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순위를 지켜라”…‘퀴어축제’ 사수 8일 작전

입력 2019.05.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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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축제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어제(2일) 새벽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성공적으로 집회 신고를 마친 뒤 무지개 현수막을 들고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다음달 1일, 서울광장에서 2019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성소수자 축제)가 열립니다. 20번째를 맞아 이번엔 조금 새로운 코스로 행진하기로 했습니다. 세종대로를 지나 광화문 앞을 돌아 종로대로로 나가는 코스입니다. 내년부터 광화문광장 재조성 공사가 진행된다면, 이번이 광화문 앞 도로를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축제,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신고 접수를 막으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불안해진 주최 측은 서울지방경찰청, 종로경찰서, 남대문경찰서 등 세 곳에서 8일 동안 24시간 노숙을 벌였습니다. 그 치열했던 분투기를 소개합니다.

■ 경찰서 3곳서 486시간 릴레이 노숙…사활을 건 '퀴어축제' 신고 전쟁

서울 종로경찰서의 집회 신고 대기 장소입니다. 각 의자 상단에는 작은 글씨로 1, 2, 3 등의 번호표가 붙어있습니다.서울 종로경찰서의 집회 신고 대기 장소입니다. 각 의자 상단에는 작은 글씨로 1, 2, 3 등의 번호표가 붙어있습니다.

각 경찰서 민원실이나 로비에는 집회 신고를 위한 간이 대기 장소가 있습니다. 의자마다 1, 2, 3 번호가 붙어있기도 하고, 정보과에서 임의로 순서를 부여하기도 하는데요. 이 순서는 집회 신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집회를 신고한 경우 주최 측끼리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데, 이 때 이 순서를 토대로 우선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게 될 경우에는 그 뒷순위부터 대상이 됩니다.

퀴어축제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도 이 '1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세 군데 동시 대기를 결정했습니다. 6월 1일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서는 서울광장을 비롯한 행진 코스를 꼭 사수해야 했습니다. 지난 2015년에도 남대문서 앞에서 10일 동안 기다린 끝에 무사히 서울광장 퀴어축제를 개최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광화문 행진 코스까지 지켜내야 하니 부담이 컸습니다.

경쟁자는 동성애에 반대하는 종교단체들, 그리고 태극기 집회를 여는 보수단체들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 퀴어축제가 열리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먼저 같은 장소에 집회 신고를 할까 봐 걱정됐던 겁니다.

그래서 조직위는 지난달 25일, 경찰 공식 신고가 가능한 5월 2일까지 24시간 내내 대기석을 지켜줄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하려면 2인 1조 체제가 불가피했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상관없으니, 릴레이로 자리를 지켜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는데요. 8일 동안 무려 385명이 릴레이 대기에 동참했습니다.

■ '1순위' 지키려 태극기 부대와 몸싸움…'10분 타이머'까지 도입

지난달 30일, 한 보수단체 회원이 남대문서의 집회 신고 ‘1순위’ 의자에 앉아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지난달 30일, 한 보수단체 회원이 남대문서의 집회 신고 ‘1순위’ 의자에 앉아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대기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시비도 있었습니다. 지난달 30일엔 남대문서에서 물리적인 충돌도 발생했습니다. 퀴어 측이 1순위 자리를 지키다가 새로운 대기자와 교대를 하려는 순간, 2순위 이하 자리에 있던 보수단체 회원들이 몸을 밀치며 1순위 자리에 앉으려 한 겁니다. 이 과정에서 퀴어 측 대기자 2명이 손과 가슴 부근을 다쳤습니다. 폭언도 이어졌습니다.

그 중 한 남성은 심지어 가방에서 쇠사슬을 꺼내 자신을 의자에 묶은 채 1순위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제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죠.

지난달 30일에 벌어진 몸싸움 이후, 남대문서 집회 대기 의자에는 ‘10분 타이머’가 부착됐습니다.지난달 30일에 벌어진 몸싸움 이후, 남대문서 집회 대기 의자에는 ‘10분 타이머’가 부착됐습니다.

결국,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10분 타이머 제도'인데요. 사진처럼 의자마다 타이머를 부착해두고, 10분 동안은 1순위자가 자리를 비워도 후순위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만든 겁니다. 1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은 경우에만 다음 순번 대기자에게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대기자들 간의 새치기와 몸싸움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셈인데, 경찰 관계자는 "수십 년간 집회 신고를 받았지만, 타이머까지 도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 퀴어축제 조직위 "400여 명 동참해 의미 크지만…내년 축제도 고민"

2018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퀴어문화축제 모습입니다.2018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퀴어문화축제 모습입니다.

