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임시정부③] 잇고, 끊고, 잇고, 끊고…‘가정부 불온문서’ 살포 작전

입력 2019.04.26 (07:00) 수정 2019.04.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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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2번지. 교보문고 광화문점 바로 뒷편입니다. 지금은 대형 빌딩이 있는 자리지만, 100년 전 그 곳은 허름한 뒷골목이었습니다. 진일여관(進一旅館)이라는 숙박 시설이 있었습니다.

1919년 9월 하순, 27살 청년 안상길은 진일여관에서 김재봉과 이준태를 만납니다. 셋은 경북 안동 출신의 친구 사이. 김재봉과 이준태는 각각 「만주일보」와 「반도신문」 기자였습니다. 그 만남 뒤 1921년 1월, 안상길 등은 일제에 체포됩니다. 그들은 무엇을 결의했던 걸까요.

■ 임정을 국내에 알리겠다 연락책 자임한 청년

임시정부는 일종의 '망명 정부'였습니다. 외국에 머무는 정부이다 보니 정상적인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임정은 원격 통치를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통신망(교통국)과 행정망(연통제) 등을 구축하려 지속적으로 애썼습니다.

관건은 일제의 눈을 피해 지하에 망을 구축하고 유지할 인력을 모으는 일. 안동 청년 안상길은 그 역할을 자임합니다. 1919년 8월 경, 안상길을 상하이 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경북교통부장'이라는 임명장을 받아옵니다. 경북 지역에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알리고 주요 사항을 보고하는 총괄 책임을 맡게 됩니다.

임시정부가 공식 발간한 신문이다. 1896년 서재필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다른 매체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순한글, 임정의 ‘독립신문’은 국한문 혼용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 발간한 신문이다. 1896년 서재필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다른 매체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순한글, 임정의 ‘독립신문’은 국한문 혼용이었다.

안상길은 임정의 활동상을 담은 다양한 '소식지'를 은밀하게 살포합니다. 대표적인 매체가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관보와 비슷한 「임시정부 공보」, 신한청년당의 기관지인 「신한청년」 등을 몰래 퍼뜨립니다.

일제 입장에서는 명백한 '불온 문서' 살포였습니다. 배포 경로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고 살포 책임자 중 1명이 안상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안상길은 1921년 1월 결국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 안상길은 서훈을 받지 못했다. 그 사연은 말미에.)

안상길 등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 가정부(假政府) 불온문서를 나른 혐의가 인정됐다. 일제는 ‘대한’ 국호를 피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칭했다.안상길 등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 가정부(假政府) 불온문서를 나른 혐의가 인정됐다. 일제는 ‘대한’ 국호를 피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칭했다.

■ '불온문서' 밀반입 1등 공신,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그렇다면, 안상길 등이 살포한 임시정부의 각종 문서는 국내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핵심 경로는 안동현, 지금의 중국 단둥을 거치는 경로였습니다. 위장에는 통조림과 술병이 동원됐습니다.

임정은 일제 경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조력자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중국인을 통해 안동현까지 보내면, 국경을 넘기 직전 문서를 통조림처럼 꾸민 뒤 술통에 넣고 중간 거점인 경성의 한 중국인 집으로 보냈습니다. 경성에서 다시 같은 방법으로 전국 각지로 살포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만든 각종 문서는 지금의 북중 접경 지역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됐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국 단둥 지역이 중국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상하이 임시정부가 만든 각종 문서는 지금의 북중 접경 지역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됐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국 단둥 지역이 중국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경로상 허리였던 안동현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아릴랜드계 영국인입니다. 이름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면서, 사실상 임시정부 교통지국 역할을 떠맡았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는 자발적으로 임정의 불온문서 살포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임정의 비밀 요원들에게 은신처도 제공하고,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도왔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반영(反英) 의식의 연장선에서 반일 의식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 통신망 사실상 붕괴, 임정 영향력 퇴조의 원인

상하이발 '불온문서'를 근절하기 위한 일제의 추적은 집요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영향력 확대를 그만큼 우려했던 겁니다. 안상길과 같은 임정 조력자들이 지하 통신망을 이으면, 끊고, 또 이으면, 또 끊는일이 반복됐습니다.

