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훈의 시사본부] 패럴림픽 울보캡틴 “편견없이 대해준 친구들 덕분”

입력 2019.04.20 (07:00) 수정 2019.04.2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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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 장애인 아이스하키 동메달과 성화봉송의 기억, 아직도 엊그제같아
- 2살 때 류머티스관절염 진단, 20대때 골수염으로 번져 살기 위해 다리 절단
- 500만 등록 장애인 중 90%가 중도 장애. 힘들어도 현실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 학창시절 늘 웃는 얼굴...편견없이 함께 축구해준 친구들 덕분에 운동에 입문한 듯
- 장애인들 ‘스포츠’ 통해 세상살이에 자신감 얻어. 지도자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장애인의 날 기획인터뷰
■ 방송시간 : 4월 19일(금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한민수 선수 (前 장애인아이스하키 대표팀 주장)



▷ 오태훈 : 지난해 평창 패럴림픽 때 아이스하키 동메달 결정전 혹시 기억하십니까?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우리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 당시에 엉엉 울었던 한 분이 계신데요. 바로 한민수 선수입니다. 오태훈의 시사본부 오늘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한민수 : 안녕하세요?

▷ 오태훈 : 우리나라 아이스하키 패럴림픽에서 동메달을 따신 분, 그때 대표팀 주장하셨나요?

▶ 한민수 : 네, 맞습니다.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 오태훈 : 썰매스키라고도 하는데 먼저 장애인 아이스하키가 어떻게 하는 건지부터 좀 여쭐게요.

▶ 한민수 : 저희는 썰매하키라고 그래서 예전에는 슬레이지하키라는 명칭을 가졌었는데요. 2017년도 강릉 세계선수권대회부터는 파라 아이스하키라고 명칭이 바뀌었고요. 말 그대로 썰매를 타고 장애인이 아이스하키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오태훈 : 평창 패럴림픽 때 성화봉송 주자로 뛰신 분입니다, 이분이. 흔히 말하는 짤이라고 하는 게 많이 돌아다녀요. 언덕 위를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상당히 많은 분들께서 감동스럽다, 울컥한다고 많이들 기록을 남겨주시던데 그때 기억나시죠?

▶ 한민수 : 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벌써 1년이 지났는데요.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엊그제 같고 또 그때 그 상황들이 굉장히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주변 관중분들의 환호성을 저는 그 당시에는 듣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인들이 현장에서 있으면서 찍어준 영상을 보면서 응원의 힘 때문에 또 그 일도 마무리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오태훈 : 한민수 선수, 18년간 장애인 아이스하키 대표팀으로 활동을 했고 또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주장으로 은퇴를 했고요. 18년간의 선수 시절, 돌아보면 어떠십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 한민수 : 뭐든지 지나고 나면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아요. 2000년도에 창당한 멤버로서 3번의 올림픽 만에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는데요. 빠르다면 빠르지만 많은 희노애락들이 있었고 그리고 꿈의 무대에서 제가 원하는 또 동메달을 획득해서 너무 기분이 좋고요. 지금은 지도자로서 아이스하키를 다시 파라 아이스하키를 보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경기 끝나고 나서 은반 위에서 엉엉 목놓아 우시더라고요. 그때 또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내려오셔서 같이 포옹하고 함께 울어준 그 영상도 제가 봤는데 왜 이렇게 우신 거예요, 그때?

▶ 한민수 : 지금은 웃고 있지만 사실 그 무대가 마지막 제 은퇴 무대였어요.

▷ 오태훈 : 아, 마지막 경기였군요.

▶ 한민수 : 그리고 창단 멤버로서 맏형으로서 그 무대를 메달로 마무리하다 보니 주마등처럼 희노애락이 다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저만 운 줄 알았더니 다 울었더라고요.

▷ 오태훈 : 참 역사적이고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전체로 봤을 때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그러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선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나오더라고요. 생활고에 대한 걱정을 말씀하신 인터뷰를 좀 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선수 생활을 은퇴하시고 다른 길을 가고 계시는데 돈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소원이 없었을 것 같다, 이런 고백. 한데 이 고백이 상당수의 장애인 선수들의 또 그러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거든요.

▶ 한민수 : 예, 맞습니다. 제가 파라 아이스하키만은 18년 정도 했고요. 그전에 역도까지 하면 한 23~24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죠. 많이 좋아지고 또 하계 종목 같은 경우에 개인 종목들은 실업팀도 많이 만들어지고 운동에 전념을 하다보니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서 좋은 성적들을 내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 파라 아이스하키 부문은 지금 현재 실업팀이 강원도청팀 한 곳밖에 없어요. 그것도 그 도청팀이 없었다면 저희가 동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제 종목을 보면 파라 아이스하키가 더 성장할 수 있으려면 또 하나의 실업팀이 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 오태훈 : 그렇죠. 경쟁을 같이하다 보면...

▶ 한민수 : 네, 시너지 효과도 나고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텐데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직장 생활하면서 운동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다 보면 은퇴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겠느냐? 실업팀이 모든 게 답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사실 저희가 비장애인 스포츠처럼 유소년부터 성장해서 순차적으로 이렇게 은퇴를 하고 하는 게 아니라 장애는 어느 순간 오잖아요.