결국, 퀴어축제 조직위 측의 집회 신고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서울광장 행사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0시 2분에, 일출 시각부터 신고가 가능한 행진의 경우 오전 5시 13분에 신고를 마쳤습니다. 특히 행진 신고는 서울청, 종로서, 남대문서 세 곳 모두에서 1순위로 접수에 성공했습니다.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성총회, 홀리라이프, 샬롬선교회, 예수재단 등 성 소수자 반대 단체들은 퀴어축제가 열릴 서울광장을 에워싸는 형태로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국본, 민초연, 태극기결사대 등 보수단체들도 같은 날 집회 신고를 마쳤습니다. 0시 0분부터 0시 7분까지, 1분 간격으로 신고가 이어진 셈입니다.

이제 남은 건 일정 조율입니다. 경찰은 앞으로 남은 한 달간 단체들끼리 집회 개최 장소와 시간 등을 무리 없이 합의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앞서 말한 우선 순위를 토대로 조율이 진행될 텐데,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분명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반대 단체들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광장에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활보할 수 있느냐"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5월 1일 밤 11시, 남대문경찰서에서 보수단체와 종교단체 관계자들이 퀴어축제 집회 신고 대기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5월 1일 밤 11시, 남대문경찰서에서 보수단체와 종교단체 관계자들이 퀴어축제 집회 신고 대기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4월 25일 정오부터 5월 2일 오전 5시 반까지. 서울지방경찰청, 종로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세 군데를 누적하면 모두 486시간의 대장정이었습니다. 릴레이 대기에 참석한 사람만 모두 385명, 응원 방문을 포함하면 40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매번 반대 목소리에 부딪히는 퀴어 축제지만,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명진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24시간 대기를 진행할 수는 없기에, 대기하면서도 고민이 참 많았고 씁쓸했다"며 "내년에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 지 고민과 숙제가 남은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를 지켜내고, 의미 있는 퍼레이드를 진행하기 위해 400여 분이 현장을 방문해주셨고 참가자 모집 이틀 만에 마감이 됐었다"며 "많은 분이 함께 응원해주시고 노력해주신 것 자체가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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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03 07:00:03
    취재K
퀴어축제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어제(2일) 새벽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성공적으로 집회 신고를 마친 뒤 무지개 현수막을 들고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다음달 1일, 서울광장에서 2019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성소수자 축제)가 열립니다. 20번째를 맞아 이번엔 조금 새로운 코스로 행진하기로 했습니다. 세종대로를 지나 광화문 앞을 돌아 종로대로로 나가는 코스입니다. 내년부터 광화문광장 재조성 공사가 진행된다면, 이번이 광화문 앞 도로를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축제,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신고 접수를 막으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불안해진 주최 측은 서울지방경찰청, 종로경찰서, 남대문경찰서 등 세 곳에서 8일 동안 24시간 노숙을 벌였습니다. 그 치열했던 분투기를 소개합니다.

■ 경찰서 3곳서 486시간 릴레이 노숙…사활을 건 '퀴어축제' 신고 전쟁

서울 종로경찰서의 집회 신고 대기 장소입니다. 각 의자 상단에는 작은 글씨로 1, 2, 3 등의 번호표가 붙어있습니다.
각 경찰서 민원실이나 로비에는 집회 신고를 위한 간이 대기 장소가 있습니다. 의자마다 1, 2, 3 번호가 붙어있기도 하고, 정보과에서 임의로 순서를 부여하기도 하는데요. 이 순서는 집회 신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집회를 신고한 경우 주최 측끼리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데, 이 때 이 순서를 토대로 우선순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게 될 경우에는 그 뒷순위부터 대상이 됩니다.

퀴어축제 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도 이 '1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세 군데 동시 대기를 결정했습니다. 6월 1일 성공적인 행사 개최를 위해서는 서울광장을 비롯한 행진 코스를 꼭 사수해야 했습니다. 지난 2015년에도 남대문서 앞에서 10일 동안 기다린 끝에 무사히 서울광장 퀴어축제를 개최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광화문 행진 코스까지 지켜내야 하니 부담이 컸습니다.

