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임시정부①] 총독부를 발칵 뒤집은 4인의 청년…승강기 운전사 사건

입력 2019.04.24 (10:12) 수정 2019.04.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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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임시정부원들은 장제스 정부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고…(중략)… 용감하여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들을 원조해야 한다."

"공산 비적대장 김일성이 조선과 만주 국경에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여 이들을 격멸한 개가를 올렸다.…(중략)…김일성 산하로 달려가서 독립운동을 하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9년 4월. 조선총독부 청사에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 나눈 대화. 그들은 누구길래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총독부 한가운데서 '위험천만한' 발언을 했던 걸까.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판결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 총독부 청사 '승강기 운전사'로 고용되다

지금의 광화문 자리를 차지했던 조선총독부는 지상 4층 건물이었습니다. 1926년에 완공된 옛 건물이었지만, 내부에는 승강기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승강기는 총독과 정무총감, 경무총감 등 최고위직을 위한 전용 시설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좌측면 설계도와 총독실 실내 설계도(일부). 총독실의 내부에 전용 승강기의 출입문이 보인다. 이와 같은 승강기 운전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총독부 좌측면 설계도와 총독실 실내 설계도(일부). 총독실의 내부에 전용 승강기의 출입문이 보인다. 이와 같은 승강기 운전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 승강기는 수동이었습니다. 출입문을 여닫고, 오르고, 내리는 일에 사람 손이 필요했습니다. 승강기 운전사의 일이었습니다. 업무 속성상 승강기 운전사는 총독과 총감 등을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16~17살 가량의 한국인 청년들이 고용됩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총독부 건물에서 임시정부와 김일성을 입에 올려

승강기 운전사가 된 4인의 청년. 곧바로 대담한 모의에 나섭니다. 한참 진행 중이던 중일전쟁에서 일제가 패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자고 논의합니다. 당시로써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대화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발췌돼 일제 판결문에 기록된 그들의 발언은 항일정신과 반전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1939년 당시는 살벌한 전시 체제였습니다. 일제에 불리한 전황, 패전 소식, 독립운동 등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엄벌 대상이었습니다. 4인의 청년은 총독부 옥상과 휴게실 등 장소를 옮겨가며 모의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일행 중 1명인 최영순은 「지나(중국)사변 정보의 정무총감에게 보내는 비문서」를 빼돌려 은닉하기도 했습니다.

■ 임시정부의 비밀 소재지까지 파악…"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라"

4인의 청년이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고 움직인 흔적은 없습니다. 국내에서 자생한 자발적 임시정부 지지자들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임시정부의 비밀 소재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 대화에서 경천중은 임시정부가 '진강(전장) 부근'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6년 즈음 남경(난징)에 자리 잡습니다. 이른바 '남경(난징) 임정' 시절입니다. 당시 국내에서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임시정부 청사는 남경(난징)이 아닌 진강(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경(난징)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고,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중국 측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남경(난징)에서 활동했지만, 청사는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했습니다. 시라카와는 일본군의 살아있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인물. 일본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임정의 남경(난징) 진입을 허가하면 대대적 폭격을 받을 것이라고 압박했고, 임정은 인근에 있던 진강(전장)에 청사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시정부 연구자 김희곤 안동대 교수(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는 "판결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임정이 진강(전장)에 있던 사실은 국내에서는 거의 몰랐다.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을지 의문이다. 갖고 있던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에 대한 언급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청년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에 이미 보도가 됐지만, 이후의 세세한 활동상에 대한 소식은 국내 전파가 어려웠던 상황. 승강기 운전사 청년들은 뭔지 모를 정보망과 선이 닿았던 걸까요.

■ 판결문으로만 남은 흔적…4명 중 1명만 서훈

하지만 청년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일제에 체포됩니다. 결국,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웠을 법한 정황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관련 사료가 전무한 탓입니다. 만약 일제에 붙잡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존재조차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총독부 승강기 운전사 4인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판결-주문-이유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법원 판결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임을 알 수 있다.총독부 승강기 운전사 4인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판결-주문-이유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법원 판결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남은 건 일제의 판결문뿐입니다. 판결문 속 행적은 독립유공으로 인정됐고, 4인의 청년 중 최명근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다른 3명에 대한 서훈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적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문을 토대로 후속 연구가 시작되길 기대해봅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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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 임시정부①] 총독부를 발칵 뒤집은 4인의 청년…승강기 운전사 사건
    • 입력 2019-04-24 10:12:01
    • 수정2019-04-27 13:47:44
    취재K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임시정부원들은 장제스 정부로부터 상당한 원조를 받고…(중략)… 용감하여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들을 원조해야 한다."

