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리 못 보게 했을까”…‘파업전야’ 29년 만에 정식 개봉

입력 2019.05.0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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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제작진 수배를 알리는 1990년 당시 신문 기사.

영화 '파업전야'가 처음 공개된 건 1990년 3월이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외치던 당시 노태우 정부는 그 해 4월 이 영화를 상영한 대학로 극장 '한마당'을 압수수색하고 필름을 빼앗아갔다. 전남대 상영 당시 경찰은 헬기와 최루탄을 동원해 상영을 가로막았다. 대학가에서 상영회를 열 때마다 학생·노동자들은 영화 감상이 아닌 상영장 사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엄혹한 탄압과 '상영 투쟁' 속에서도 전국에서 약 30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로부터 29년 뒤 '파업전야'는 멀티플렉스를 포함한 전국 27개 상영관에서 정식 개봉했다.

'파업전야'를 만든 영화 집단 '장산곶매'는 각 대학 영화 동아리 출신들이 모여 1988년 결성했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건축학개론'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이후 한국 상업영화의 도약을 이끈 제작사 명필름의 이은 대표를 비롯해 장윤현 감독, 강헌 음악평론가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이들의 첫 작품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오! 꿈의 나라'(1989)다.

이들이 두 번째 작품을 기획하면서 찾은 곳은 인천의 금속공장 단지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전국 공장에서 노동운동이 물결을 타던 때다. 당시 파업에 들어간 부평 공단의 한 사업장 노조의 협조를 받아 촬영을 시작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실제 용광로를 돌리며 현장감 있는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사측이 전기를 끊어버리면 노조원들이 장비를 끌어와 촬영을 도왔다. '한국 영화 최초의 노동 극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파업전야’를 제작한 주역들이 정식 극장 개봉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파업전야’를 제작한 주역들이 정식 극장 개봉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수배 생활 끝에 체포됐던 제작자 이용배 교수는 지난달 15일 서울 CGV 용산점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당시 숨어 지내며 첩보 작전하듯 동료들을 만나곤 했던 생활이 고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그런 와중에도 상영 투쟁에서 영화를 지켜주신 노동자 관객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이처럼 엄혹한 시대 현실에 비춰볼 때 '파업전야'는 노동자들이 사측의 횡포에 맞서 파업 의지를 다진다는 다소 평면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짐작될지 모른다. 영화는 '경계인'이 주인공이다. 극 중 금속공장 노동자 한수는 가난이 싫어 혹독한 잔업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만 하면 집도 마련하고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말 잘 들으면 곧 승진시켜주겠다는 간부의 말에 더 충실하게 일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구사대(파업 등 노조 활동을 막기 위해 회사 측이 결성한 조직) 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화면은 지금 보기에 다소 조악할 수 있지만, 이야기만큼은 2019년 현재에 대입해도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 한수는 사측과 노측 사이에서 고뇌하는 ‘경계인’이다.주인공 한수는 사측과 노측 사이에서 고뇌하는 ‘경계인’이다.

연출을 맡은 장동홍 감독은 "이 영화는 단순하다. 각성하지 못한 한 노동자가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일 뿐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을 뿐인데 왜 그때 (공권력은) 그토록 이 영화를 못 보게 했을까. '도둑 상영'을 할 수밖에 없던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상영할 수 있어 기분이 정말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노동자들이 핍박받던 현실이 지금 얼마나 달라졌나. 외형만 바뀌었을 뿐 본질에서 같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파업전야'가 공개된 지 20여 년 뒤, 명필름은 마트 노동자들의 파업 과정을 담은 영화 '카트'(2014)를 제작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마트 계산원이 파업에 앞장서기까지의 과정이 '파업전야'를 꼭 빼닮았다. 노동자들이 카트를 밀며 전진하는 '카트'의 마지막 장면은 '파업전야'의 오마주(앞선 작품의 명장면을 경의의 표시로 모방하는 것)로 읽힌다. 두 편 모두 동시대 노동 현장의 현실을 충실히 담은 작품이다. "여전히 유효하다"는 장 감독의 말은 수식어에 그치지 않는다. '파업전야'는 한국영상자료원이 2014년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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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그리 못 보게 했을까”…‘파업전야’ 29년 만에 정식 개봉
    • 입력 2019-05-01 14:04:41
    취재K
‘파업전야’ 제작진 수배를 알리는 1990년 당시 신문 기사.