▷ 오태훈 : 갑자기 나에게 닥칠 수도 있죠.

▶ 한민수 : 그래서 가정을 꾸리다가 다친 분들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많다 보니까 그분들이 생활이 보장이 안 되면 운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많이 어려움으로 있기 때문에 제가 실업팀에 대한 부분을 강조했었던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은퇴 이후에 지도자 생활을 하시겠다고 했던 것을 제가 봤습니다. 지금 지도자 생활하고 계시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쪽으로 또...

▶ 한민수 :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작년 패럴림픽 끝나고 강원도청 소속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선진하키를 배우기 위해서 바로 은퇴를 하면서 직장도 관두면서 미국으로 무작정 하키 연수를 떠났어요. 그래서 좀 더 국내에 물론 자격증은 있었는데 더 하키를 배워서 돌아왔는데 그리고 또 국내에서도 계속 멈추지 않고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하는 전문가 과정, 리더십 과정도 수료를 했고요. 그런데 아직 사실 실업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거처를 못 찾고 있고요. 그래서 지금 다음 시즌, 국가대표 코치로 지원하려고 강연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앞서 말씀해 주셨던 경제적 안정이 되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한민수 : 네, 맞습니다.

▷ 오태훈 : 선수이기 이전에 또 한 가정의 가장이십니다. 두 딸의 아빠시고요. 가족들이 뭐라고 해요, 요즘에?

▶ 한민수 :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어요. 훈련이 끝나고 집에 와 있으면 큰딸이 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1년에 300일 나가계시는 아빠 오셨네.”라는 말이 그러니까 20년 가까이...

▷ 오태훈 : 무섭다.

▶ 한민수 : 선수 생활하면서 실업팀 생활하면서 합숙소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 말이 기분 나쁘게 얘기한 건 아닌데 뭔가 내가 가장으로서 가족들 희생이 많이 따르는구나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데 요즘에는 좀 더 가족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저희 잠시 교통정보 듣고 와서 계속해서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교통정보>

▷ 오태훈 : 아이스하키 동메달리스트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본질적인 질문도 드려볼까 합니다. 후천적 장애인이시라고 들었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좀 말씀해 주신다면요?

▶ 한민수 : 저 같은 경우에는 보통 태어나서 돌이 되면 걷잖아요. 그런데 제가 걷지를 못했대요. 그래서 왜 그러지, 좀 더 기다려보자 했는데도 2살 가까이 돼도 못 걸으니 병원에도 가고 그랬더니 류마티스관절염이라는 병명을 받은 거예요.

▷ 오태훈 : 아이가?

▶ 한민수 : 그러니까요, 저도 좀 이해가 잘 안 됐는데 굉장히 성숙됐나봐요, 제가. 그래서 병명을 받고 부모님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70년대 초반이니까 좀 많이 의학도 발전하지 못하던 때라 오히려 무속신앙이 더 앞서서 굿을 하고 굿을 했더니 어디 가서 침쟁이한테 침을 맞고 거기 가서 돌팔이를 만나서 또 신경을 건드려서 더 악화가 된 거죠. 그래서 다리를 짚으려고 그러면 아프고 아프고 하니까 안 짚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무릎이 굳어서 클러치를 짚고 결혼하기 전까지 생활을 했었죠.

▷ 오태훈 :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생활에 불편이 계속 있는 상황이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계속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 한민수 : 제가 좀 밝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요즘에 올림픽 이후에 ‘울보 주장’ 이렇게 많이 얘기들 하지만 반면에 웃음이 굉장히 많은데요. 제가 지난 학창시절을 지켜보면 항상 웃고 있더라고요, 그때도.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저희 친구들이 그 당시에 축구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너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저기 앉아 있어, 이런 식이 아니라 승패를 떠나서 같이 어울러지고 같이 차고 편견 없이 저를 대해줬던 거예요. 그렇게 사춘기를 보내니까 제 마음속에서는 나도 이 다음에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잠재된 마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오태훈 : 함께하자는 친구들, 동료들의 그러한 시선과 응원이 더욱더 나를 밝게 만들었군요.

▶ 한민수 : 그 당시 저는 장애를 가지고 생활했다는 생각을 못할 정도로 산에도 대청봉도 올라가고 계단도 나무도 잘 타고 굉장히 활동적으로 에너지 넘치게 지냈는데요.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고 클러치를 짚고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27살 될 때 나도 장애인 스포츠 한번 해볼까, 스스로 제가 마음을 갖게 됐는데요. 결론은 제가 운동을 좋아했었구나라는 생각과 또 장애인인 저를 편견 없이 대해준 우리 친구들 덕분에 제가 자연스럽게 운동을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오태훈 : 그렇게 해서 역도로 시작하신 건가요?

▶ 한민수 : 예, 맞습니다. 너무 잘 아시는데요.

▷ 오태훈 : 다 확인해봐야죠. 역도로서도 상당한 성과, 성적을 거뒀습니다.

▶ 한민수 : 뭐 꼭 그렇지는 않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 오태훈 : 한데 왜 갑자기 아이스하키로 바꾸신 거예요?