결국 임정이 구축하려 했던 통신망(교통국)은 1921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무너집다. 그 과정에 옥고를 치러 판결문이 남은 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비록 일제의 경찰력을 버티지 못했지만, 임정의 원격 통치를 돕기 위한 국내 조력이 활발했음은 확인됩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④] "권총을 보여주시오"…자금 확보 고군분투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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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 임시정부③] 잇고, 끊고, 잇고, 끊고…‘가정부 불온문서’ 살포 작전
    • 입력 2019-04-26 07:00:34
    • 수정2019-04-27 13:47:44
    취재K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습니다. 임정은 중국에 있었지만, 국내에 통치망을 구축하려 부단히 애썼습니다. 이를 일제는 끈질기게 추적했습니다. 그 쫓고 쫓긴 흔적은 일제 법원의 판결문으로 남았습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판결문 250여 건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를 발굴해 『우리가 몰랐던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상』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 302번지. 교보문고 광화문점 바로 뒷편입니다. 지금은 대형 빌딩이 있는 자리지만, 100년 전 그 곳은 허름한 뒷골목이었습니다. 진일여관(進一旅館)이라는 숙박 시설이 있었습니다.

1919년 9월 하순, 27살 청년 안상길은 진일여관에서 김재봉과 이준태를 만납니다. 셋은 경북 안동 출신의 친구 사이. 김재봉과 이준태는 각각 「만주일보」와 「반도신문」 기자였습니다. 그 만남 뒤 1921년 1월, 안상길 등은 일제에 체포됩니다. 그들은 무엇을 결의했던 걸까요.

■ 임정을 국내에 알리겠다 연락책 자임한 청년

임시정부는 일종의 '망명 정부'였습니다. 외국에 머무는 정부이다 보니 정상적인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임정은 원격 통치를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통신망(교통국)과 행정망(연통제) 등을 구축하려 지속적으로 애썼습니다.

관건은 일제의 눈을 피해 지하에 망을 구축하고 유지할 인력을 모으는 일. 안동 청년 안상길은 그 역할을 자임합니다. 1919년 8월 경, 안상길을 상하이 임시정부를 스스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경북교통부장'이라는 임명장을 받아옵니다. 경북 지역에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알리고 주요 사항을 보고하는 총괄 책임을 맡게 됩니다.

임시정부가 공식 발간한 신문이다. 1896년 서재필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다른 매체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순한글, 임정의 ‘독립신문’은 국한문 혼용이었다.
안상길은 임정의 활동상을 담은 다양한 '소식지'를 은밀하게 살포합니다. 대표적인 매체가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아울러 지금의 관보와 비슷한 「임시정부 공보」, 신한청년당의 기관지인 「신한청년」 등을 몰래 퍼뜨립니다.

일제 입장에서는 명백한 '불온 문서' 살포였습니다. 배포 경로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고 살포 책임자 중 1명이 안상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안상길은 1921년 1월 결국 경기도 경찰부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 안상길은 서훈을 받지 못했다. 그 사연은 말미에.)

안상길 등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판결문. 가정부(假政府) 불온문서를 나른 혐의가 인정됐다. 일제는 ‘대한’ 국호를 피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칭했다.
■ '불온문서' 밀반입 1등 공신,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그렇다면, 안상길 등이 살포한 임시정부의 각종 문서는 국내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핵심 경로는 안동현, 지금의 중국 단둥을 거치는 경로였습니다. 위장에는 통조림과 술병이 동원됐습니다.

임정은 일제 경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조력자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중국인을 통해 안동현까지 보내면, 국경을 넘기 직전 문서를 통조림처럼 꾸민 뒤 술통에 넣고 중간 거점인 경성의 한 중국인 집으로 보냈습니다. 경성에서 다시 같은 방법으로 전국 각지로 살포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만든 각종 문서는 지금의 북중 접경 지역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됐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국 단둥 지역이 중국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경로상 허리였던 안동현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아릴랜드계 영국인입니다. 이름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을 운영하면서, 사실상 임시정부 교통지국 역할을 떠맡았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는 자발적으로 임정의 불온문서 살포에 적극 가담했습니다. 임정의 비밀 요원들에게 은신처도 제공하고,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도왔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반영(反英) 의식의 연장선에서 반일 의식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 통신망 사실상 붕괴, 임정 영향력 퇴조의 원인

상하이발 '불온문서'를 근절하기 위한 일제의 추적은 집요했습니다. 임시정부의 영향력 확대를 그만큼 우려했던 겁니다. 안상길과 같은 임정 조력자들이 지하 통신망을 이으면, 끊고, 또 이으면, 또 끊는일이 반복됐습니다.

결국 임정이 구축하려 했던 통신망(교통국)은 1921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무너집다. 그 과정에 옥고를 치러 판결문이 남은 이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비록 일제의 경찰력을 버티지 못했지만, 임정의 원격 통치를 돕기 위한 국내 조력이 활발했음은 확인됩니다.



※ 본 기사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한 일제 판결문과 해설집 「판결문에 담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활동」 등을 참고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발굴, 임시정부④] "권총을 보여주시오"…자금 확보 고군분투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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