"공산 비적대장 김일성이 조선과 만주 국경에서 일본군과 여러 번 교전하여 이들을 격멸한 개가를 올렸다.…(중략)…김일성 산하로 달려가서 독립운동을 하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시 체제가 가동되던 1939년 4월. 조선총독부 청사에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모여 나눈 대화. 그들은 누구길래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총독부 한가운데서 '위험천만한' 발언을 했던 걸까.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판결문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 총독부 청사 '승강기 운전사'로 고용되다

지금의 광화문 자리를 차지했던 조선총독부는 지상 4층 건물이었습니다. 1926년에 완공된 옛 건물이었지만, 내부에는 승강기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승강기는 총독과 정무총감, 경무총감 등 최고위직을 위한 전용 시설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좌측면 설계도와 총독실 실내 설계도(일부). 총독실의 내부에 전용 승강기의 출입문이 보인다. 이와 같은 승강기 운전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 승강기는 수동이었습니다. 출입문을 여닫고, 오르고, 내리는 일에 사람 손이 필요했습니다. 승강기 운전사의 일이었습니다. 업무 속성상 승강기 운전사는 총독과 총감 등을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16~17살 가량의 한국인 청년들이 고용됩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총독부 건물에서 임시정부와 김일성을 입에 올려

승강기 운전사가 된 4인의 청년. 곧바로 대담한 모의에 나섭니다. 한참 진행 중이던 중일전쟁에서 일제가 패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며,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자고 논의합니다. 당시로써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일성의 항일 활동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대화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발췌돼 일제 판결문에 기록된 그들의 발언은 항일정신과 반전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1939년 당시는 살벌한 전시 체제였습니다. 일제에 불리한 전황, 패전 소식, 독립운동 등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엄벌 대상이었습니다. 4인의 청년은 총독부 옥상과 휴게실 등 장소를 옮겨가며 모의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일행 중 1명인 최영순은 「지나(중국)사변 정보의 정무총감에게 보내는 비문서」를 빼돌려 은닉하기도 했습니다.

■ 임시정부의 비밀 소재지까지 파악…"어떻게 알았을까 깜짝 놀라"

4인의 청년이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고 움직인 흔적은 없습니다. 국내에서 자생한 자발적 임시정부 지지자들로 보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임시정부의 비밀 소재지까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 대화에서 경천중은 임시정부가 '진강(전장) 부근'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6년 즈음 남경(난징)에 자리 잡습니다. 이른바 '남경(난징) 임정' 시절입니다. 당시 국내에서도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임시정부 청사는 남경(난징)이 아닌 진강(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경(난징)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고,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중국 측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남경(난징)에서 활동했지만, 청사는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사망했습니다. 시라카와는 일본군의 살아있는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인물. 일본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임정의 남경(난징) 진입을 허가하면 대대적 폭격을 받을 것이라고 압박했고, 임정은 인근에 있던 진강(전장)에 청사를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시정부 연구자 김희곤 안동대 교수(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는 "판결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 임정이 진강(전장)에 있던 사실은 국내에서는 거의 몰랐다.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었을지 의문이다. 갖고 있던 정보가 매우 정확하다."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에 대한 언급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청년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는 동아일보에 이미 보도가 됐지만, 이후의 세세한 활동상에 대한 소식은 국내 전파가 어려웠던 상황. 승강기 운전사 청년들은 뭔지 모를 정보망과 선이 닿았던 걸까요.

■ 판결문으로만 남은 흔적…4명 중 1명만 서훈

하지만 청년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일제에 체포됩니다. 결국,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웠을 법한 정황이지만, 그들이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관련 사료가 전무한 탓입니다. 만약 일제에 붙잡히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들의 존재조차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총독부 승강기 운전사 4인에 대한 일제 법원의 판결문. 판결-주문-이유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법원 판결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남은 건 일제의 판결문뿐입니다. 판결문 속 행적은 독립유공으로 인정됐고, 4인의 청년 중 최명근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다른 3명에 대한 서훈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적에 대한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판결문을 토대로 후속 연구가 시작되길 기대해봅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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