▶ 한민수 : 제가 처음 시작한 게 역도로 시작을 하고요. 그다음에 키가 크니까 휠체어 농구도 하게 되고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고 이성근 감독님께서 파라 아이스하키를 창단할 때 팀 운동이니까 농구선수 주축으로 좀 뽑았어요.

▷ 오태훈 : 팀 운동이라.

▶ 한민수 : 그리고 힘 좋은 역도선수도. 그런데 저는 역도랑 농구를 같이했기 때문에 오셔서 아이스하키 좀 해보지 않을래라는 권유를 해 주셔서 솔직히 처음에 거절했어요. 너무 힘들고 재미없더라고요. 그런데 하다보니 그때 일본이 초청해서 갔는데 세계 1위 노르웨이팀하고 일본팀하고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화려하게 멋있는 운동이 이 아이스하키지?’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 농구 접고 역도랑 같이하다가 역도도 내려놓고 파라 아이스하키만 하게 됐는데 이유가 있겠어요. 제가 신체적인 거나 또 저의 체질적인 거나 잘 맞아서 제가 더 좋아해서 선택한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지금도 청취자께서는 지금 모습을 못 보시지만 몸이 상당히 좋으세요.

▶ 한민수 : 감사합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꾸준히 자신을 단련시키고 이런 활동들 그리고 외향적으로 많이 생각을 하고 하기 때문에 장애가 나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들을 많이 해오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절단 경험을 당하신 거 아닙니까?

▶ 한민수 : 맞습니다.

▷ 오태훈 : 그 이야기도 잠깐 해 주시죠.

▶ 한민수 : 저가 큰애가 4개월 때였어요. 결혼한 지 2년 차 됐을 때 태어나서 4개월이 됐을 때인데 무릎에 원래 골수염이 있었어요. 목발을 짚고 어렸을 때부터 생활을 하다 보니까 빗길에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무릅을 계속 부딪힌 거예요, 땅바닥이랑. 물이 찼다 빠졌다 하면서 골수염이 생겼는데 그게 첫 애 4개월 때 허벅지로 전이가 됐어요. 그래서 병원 가면 자르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자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집에서 2주 끙끙 앓다가 허벅지에서 고름이 나와서 이제는 안 되겠다 해서 갔더니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자르실래요, 죽으실래요 그러셔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가장으로서. 그래서 자르는 것을 선택을 해야만 했는데 사실 그때도 자르기 싫었어요. 살을 도려냈어요. 한 달 동안 빨리 상처가 아물어야지 하는 생각만 가지고 잘 몸 관리를 했는데 한 달 지나고 나서 속에서 재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절단을 선택해서 자르게 됐죠.

▷ 오태훈 :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시련이 나에게 올까라는 화도 날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좀 미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셨잖아요. 한데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또 이런 시련이 와요. 그걸 또 이겨내시네요.

▶ 한민수 : 그러게요. 그때 생각이 좀 나는데 지나고 보면 누군가가 그래요, 요즘에. “힘든 시기가 있어요?”, “저는 없는데요.” 이렇게 얘기를 해요, 저도 모르게. “요즘 행복한데요.”라는 말을 하는데 가끔 지나다 보니까 힘든 시기가 있었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요즘에는 제 자신이 힘든 것도 있지만 제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드는데 힘들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이 또한 지나갈 거고 그리고 또 다리 절단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늘 고통보다는... 너무 아프더라고요, 자르고 나니까. 내일이 낫겠지 그런 마음을 갖고 생활하다 보니 이겨낸 건데 결국은 장애를 극복한다, 극복한다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사실 극복도 맞죠. 그런데 극복한다고 해서 절단된 다리가 다시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5천만 인구 중에 500만이 등록 장애인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 그중에 90%가 또 중도 장애인이에요. 그들이 세상 밖으로 못 나오는 이유는 받아들이지 못해서라고 저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바닥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길만 남은 거거든요. 그래서 힘드시겠지만 받아들이고 스포츠를 통해서 세상을 맞이하신다면 세상 사는 데에 좀 자신감을 얻더라고요. 그래서 힘드시겠지만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태훈 : 또 그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는 또 우리 사회가 많이 도와야 되고 우리의 역할을 또 해서 함께하는 그런 사회로 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민수 : 맞습니다. 제가 조금 더 한 말씀 더 드리면 사회가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사실 장애인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될지 모르겠다고 비장애인분들이 많은 얘기들을 하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도와줘야 되는지 그러다 보면 됐다고 오히려 장애인 당사자분들이 더 화내시고 그런 경우를 많이 보다 보니까 당황스럽다고. 사실 경험을 안 하셨는데 어떻게 장애인들의 마음을 아시겠어요. 단지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장애인은 불편한 거거든요. 보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으면 왜 내가 장애인이 됐지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

▷ 오태훈 : 그러네요, 맞습니다.

