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그 정도면 안전해”…내부 경고 무시했던 일본 원자력의 종말

입력 2019.04.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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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던 일본에서 한 권의 책이 발간됐다.

'원자력발전 화이트아웃'. 전력 회사와 정부, 정치권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글자 그대로 전력 마피아와 전력 족(族)의 유착 관계와 그 내막을 상세히 파헤친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와카스기 레쓰'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필명. 도쿄대 법대를 나온 현역 관료라고만 공개됐는데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세한 부분까지 묘사되면서 일본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전력 회사가 하청 공사 등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고는 이를 바탕으로 유력한 정치인 혹은 전도유망한 신인 정치인에게 접근해 후원금 등을 건네고 미리 내 편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상화된 수준이었다. 원전 추진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내용도 나오는데, 필자는 정치권과 전력업계의 유착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현실에 기반을 둔 내용이라고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계기로 점점 쇠퇴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원자력 산업계. NHK는 그 쇠퇴의 길에 이 같은 유착 관계, 그리고 폐쇄성이 있다고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전했다.

이어졌던 원전사고…하지만 늘 축소에 급급

일본 원전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 승승장구 하던 때 일본에서는 이른바 안전한 '원전 신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위험을 경고할 만한 사고들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속된 안전성 문제로 결국 폐로가 결정된 고속증식로 몬쥬지속된 안전성 문제로 결국 폐로가 결정된 고속증식로 몬쥬


1995년 차세대 원전으로 주목받던 '몬쥬'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 하지만 당시 전력 회사는 사고의 심각성을 감추기 위해 현장 녹화 화면을 의도적으로 단축해 편집 공개한 것이 드러나 공개 사과하는 등 불신을 초래했다.

이후 1999년 도카이무라에 있는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우라늄 용액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임계 상태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된 작업자 2명이 숨졌다.

또 2004년에는 원전에서의 증기 분출 사고, 2007년 지진에 의한 원전 화재 등 그저 안전하다고만 하기에는 눈에 띄는 사고가 이어졌지만 일본 정부와 사업자는 '안전성은 충분하다'는 주장만 반복했다고 NHK는 전했다.

사고 당시 '몬쥬'의 소장이었던 무카이 가즈오 씨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원전을 멈추는 사태는 피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업계에 팽배했다고 말했다.

"되도록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런 분위기가 굉장히 강했죠. 민간은 경영이라고 하는 부분이 중요하니까요. 위험성을 사회와 제대로 공유됐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전혀 부족했다고 하는 반성이..."

40년 이상 원전에 종사한 기타무라 씨는 사고가 이어질 당시 원전 건설을 추진하던 '일본 원자력 산업협회'에 간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해외 시찰 등의 결과 일본에서도 안전 대책을 더욱 튼실히 해야 한다고 하면 질책이 날아왔다고 한다.

"추가 안전 대책을 세우자고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말이죠. '뭐라고? 이전에 안전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야,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거네'. '자 그럼 앞서 이야기한 것은 거짓말이네!' 등등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죠. 안전성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뭐...되질 않았어요."

원전…안전보다 성장, 수익을 택했던 일본

이 같은 분위는 깨끗한 에너지로 주목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던 이른바 '원전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세계적 추세에 맞춰, 일본 정부가 '국책 사업'으로 원전 수출을 장려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일본 원자력 위원회 곤도 슌스케 전 위원장은 세계에 원전을 팔자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어디까지 리스크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충분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고 반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전력회사의 폐쇄성은 문제를 더욱 곪게 했다. 원전에서 이른바 노심 용해가 일어났지만, 도쿄전력은 2개월간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장의 지시였다는 것도 5년이 다 되도록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이 정보 공개를 원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여겨지지 않는 한 정보는 나오지 않고, 또 묻지도 않죠.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갖도록 하지 않는 거죠(곤도 전 원자력 위원장)."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지 8년이 지난 이번 달에야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 반출 작업이 시작됐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들에 대한 안전성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붙어 있고, 오염토는 후쿠시마 곳곳에 산처럼 쌓여있다.

이 같은 사태를 불러온 이들이 누구인지, 왜 그러했는지 일본은 이를 되씹고 또 되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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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25 07:01:02
    특파원 리포트
2013년 9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던 일본에서 한 권의 책이 발간됐다.

