는 중요한 기관이므로 생식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문장을 싣는 등 여성의 몸을 재생산 수단으로만 보는 듯한 표현도 문제였는데요.

특히 놀라웠던 건 중학교 교과서는 2~3장, 고등학교 교과서는 4~5장 안팎에서 임신·출산에 대한 설명이 모조리 끝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직접 교과서를 살펴본 A씨 역시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임신 증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각종 증상에 대해 간략히 열거만 돼 있을 뿐 '이럴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대처법이 함께 실리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임신은 여성의 일이긴 하지만, 여성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져 올해부터 인구 자연 감소가 시작된 사회라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는 일은 더욱 중요할 겁니다. 자신이 직접 겪을 일에 대해 주체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을뿐더러, 다른 구성원들도 임신 당사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임신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도 모릅니다." 트위터 구독자 수가 만 5천 명을 넘는 '임신일기' 계정 운영자 송해나 씨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약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강력하다면 임부의 많은 고통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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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4 18:45:07
    • 수정2019-04-15 0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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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재 결정문 속 '임신 상태라는 표지'…. 그런데, 그게 뭔가요?

지난 12일, 헌법재판소는 66년 만에 낙태를 한 여성과 의사를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현행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합헌 의견을 낸 이는 2명, 조용호, 이종석 재판관입니다. 자기 낙태죄와 의사 낙태죄 조항 모두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명한 이유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신의 삶에 불편한 요소가 생기면 언제든지 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사고에 따라 낙태를 허용한다면 (...) 일반적인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 (중략)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출산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위와 같은 헌법 정신에도 맞는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하여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태아를 살려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 상태'라는 표지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태아를 살리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요. 그런데 먼저, '임신 상태'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웩' 몇 번 하다가 힘 좀 주면 끝? 현실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

트위터에서 '임신을했다'는 계정으로 활동하는 A씨는 임신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너무 미화된 게 많잖아요. 드라마에서 보면 갑자기 '우웩' 몇 번 하다가 화장실 다녀오면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 '우리 아기 예쁜 아기' 하다가 힘 좀 주면 나오고. 병원에 찾아가도 '원래 임신하면 그렇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같은 말밖에 안 해주고."

임신의 실체는 이렇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는 A씨. 흔히 말하는 '임신 막달'인 A씨는 지난 10달간 신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찾아왔다고 강조했습니다. 쓰고 독한 양주를 위에 들이붓는 듯한 속 쓰림, 숙취가 끝없이 계속되는 듯한 입덧, 새벽에도 서너 번은 깨서 화장실을 가야 하는 불편함. 숨이 턱턱 막혀 어느 자세로 누워도 한 시간 이상 유지할 수 없는 만삭 상태,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널뛰는 기분 변화까지.

"사실 전 기형 상태인 것 같아요. 인간의 몸에 배가 이렇게 나와서 다른 생명을 품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잖아요. 정상이라면 내가 이제까지 해왔던 생활들을 기본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점점 너무 힘들어지고 일상생활 유지가 안 되니까..."


이제까지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 신체에 한꺼번에 몰려올 때의 불안함. 발톱을 깎고 양말을 갈아신고, 혼자서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처럼 당연하던 일들을 더는 할 수 없게 될 때 느끼는 우울함. 임산부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A씨는 '사회는 관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분비물이 많아진다거나 하는 세세한 변화가 되게 많아서 의사 선생님께 이유를 물어보면 몰라요. 그분들도 '원래 임신이 그런 거예요', '그럴 수도 있죠, 그렇지만 애는 이래요.' 하면서 아이 이야기만 하시거든요. 이 시기에 태아는 눈썹이 나고 털이 나고, 눈 색깔이 변하고... 아이에 대한 정보는 무지막지하지만 정작 임산부는 병원에서 참으라는 말만 듣거나, 먹어도 되는 약이 뭔지 하나하나 직접 검색해서 찾아봐야 해요."

■ 유튜브 속 '출산 후기'·웹툰 '아기 낳는 만화'..."학교 성교육보다 나아요."

사실 A씨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는 이른바 가임기 여성으로 분류되는 제게도 생소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임신하면 겨드랑이와 젖꼭지 부분이 새까맣게 착색된다는 것부터 침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잠도 못 자고 침을 뱉어야 할 정도라는 침덧, 잠이 끝없이 온다는 잠덧, 빈속이 울렁거려 오히려 먹어야 편해진다는 먹덧 등 입덧 증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 등은 모두 최근에야 알게 된 것들입니다.

'임신 전에는 이런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변화를 나만 겪는 줄 알고 말도 못하고 끙끙댔다'며 정보 부족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흔한데요. 그래서인지 요새는 임신·출산 정보가 하나의 콘텐츠로 자리 잡는 모습도 보입니다. 유튜브에서 '출산 후기'를 검색하면 연예인이나 인터넷 유명인사들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영상 수십 개가 뜨고요. 웹툰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특히 2017년부터 네이버에서 연재하다 책으로 출간된 쇼쇼 작가의 웹툰 '아기낳는 만화'가 대표적인데요. 댓글난에는 '작가님 웹툰이 학교에서 해주는 성교육보다 훨씬 좋다', '정말 이렇게 현실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줄을 잇습니다.

피임법으로 '질외사정' 소개하고 분량도 적어...여성은 '모체' 취급만

그렇다면 우리 교과서는 임신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서울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중고등학교 '기술·가정' 교과서 10종을 살펴봤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피임 성공률이 매우 떨어져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아예 피임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질외 사정법을 피임법으로 버젓이 소개해 놓은 교과서도 있었고요. 수정부터 착상, 출산 과정을 단 두 쪽에 걸쳐 가르치면서 여성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는 단 한 줄도 쓰지 않은 교과서, 아기 옷을 미리 빨아 두고 산후조리원을 결정하는 등 출산 전후 준비 과정을 모두 여성 혼자 하도록 그린 교과서 등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 임신 과정을 겪는 여성을 계속해서 '모체'로만 부르거나, '여성의 생식 기관은 생명을 만드는 중요한 기관이므로 생식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문장을 싣는 등 여성의 몸을 재생산 수단으로만 보는 듯한 표현도 문제였는데요.

특히 놀라웠던 건 중학교 교과서는 2~3장, 고등학교 교과서는 4~5장 안팎에서 임신·출산에 대한 설명이 모조리 끝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직접 교과서를 살펴본 A씨 역시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 임신 증상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각종 증상에 대해 간략히 열거만 돼 있을 뿐 '이럴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대처법이 함께 실리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임신은 여성의 일이긴 하지만, 여성 혼자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져 올해부터 인구 자연 감소가 시작된 사회라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는 일은 더욱 중요할 겁니다. 자신이 직접 겪을 일에 대해 주체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을뿐더러, 다른 구성원들도 임신 당사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임신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도 모릅니다." 트위터 구독자 수가 만 5천 명을 넘는 '임신일기' 계정 운영자 송해나 씨 역시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약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강력하다면 임부의 많은 고통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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