▶ 한민수 : 불편함만 조금씩 조금씩 해결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진짜 저같이 스탠딩 장애를 갖고 있는 장애인은 많이 도와줄 일들이 없으시겠지만 또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시는 분들은 턱을 낮춰주시면 되고 또 통로가 입구가 작으면 그분들을 위해서 좀 넓혀주시면 되고 욕조가 높으면 낮춰주시면 되고. 장애인분들에게 맞춘 시설이나 어떠한 것들은 비장애인분들은 더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만 좀 해결해준다는 생각으로 도와주시면 서로 자존심 상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저희도 앞으로 그 부분을 좀 더 챙겨보고 더 관심 갖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약속도 드리겠습니다.

▶ 한민수 : 감사합니다.

▷ 오태훈 : 의족을 얼마 전에 훤히 드러내놓고 런웨이에서 모델로 활약한 사진을 봤습니다. 패션쇼는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된 거예요?

▶ 한민수 : 배우 신현준 씨 아시죠?

▷ 오태훈 : 네, 연예가중계 MC.

▶ 한민수 : 맞습니다. 평창 패럴림픽 때 동메달을 획득하니까 저 혼자... 그러니까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외교부에서 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는데.

▷ 오태훈 : 외교부에서요?

▶ 한민수 : 네, 그런데 거기에 배우 신현준 씨도 와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스포츠에서는 이상화 선수하고 제가 자문위원이 됐고요. 배우는 신현준 씨하고 감우성 씨가 나머지는 문화쪽 해서 12명으로 구성이 됐는데 그게 첫 번째 만남은 아니었거든요. 저희가 영화 ‘우썰탄’을... ‘우리는 썰매를 탄다.’ 영화를.

▷ 오태훈 : 영화 주연이시잖아요.

▶ 한민수 : 다큐멘터리 제작을 했을 때 그 당시에 신현준 씨가 저희 영화를 홍보해 주셨어요, 홍보 영상을 만들어주시고요. 그러니까 두 번째 만남이었던 거예요, 자문위원 때가. 그래서 저희들이 형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형님 소리가 나오네요, 그런데.

▷ 오태훈 : 괜찮습니다.

▶ 한민수 : 신현준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거는 운명의 만남이다, 그래서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중에 신현준 씨가 우리 환경이 굉장히 심각하니 잘못된 습관을 바꿔서 환경에 도움이 되는 캠페인을 갖자, 예를 들어서 텀블러를 사용한다든지. 그래서 모인 연예인분들이 한 12명 또 되세요. 그속에서 첫 만남이 박윤희 씨하고 저하고 신현준 씨하고 잡지사에 계신 분하고 해서 네 분이 만났는데 거기서 신현준 씨가 “윤희야, 우리 민수 동생하고 패션쇼 좀 서게 해줘.”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박윤희 씨도 “어? 내 주위에 장애인분들이 없었으면 함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그게 계기가 돼서 저도 흔쾌히 승낙을 했죠.

▷ 오태훈 : 떨리지 않았어요?

▶ 한민수 : 엄청 떨렸어요. 이게 진짜 국가대표 올림픽 나갈 때보다 10배는 더 떨렸던 것 같아요.

▷ 오태훈 :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게 원래 제일 힘든 일입니다.

▶ 한민수 : 맞습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민수 선수처럼 예기치 않은 장애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상황이 오면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야 하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좀 저희 청취자들께 하실 말씀 있으실 것 같습니다.

▶ 한민수 : 제가 은퇴 후에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가졌지만 또 하나 장애 인식 개선 강연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 오태훈 : 강연가?

▶ 한민수 : 예, 그 이유가 어떤 영리를 떠나서 5천만 인구의 500만이 장애인이고 그리고 중도 장애가 90%잖아요. 그분들이 원해서 장애인 된 거 아니잖아요. 대다수가 교통사고가 굉장히 많은데 다치는 건 순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엎질러진 물은 담기 힘들고요. 그래서 신체 건강함에 감사하시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 이상 편견 없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오태훈 : 끝으로 시간 딱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날카로운 우리 딸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해준 아내에게 음성 편지.

▶ 한민수 : 으아~

▷ 오태훈 : 괜찮아요. 시간드릴게요.

▶ 한민수 : 사랑하는 딸, 큰딸 한소연 또 한소리 그리고 또 사랑하는 저의 집사람 민순자 여러분들의 어떤 희생이 없었으면 제가 이 자리에 메달리스트로서 울보 캡틴 한민수로서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서로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봉 가족 파이팅! 사랑합니다. 제가 지금 봉이라고 얘기한 게 저보고 별명이 봉이래요. 그래서 봉 가족이라고.

▷ 오태훈 : 봉? 봉. 아, 나는 봉이야할 때 봉.

▶ 한민수 : 네, 별로 의미는 없는데. 오늘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이상하네.