'원자력발전 화이트아웃'. 전력 회사와 정부, 정치권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글자 그대로 전력 마피아와 전력 족(族)의 유착 관계와 그 내막을 상세히 파헤친 책이었다.

작가의 이름은 '와카스기 레쓰'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필명. 도쿄대 법대를 나온 현역 관료라고만 공개됐는데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자세한 부분까지 묘사되면서 일본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전력 회사가 하청 공사 등을 통해 비자금을 마련하고는 이를 바탕으로 유력한 정치인 혹은 전도유망한 신인 정치인에게 접근해 후원금 등을 건네고 미리 내 편으로 만드는 작업은 일상화된 수준이었다. 원전 추진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내용도 나오는데, 필자는 정치권과 전력업계의 유착 시스템에 대한 묘사가 현실에 기반을 둔 내용이라고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자랑했으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계기로 점점 쇠퇴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원자력 산업계. NHK는 그 쇠퇴의 길에 이 같은 유착 관계, 그리고 폐쇄성이 있다고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을 전했다.

이어졌던 원전사고…하지만 늘 축소에 급급

일본 원전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 승승장구 하던 때 일본에서는 이른바 안전한 '원전 신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위험을 경고할 만한 사고들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속된 안전성 문제로 결국 폐로가 결정된 고속증식로 몬쥬

1995년 차세대 원전으로 주목받던 '몬쥬'에서 일어난 화재 사고. 하지만 당시 전력 회사는 사고의 심각성을 감추기 위해 현장 녹화 화면을 의도적으로 단축해 편집 공개한 것이 드러나 공개 사과하는 등 불신을 초래했다.

이후 1999년 도카이무라에 있는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우라늄 용액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임계 상태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된 작업자 2명이 숨졌다.

또 2004년에는 원전에서의 증기 분출 사고, 2007년 지진에 의한 원전 화재 등 그저 안전하다고만 하기에는 눈에 띄는 사고가 이어졌지만 일본 정부와 사업자는 '안전성은 충분하다'는 주장만 반복했다고 NHK는 전했다.

사고 당시 '몬쥬'의 소장이었던 무카이 가즈오 씨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원전을 멈추는 사태는 피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업계에 팽배했다고 말했다.

"되도록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다고 해야 할까, 그런 분위기가 굉장히 강했죠. 민간은 경영이라고 하는 부분이 중요하니까요. 위험성을 사회와 제대로 공유됐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전혀 부족했다고 하는 반성이..."

40년 이상 원전에 종사한 기타무라 씨는 사고가 이어질 당시 원전 건설을 추진하던 '일본 원자력 산업협회'에 간 적이 있다고 회상한다. 해외 시찰 등의 결과 일본에서도 안전 대책을 더욱 튼실히 해야 한다고 하면 질책이 날아왔다고 한다.

"추가 안전 대책을 세우자고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 말이죠. '뭐라고? 이전에 안전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야,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거네'. '자 그럼 앞서 이야기한 것은 거짓말이네!' 등등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죠. 안전성에 있어서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뭐...되질 않았어요."

원전…안전보다 성장, 수익을 택했던 일본

이 같은 분위는 깨끗한 에너지로 주목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던 이른바 '원전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세계적 추세에 맞춰, 일본 정부가 '국책 사업'으로 원전 수출을 장려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일본 원자력 위원회 곤도 슌스케 전 위원장은 세계에 원전을 팔자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어디까지 리스크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충분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다고 반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듯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전력회사의 폐쇄성은 문제를 더욱 곪게 했다. 원전에서 이른바 노심 용해가 일어났지만, 도쿄전력은 2개월간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장의 지시였다는 것도 5년이 다 되도록 공개하지 않았다.

"국민이 정보 공개를 원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한, 여겨지지 않는 한 정보는 나오지 않고, 또 묻지도 않죠.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에, 관심을 갖도록 하지 않는 거죠(곤도 전 원자력 위원장)."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지 8년이 지난 이번 달에야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 반출 작업이 시작됐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들에 대한 안전성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붙어 있고, 오염토는 후쿠시마 곳곳에 산처럼 쌓여있다.

이 같은 사태를 불러온 이들이 누구인지, 왜 그러했는지 일본은 이를 되씹고 또 되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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