영화 '파업전야'가 처음 공개된 건 1990년 3월이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외치던 당시 노태우 정부는 그 해 4월 이 영화를 상영한 대학로 극장 '한마당'을 압수수색하고 필름을 빼앗아갔다. 전남대 상영 당시 경찰은 헬기와 최루탄을 동원해 상영을 가로막았다. 대학가에서 상영회를 열 때마다 학생·노동자들은 영화 감상이 아닌 상영장 사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엄혹한 탄압과 '상영 투쟁' 속에서도 전국에서 약 30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로부터 29년 뒤 '파업전야'는 멀티플렉스를 포함한 전국 27개 상영관에서 정식 개봉했다.

'파업전야'를 만든 영화 집단 '장산곶매'는 각 대학 영화 동아리 출신들이 모여 1988년 결성했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건축학개론'에 이르기까지 90년대 이후 한국 상업영화의 도약을 이끈 제작사 명필름의 이은 대표를 비롯해 장윤현 감독, 강헌 음악평론가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이들의 첫 작품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오! 꿈의 나라'(1989)다.

이들이 두 번째 작품을 기획하면서 찾은 곳은 인천의 금속공장 단지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전국 공장에서 노동운동이 물결을 타던 때다. 당시 파업에 들어간 부평 공단의 한 사업장 노조의 협조를 받아 촬영을 시작했다.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실제 용광로를 돌리며 현장감 있는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사측이 전기를 끊어버리면 노조원들이 장비를 끌어와 촬영을 도왔다. '한국 영화 최초의 노동 극영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파업전야’를 제작한 주역들이 정식 극장 개봉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수배 생활 끝에 체포됐던 제작자 이용배 교수는 지난달 15일 서울 CGV 용산점에서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감개무량하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당시 숨어 지내며 첩보 작전하듯 동료들을 만나곤 했던 생활이 고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그런 와중에도 상영 투쟁에서 영화를 지켜주신 노동자 관객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이처럼 엄혹한 시대 현실에 비춰볼 때 '파업전야'는 노동자들이 사측의 횡포에 맞서 파업 의지를 다진다는 다소 평면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짐작될지 모른다. 영화는 '경계인'이 주인공이다. 극 중 금속공장 노동자 한수는 가난이 싫어 혹독한 잔업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만 하면 집도 마련하고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말 잘 들으면 곧 승진시켜주겠다는 간부의 말에 더 충실하게 일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구사대(파업 등 노조 활동을 막기 위해 회사 측이 결성한 조직) 편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화면은 지금 보기에 다소 조악할 수 있지만, 이야기만큼은 2019년 현재에 대입해도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 한수는 사측과 노측 사이에서 고뇌하는 ‘경계인’이다.
연출을 맡은 장동홍 감독은 "이 영화는 단순하다. 각성하지 못한 한 노동자가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일 뿐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을 뿐인데 왜 그때 (공권력은) 그토록 이 영화를 못 보게 했을까. '도둑 상영'을 할 수밖에 없던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상영할 수 있어 기분이 정말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노동자들이 핍박받던 현실이 지금 얼마나 달라졌나. 외형만 바뀌었을 뿐 본질에서 같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파업전야'가 공개된 지 20여 년 뒤, 명필름은 마트 노동자들의 파업 과정을 담은 영화 '카트'(2014)를 제작했다. 정규직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던 마트 계산원이 파업에 앞장서기까지의 과정이 '파업전야'를 꼭 빼닮았다. 노동자들이 카트를 밀며 전진하는 '카트'의 마지막 장면은 '파업전야'의 오마주(앞선 작품의 명장면을 경의의 표시로 모방하는 것)로 읽힌다. 두 편 모두 동시대 노동 현장의 현실을 충실히 담은 작품이다. "여전히 유효하다"는 장 감독의 말은 수식어에 그치지 않는다. '파업전야'는 한국영상자료원이 2014년 선정한 한국영화 100선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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