▷ 오태훈 : 충분히 저희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잘해 주셨습니다. 오태훈의 시사본부 역경 끝에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동메달리스트가 되셨고 지금은 강연을 통해서 장애인들의 인식 개선에 대해 많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민수 선수와 함께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한민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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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태훈의 시사본부] 패럴림픽 울보캡틴 “편견없이 대해준 친구들 덕분”
    • 입력 2019-04-20 07:00:49
    • 수정2019-04-22 16:35:24
    최영일의 시사본부
- 평창 장애인 아이스하키 동메달과 성화봉송의 기억, 아직도 엊그제같아
- 2살 때 류머티스관절염 진단, 20대때 골수염으로 번져 살기 위해 다리 절단
- 500만 등록 장애인 중 90%가 중도 장애. 힘들어도 현실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 학창시절 늘 웃는 얼굴...편견없이 함께 축구해준 친구들 덕분에 운동에 입문한 듯
- 장애인들 ‘스포츠’ 통해 세상살이에 자신감 얻어. 지도자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것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장애인의 날 기획인터뷰
■ 방송시간 : 4월 19일(금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한민수 선수 (前 장애인아이스하키 대표팀 주장)



▷ 오태훈 : 지난해 평창 패럴림픽 때 아이스하키 동메달 결정전 혹시 기억하십니까?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우리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 당시에 엉엉 울었던 한 분이 계신데요. 바로 한민수 선수입니다. 오태훈의 시사본부 오늘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한민수 : 안녕하세요?

▷ 오태훈 : 우리나라 아이스하키 패럴림픽에서 동메달을 따신 분, 그때 대표팀 주장하셨나요?

▶ 한민수 : 네, 맞습니다. 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 오태훈 : 썰매스키라고도 하는데 먼저 장애인 아이스하키가 어떻게 하는 건지부터 좀 여쭐게요.

▶ 한민수 : 저희는 썰매하키라고 그래서 예전에는 슬레이지하키라는 명칭을 가졌었는데요. 2017년도 강릉 세계선수권대회부터는 파라 아이스하키라고 명칭이 바뀌었고요. 말 그대로 썰매를 타고 장애인이 아이스하키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 오태훈 : 평창 패럴림픽 때 성화봉송 주자로 뛰신 분입니다, 이분이. 흔히 말하는 짤이라고 하는 게 많이 돌아다녀요. 언덕 위를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상당히 많은 분들께서 감동스럽다, 울컥한다고 많이들 기록을 남겨주시던데 그때 기억나시죠?

▶ 한민수 : 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요. 벌써 1년이 지났는데요. 제 마음속에는 아직도 엊그제 같고 또 그때 그 상황들이 굉장히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주변 관중분들의 환호성을 저는 그 당시에는 듣지 못했어요. 그런데 지인들이 현장에서 있으면서 찍어준 영상을 보면서 응원의 힘 때문에 또 그 일도 마무리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오태훈 : 한민수 선수, 18년간 장애인 아이스하키 대표팀으로 활동을 했고 또 동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주장으로 은퇴를 했고요. 18년간의 선수 시절, 돌아보면 어떠십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 한민수 : 뭐든지 지나고 나면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아요. 2000년도에 창당한 멤버로서 3번의 올림픽 만에 힘든 훈련을 이겨내고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는데요. 빠르다면 빠르지만 많은 희노애락들이 있었고 그리고 꿈의 무대에서 제가 원하는 또 동메달을 획득해서 너무 기분이 좋고요. 지금은 지도자로서 아이스하키를 다시 파라 아이스하키를 보급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경기 끝나고 나서 은반 위에서 엉엉 목놓아 우시더라고요. 그때 또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내려오셔서 같이 포옹하고 함께 울어준 그 영상도 제가 봤는데 왜 이렇게 우신 거예요, 그때?

▶ 한민수 : 지금은 웃고 있지만 사실 그 무대가 마지막 제 은퇴 무대였어요.

▷ 오태훈 : 아, 마지막 경기였군요.

▶ 한민수 : 그리고 창단 멤버로서 맏형으로서 그 무대를 메달로 마무리하다 보니 주마등처럼 희노애락이 다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울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저만 운 줄 알았더니 다 울었더라고요.

▷ 오태훈 : 참 역사적이고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전체로 봤을 때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그러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 선수 인터뷰 기사들을 찾아보니까 그런 부분들이 나오더라고요. 생활고에 대한 걱정을 말씀하신 인터뷰를 좀 봤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선수 생활을 은퇴하시고 다른 길을 가고 계시는데 돈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소원이 없었을 것 같다, 이런 고백. 한데 이 고백이 상당수의 장애인 선수들의 또 그러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거든요.

▶ 한민수 : 예, 맞습니다. 제가 파라 아이스하키만은 18년 정도 했고요. 그전에 역도까지 하면 한 23~24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죠. 많이 좋아지고 또 하계 종목 같은 경우에 개인 종목들은 실업팀도 많이 만들어지고 운동에 전념을 하다보니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서 좋은 성적들을 내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저희 파라 아이스하키 부문은 지금 현재 실업팀이 강원도청팀 한 곳밖에 없어요. 그것도 그 도청팀이 없었다면 저희가 동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제 종목을 보면 파라 아이스하키가 더 성장할 수 있으려면 또 하나의 실업팀이 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 오태훈 : 그렇죠. 경쟁을 같이하다 보면...

▶ 한민수 : 네, 시너지 효과도 나고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올 텐데 많은 분들이 그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직장 생활하면서 운동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렇게 되다 보면 은퇴 후에도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않겠느냐? 실업팀이 모든 게 답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사실 저희가 비장애인 스포츠처럼 유소년부터 성장해서 순차적으로 이렇게 은퇴를 하고 하는 게 아니라 장애는 어느 순간 오잖아요.