경쟁자는 동성애에 반대하는 종교단체들, 그리고 태극기 집회를 여는 보수단체들이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 퀴어축제가 열리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이 먼저 같은 장소에 집회 신고를 할까 봐 걱정됐던 겁니다.

그래서 조직위는 지난달 25일, 경찰 공식 신고가 가능한 5월 2일까지 24시간 내내 대기석을 지켜줄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화장실에 가거나 식사를 하려면 2인 1조 체제가 불가피했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상관없으니, 릴레이로 자리를 지켜주면 된다는 조건이었는데요. 8일 동안 무려 385명이 릴레이 대기에 동참했습니다.

■ '1순위' 지키려 태극기 부대와 몸싸움…'10분 타이머'까지 도입

지난달 30일, 한 보수단체 회원이 남대문서의 집회 신고 ‘1순위’ 의자에 앉아 쇠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었습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대기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시비도 있었습니다. 지난달 30일엔 남대문서에서 물리적인 충돌도 발생했습니다. 퀴어 측이 1순위 자리를 지키다가 새로운 대기자와 교대를 하려는 순간, 2순위 이하 자리에 있던 보수단체 회원들이 몸을 밀치며 1순위 자리에 앉으려 한 겁니다. 이 과정에서 퀴어 측 대기자 2명이 손과 가슴 부근을 다쳤습니다. 폭언도 이어졌습니다.

그 중 한 남성은 심지어 가방에서 쇠사슬을 꺼내 자신을 의자에 묶은 채 1순위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와서 제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죠.

지난달 30일에 벌어진 몸싸움 이후, 남대문서 집회 대기 의자에는 ‘10분 타이머’가 부착됐습니다.
결국,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바로 '10분 타이머 제도'인데요. 사진처럼 의자마다 타이머를 부착해두고, 10분 동안은 1순위자가 자리를 비워도 후순위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만든 겁니다. 1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은 경우에만 다음 순번 대기자에게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대기자들 간의 새치기와 몸싸움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셈인데, 경찰 관계자는 "수십 년간 집회 신고를 받았지만, 타이머까지 도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 퀴어축제 조직위 "400여 명 동참해 의미 크지만…내년 축제도 고민"

2018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9회 퀴어문화축제 모습입니다.
결국, 퀴어축제 조직위 측의 집회 신고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서울광장 행사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0시 2분에, 일출 시각부터 신고가 가능한 행진의 경우 오전 5시 13분에 신고를 마쳤습니다. 특히 행진 신고는 서울청, 종로서, 남대문서 세 곳 모두에서 1순위로 접수에 성공했습니다.

동성애퀴어축제반대국민대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한성총회, 홀리라이프, 샬롬선교회, 예수재단 등 성 소수자 반대 단체들은 퀴어축제가 열릴 서울광장을 에워싸는 형태로 집회 신고를 했습니다. 국본, 민초연, 태극기결사대 등 보수단체들도 같은 날 집회 신고를 마쳤습니다. 0시 0분부터 0시 7분까지, 1분 간격으로 신고가 이어진 셈입니다.

이제 남은 건 일정 조율입니다. 경찰은 앞으로 남은 한 달간 단체들끼리 집회 개최 장소와 시간 등을 무리 없이 합의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앞서 말한 우선 순위를 토대로 조율이 진행될 텐데,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분명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반대 단체들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 광장에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활보할 수 있느냐"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5월 1일 밤 11시, 남대문경찰서에서 보수단체와 종교단체 관계자들이 퀴어축제 집회 신고 대기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 서울퀴어퍼레이드 집회신고 참여자 제공]
4월 25일 정오부터 5월 2일 오전 5시 반까지. 서울지방경찰청, 종로경찰서, 남대문경찰서 세 군데를 누적하면 모두 486시간의 대장정이었습니다. 릴레이 대기에 참석한 사람만 모두 385명, 응원 방문을 포함하면 400여 명이 함께 했습니다. 매번 반대 목소리에 부딪히는 퀴어 축제지만,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강명진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장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24시간 대기를 진행할 수는 없기에, 대기하면서도 고민이 참 많았고 씁쓸했다"며 "내년에는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할 지 고민과 숙제가 남은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이 행사를 지켜내고, 의미 있는 퍼레이드를 진행하기 위해 400여 분이 현장을 방문해주셨고 참가자 모집 이틀 만에 마감이 됐었다"며 "많은 분이 함께 응원해주시고 노력해주신 것 자체가 아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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