▷ 오태훈 : 갑자기 나에게 닥칠 수도 있죠.

▶ 한민수 : 그래서 가정을 꾸리다가 다친 분들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많다 보니까 그분들이 생활이 보장이 안 되면 운동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많이 어려움으로 있기 때문에 제가 실업팀에 대한 부분을 강조했었던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은퇴 이후에 지도자 생활을 하시겠다고 했던 것을 제가 봤습니다. 지금 지도자 생활하고 계시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쪽으로 또...

▶ 한민수 :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작년 패럴림픽 끝나고 강원도청 소속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선진하키를 배우기 위해서 바로 은퇴를 하면서 직장도 관두면서 미국으로 무작정 하키 연수를 떠났어요. 그래서 좀 더 국내에 물론 자격증은 있었는데 더 하키를 배워서 돌아왔는데 그리고 또 국내에서도 계속 멈추지 않고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하는 전문가 과정, 리더십 과정도 수료를 했고요. 그런데 아직 사실 실업팀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거처를 못 찾고 있고요. 그래서 지금 다음 시즌, 국가대표 코치로 지원하려고 강연하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앞서 말씀해 주셨던 경제적 안정이 되어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 그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 한민수 : 네, 맞습니다.

▷ 오태훈 : 선수이기 이전에 또 한 가정의 가장이십니다. 두 딸의 아빠시고요. 가족들이 뭐라고 해요, 요즘에?

▶ 한민수 :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어요. 훈련이 끝나고 집에 와 있으면 큰딸이 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1년에 300일 나가계시는 아빠 오셨네.”라는 말이 그러니까 20년 가까이...

▷ 오태훈 : 무섭다.

▶ 한민수 : 선수 생활하면서 실업팀 생활하면서 합숙소 생활을 하다 보니까 그 말이 기분 나쁘게 얘기한 건 아닌데 뭔가 내가 가장으로서 가족들 희생이 많이 따르는구나를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데 요즘에는 좀 더 가족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저희 잠시 교통정보 듣고 와서 계속해서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교통정보>

▷ 오태훈 : 아이스하키 동메달리스트 한민수 선수와 함께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본질적인 질문도 드려볼까 합니다. 후천적 장애인이시라고 들었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좀 말씀해 주신다면요?

▶ 한민수 : 저 같은 경우에는 보통 태어나서 돌이 되면 걷잖아요. 그런데 제가 걷지를 못했대요. 그래서 왜 그러지, 좀 더 기다려보자 했는데도 2살 가까이 돼도 못 걸으니 병원에도 가고 그랬더니 류마티스관절염이라는 병명을 받은 거예요.

▷ 오태훈 : 아이가?

▶ 한민수 : 그러니까요, 저도 좀 이해가 잘 안 됐는데 굉장히 성숙됐나봐요, 제가. 그래서 병명을 받고 부모님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70년대 초반이니까 좀 많이 의학도 발전하지 못하던 때라 오히려 무속신앙이 더 앞서서 굿을 하고 굿을 했더니 어디 가서 침쟁이한테 침을 맞고 거기 가서 돌팔이를 만나서 또 신경을 건드려서 더 악화가 된 거죠. 그래서 다리를 짚으려고 그러면 아프고 아프고 하니까 안 짚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무릎이 굳어서 클러치를 짚고 결혼하기 전까지 생활을 했었죠.

▷ 오태훈 :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생활에 불편이 계속 있는 상황이었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계속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 한민수 : 제가 좀 밝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요즘에 올림픽 이후에 ‘울보 주장’ 이렇게 많이 얘기들 하지만 반면에 웃음이 굉장히 많은데요. 제가 지난 학창시절을 지켜보면 항상 웃고 있더라고요, 그때도.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저희 친구들이 그 당시에 축구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너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저기 앉아 있어, 이런 식이 아니라 승패를 떠나서 같이 어울러지고 같이 차고 편견 없이 저를 대해줬던 거예요. 그렇게 사춘기를 보내니까 제 마음속에서는 나도 이 다음에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잠재된 마음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 오태훈 : 함께하자는 친구들, 동료들의 그러한 시선과 응원이 더욱더 나를 밝게 만들었군요.

▶ 한민수 : 그 당시 저는 장애를 가지고 생활했다는 생각을 못할 정도로 산에도 대청봉도 올라가고 계단도 나무도 잘 타고 굉장히 활동적으로 에너지 넘치게 지냈는데요.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고 클러치를 짚고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27살 될 때 나도 장애인 스포츠 한번 해볼까, 스스로 제가 마음을 갖게 됐는데요. 결론은 제가 운동을 좋아했었구나라는 생각과 또 장애인인 저를 편견 없이 대해준 우리 친구들 덕분에 제가 자연스럽게 운동을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 오태훈 : 그렇게 해서 역도로 시작하신 건가요?

▶ 한민수 : 예, 맞습니다. 너무 잘 아시는데요.

▷ 오태훈 : 다 확인해봐야죠. 역도로서도 상당한 성과, 성적을 거뒀습니다.

▶ 한민수 : 뭐 꼭 그렇지는 않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 오태훈 : 한데 왜 갑자기 아이스하키로 바꾸신 거예요?

▶ 한민수 : 제가 처음 시작한 게 역도로 시작을 하고요. 그다음에 키가 크니까 휠체어 농구도 하게 되고 두 가지를 병행하고 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고 이성근 감독님께서 파라 아이스하키를 창단할 때 팀 운동이니까 농구선수 주축으로 좀 뽑았어요.

▷ 오태훈 : 팀 운동이라.

▶ 한민수 : 그리고 힘 좋은 역도선수도. 그런데 저는 역도랑 농구를 같이했기 때문에 오셔서 아이스하키 좀 해보지 않을래라는 권유를 해 주셔서 솔직히 처음에 거절했어요. 너무 힘들고 재미없더라고요. 그런데 하다보니 그때 일본이 초청해서 갔는데 세계 1위 노르웨이팀하고 일본팀하고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화려하게 멋있는 운동이 이 아이스하키지?’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때 농구 접고 역도랑 같이하다가 역도도 내려놓고 파라 아이스하키만 하게 됐는데 이유가 있겠어요. 제가 신체적인 거나 또 저의 체질적인 거나 잘 맞아서 제가 더 좋아해서 선택한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지금도 청취자께서는 지금 모습을 못 보시지만 몸이 상당히 좋으세요.

▶ 한민수 : 감사합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꾸준히 자신을 단련시키고 이런 활동들 그리고 외향적으로 많이 생각을 하고 하기 때문에 장애가 나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는다는 것들을 많이 해오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절단 경험을 당하신 거 아닙니까?

▶ 한민수 : 맞습니다.

▷ 오태훈 : 그 이야기도 잠깐 해 주시죠.

▶ 한민수 : 저가 큰애가 4개월 때였어요. 결혼한 지 2년 차 됐을 때 태어나서 4개월이 됐을 때인데 무릎에 원래 골수염이 있었어요. 목발을 짚고 어렸을 때부터 생활을 하다 보니까 빗길에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무릅을 계속 부딪힌 거예요, 땅바닥이랑. 물이 찼다 빠졌다 하면서 골수염이 생겼는데 그게 첫 애 4개월 때 허벅지로 전이가 됐어요. 그래서 병원 가면 자르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자르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집에서 2주 끙끙 앓다가 허벅지에서 고름이 나와서 이제는 안 되겠다 해서 갔더니 그런 심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지금 자르실래요, 죽으실래요 그러셔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가장으로서. 그래서 자르는 것을 선택을 해야만 했는데 사실 그때도 자르기 싫었어요. 살을 도려냈어요. 한 달 동안 빨리 상처가 아물어야지 하는 생각만 가지고 잘 몸 관리를 했는데 한 달 지나고 나서 속에서 재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절단을 선택해서 자르게 됐죠.

▷ 오태훈 :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시련이 나에게 올까라는 화도 날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이 좀 미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셨잖아요. 한데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또 이런 시련이 와요. 그걸 또 이겨내시네요.

▶ 한민수 : 그러게요. 그때 생각이 좀 나는데 지나고 보면 누군가가 그래요, 요즘에. “힘든 시기가 있어요?”, “저는 없는데요.” 이렇게 얘기를 해요, 저도 모르게. “요즘 행복한데요.”라는 말을 하는데 가끔 지나다 보니까 힘든 시기가 있었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요즘에는 제 자신이 힘든 것도 있지만 제 가족들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이 드는데 힘들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거예요, 이 또한 지나갈 거고 그리고 또 다리 절단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늘 고통보다는... 너무 아프더라고요, 자르고 나니까. 내일이 낫겠지 그런 마음을 갖고 생활하다 보니 이겨낸 건데 결국은 장애를 극복한다, 극복한다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사실 극복도 맞죠. 그런데 극복한다고 해서 절단된 다리가 다시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5천만 인구 중에 500만이 등록 장애인으로 제가 알고 있는데 그중에 90%가 또 중도 장애인이에요. 그들이 세상 밖으로 못 나오는 이유는 받아들이지 못해서라고 저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바닥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길만 남은 거거든요. 그래서 힘드시겠지만 받아들이고 스포츠를 통해서 세상을 맞이하신다면 세상 사는 데에 좀 자신감을 얻더라고요. 그래서 힘드시겠지만 받아들이셨으면 좋겠습니다.

▷ 오태훈 : 또 그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는 또 우리 사회가 많이 도와야 되고 우리의 역할을 또 해서 함께하는 그런 사회로 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한민수 : 맞습니다. 제가 조금 더 한 말씀 더 드리면 사회가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사실 장애인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될지 모르겠다고 비장애인분들이 많은 얘기들을 하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도와줘야 되는지 그러다 보면 됐다고 오히려 장애인 당사자분들이 더 화내시고 그런 경우를 많이 보다 보니까 당황스럽다고. 사실 경험을 안 하셨는데 어떻게 장애인들의 마음을 아시겠어요. 단지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장애인은 불편한 거거든요. 보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불편함이 없으면 왜 내가 장애인이 됐지라는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

▷ 오태훈 : 그러네요, 맞습니다.

▶ 한민수 : 불편함만 조금씩 조금씩 해결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진짜 저같이 스탠딩 장애를 갖고 있는 장애인은 많이 도와줄 일들이 없으시겠지만 또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시는 분들은 턱을 낮춰주시면 되고 또 통로가 입구가 작으면 그분들을 위해서 좀 넓혀주시면 되고 욕조가 높으면 낮춰주시면 되고. 장애인분들에게 맞춘 시설이나 어떠한 것들은 비장애인분들은 더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만 좀 해결해준다는 생각으로 도와주시면 서로 자존심 상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오태훈 : 저희도 앞으로 그 부분을 좀 더 챙겨보고 더 관심 갖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약속도 드리겠습니다.

▶ 한민수 : 감사합니다.

▷ 오태훈 : 의족을 얼마 전에 훤히 드러내놓고 런웨이에서 모델로 활약한 사진을 봤습니다. 패션쇼는 어떤 계기로 가시게 된 거예요?

▶ 한민수 : 배우 신현준 씨 아시죠?

▷ 오태훈 : 네, 연예가중계 MC.

▶ 한민수 : 맞습니다. 평창 패럴림픽 때 동메달을 획득하니까 저 혼자... 그러니까 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외교부에서 자문위원으로 위촉을 받았는데.

▷ 오태훈 : 외교부에서요?

▶ 한민수 : 네, 그런데 거기에 배우 신현준 씨도 와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스포츠에서는 이상화 선수하고 제가 자문위원이 됐고요. 배우는 신현준 씨하고 감우성 씨가 나머지는 문화쪽 해서 12명으로 구성이 됐는데 그게 첫 번째 만남은 아니었거든요. 저희가 영화 ‘우썰탄’을... ‘우리는 썰매를 탄다.’ 영화를.

▷ 오태훈 : 영화 주연이시잖아요.

▶ 한민수 : 다큐멘터리 제작을 했을 때 그 당시에 신현준 씨가 저희 영화를 홍보해 주셨어요, 홍보 영상을 만들어주시고요. 그러니까 두 번째 만남이었던 거예요, 자문위원 때가. 그래서 저희들이 형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형님 소리가 나오네요, 그런데.

▷ 오태훈 : 괜찮습니다.

▶ 한민수 : 신현준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거는 운명의 만남이다, 그래서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중에 신현준 씨가 우리 환경이 굉장히 심각하니 잘못된 습관을 바꿔서 환경에 도움이 되는 캠페인을 갖자, 예를 들어서 텀블러를 사용한다든지. 그래서 모인 연예인분들이 한 12명 또 되세요. 그속에서 첫 만남이 박윤희 씨하고 저하고 신현준 씨하고 잡지사에 계신 분하고 해서 네 분이 만났는데 거기서 신현준 씨가 “윤희야, 우리 민수 동생하고 패션쇼 좀 서게 해줘.”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런데 박윤희 씨도 “어? 내 주위에 장애인분들이 없었으면 함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같이 그게 계기가 돼서 저도 흔쾌히 승낙을 했죠.

▷ 오태훈 : 떨리지 않았어요?

▶ 한민수 : 엄청 떨렸어요. 이게 진짜 국가대표 올림픽 나갈 때보다 10배는 더 떨렸던 것 같아요.

▷ 오태훈 :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게 원래 제일 힘든 일입니다.

▶ 한민수 : 맞습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민수 선수처럼 예기치 않은 장애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상황이 오면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야 하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좀 저희 청취자들께 하실 말씀 있으실 것 같습니다.

▶ 한민수 : 제가 은퇴 후에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가졌지만 또 하나 장애 인식 개선 강연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 오태훈 : 강연가?

▶ 한민수 : 예, 그 이유가 어떤 영리를 떠나서 5천만 인구의 500만이 장애인이고 그리고 중도 장애가 90%잖아요. 그분들이 원해서 장애인 된 거 아니잖아요. 대다수가 교통사고가 굉장히 많은데 다치는 건 순간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엎질러진 물은 담기 힘들고요. 그래서 신체 건강함에 감사하시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 이상 편견 없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 오태훈 : 끝으로 시간 딱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날카로운 우리 딸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해준 아내에게 음성 편지.

▶ 한민수 : 으아~

▷ 오태훈 : 괜찮아요. 시간드릴게요.

▶ 한민수 : 사랑하는 딸, 큰딸 한소연 또 한소리 그리고 또 사랑하는 저의 집사람 민순자 여러분들의 어떤 희생이 없었으면 제가 이 자리에 메달리스트로서 울보 캡틴 한민수로서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서로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봉 가족 파이팅! 사랑합니다. 제가 지금 봉이라고 얘기한 게 저보고 별명이 봉이래요. 그래서 봉 가족이라고.

▷ 오태훈 : 봉? 봉. 아, 나는 봉이야할 때 봉.

▶ 한민수 : 네, 별로 의미는 없는데. 오늘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이상하네.

▷ 오태훈 : 충분히 저희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잘해 주셨습니다. 오태훈의 시사본부 역경 끝에 패럴림픽 아이스하키 동메달리스트가 되셨고 지금은 강연을 통해서 장애인들의 인식 개선에 대해 많이 앞장서고 있습니다.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민수 선수와 함께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한민수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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