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진 주차장서 하준이 잃은지 19개월, 달라진 건 없다”

입력 2019.05.0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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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현실 같지 않아요. 지금도 왼쪽 손에 잡고 있던 손이 느껴지는 것 같죠."

19개월 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하준이'를 떠나 보낸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린이날, 설렘을 숨길 수 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떠나 보낸 하준이 생각에 아픈 마음을 더 참기 힘듭니다.


사고가 난 건 지난 2017년 10월, 경남 창원에 살던 가족들이 서울랜드로 나들이를 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차 뒤편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있었고, 하준이와 어머니가 차에 내려 기다리는 사이,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경사진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SUV 차량이 미끄러져 내려와 하준이와 어머니를 덮친 겁니다. 사고를 낸 차량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운전자가 변속기를 주행상태 'D'로 놓은 채 시동을 끄고 간 건데, 주차 브레이크도 작동시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만에 소중한 아이, 하준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가 떠나는 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국민 청원을 올리게 됐어요.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를 잃고 하루하루 지내는 게 고통이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건 같은 사고를 막아야 한단 책임감이었습니다. 하준이 어머니 고유미 씨가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청와대 국민청원. 경사진 주차장에 경고 문구를 세우고 차량 보조제동장치를 의무화할 것을 요청했고, 14만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습니다.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 명이 넘진 못했지만, 이례적으로 각종 대책이 쏟아졌습니다.

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017년 11월에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017년 11월에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도로교통법 개정, 국토부·경찰청 교통안전 대책 마련…더이상 사고는 없다?

하준이 사고를 계기로 지난해 4월, 국토부와 경찰청은 함께 '주차장 교통안전 개선대책'을 내놨습니다. 경사진 주차장에서는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고임목을 설치하고, 관리자는 안내 표지판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해 9월에는 개정된 도로교통법도 시행됐습니다. 고임목을 설치하고, 조향장치(핸들)를 가장자리로 돌려놓는 등 운전자가 직접 미끄럼 사고를 방지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 19개월.. 그렇다면 이제, 현장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다시 또 사고가 나면 바뀔 거예요"

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월 직접 촬영한 서울랜드. 어머니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월 직접 촬영한 서울랜드. 어머니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사고가 난 서울랜드를 어렵게 다시 찾은 고 씨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고, 안내문도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관계 부처에 또다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썼고, 전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돌아온 답변엔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받았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분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다시 또 사고가 나면 바뀔 거라고. 민원서 그만 보내라고."

사고 때만 '떠들썩'…기자가 직접 찾은 현장은 여전했다.

실제, 정부 대책이 나온 뒤 경찰청 단속 건수를 알아봤습니다. 국회 이용호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파악해보니, 전국에서 지난 1년간 운전자 14명만이 적발됐습니다. '경사진 곳'의 기준이 불명확하고, 단속도 어렵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책 발표 이후 비슷한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경찰청 단속 건수경찰청 단속 건수

사고가 났던 놀이공원을 취재진이 찾아봤습니다. 고임목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이용자는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공원 주차장이 아닌 공원 안에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차장에선 경사가 있어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는 표지판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700여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에 세워진 표지판은 10여 개. 그마저도 운전석 쪽이 아닌 오른쪽에 설치돼 있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현장을 함께 찾은 전문가는 유명무실한 조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운전자에게 주의를 줄 수 있는 곳에 주의 표지판들이나 현수막들이 붙어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엔 운전자가 시인성이 크게 좋지 않아요."
(이윤호/안전실천시민연합 본부장)

이윤호 안전실천시민연합 본부장이 현장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윤호 안전실천시민연합 본부장이 현장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준이 법'은 어디에? …1년 넘게 계류 중

지난해 1월, 서울랜드 같은 경사진 주차장에 안전 표지판 설치를 의무화하고, 어길 경우 이행 강제금까지 부과하는 이른바 '하준이법'이 발의됐습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달리 운전자뿐만 아니라 주차장 관리자에게도 의무를 지우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두 달 뒤 상임위를 통과했고 5월에는 법사위에 상정됐지만, 짧은 언급이 전부였습니다.

'유사한 다른 법안이 있다', '형벌이 제각각이다','규정을 맞추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언급 이후, 안건은 단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1년 가까이 계류 중입니다.

"같은 사고로 떠나보내는 아이는 없게 하겠다고 하준이와 약속했죠."


고 씨는 최근 마음을 다시 다잡았습니다. 또 다른 '하준이'를 만들지 않겠다며, 하준이와 마음으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누구보다 연약한 아이들이 안전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재공론화를 다짐했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시설만이라도, 하다못해 사고가 났던 '서울랜드'라도 바뀔 수 있었으면 하는 게 하준이 어머니의 바람입니다.

"아이들은 너무 연약하잖아요.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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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사진 주차장서 하준이 잃은지 19개월, 달라진 건 없다”
    • 입력 2019-05-06 16:01:52
    취재K
"아직도 현실 같지 않아요. 지금도 왼쪽 손에 잡고 있던 손이 느껴지는 것 같죠."

19개월 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하준이'를 떠나 보낸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린이날, 설렘을 숨길 수 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떠나 보낸 하준이 생각에 아픈 마음을 더 참기 힘듭니다.


사고가 난 건 지난 2017년 10월, 경남 창원에 살던 가족들이 서울랜드로 나들이를 갔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차 뒤편에서 카메라를 꺼내고 있었고, 하준이와 어머니가 차에 내려 기다리는 사이,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경사진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SUV 차량이 미끄러져 내려와 하준이와 어머니를 덮친 겁니다. 사고를 낸 차량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운전자가 변속기를 주행상태 'D'로 놓은 채 시동을 끄고 간 건데, 주차 브레이크도 작동시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만에 소중한 아이, 하준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가 떠나는 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국민 청원을 올리게 됐어요.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아이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를 잃고 하루하루 지내는 게 고통이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건 같은 사고를 막아야 한단 책임감이었습니다. 하준이 어머니 고유미 씨가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청와대 국민청원. 경사진 주차장에 경고 문구를 세우고 차량 보조제동장치를 의무화할 것을 요청했고, 14만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습니다. 청와대 답변 요건인 20만 명이 넘진 못했지만, 이례적으로 각종 대책이 쏟아졌습니다.

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017년 11월에 올린 청와대 국민청원
도로교통법 개정, 국토부·경찰청 교통안전 대책 마련…더이상 사고는 없다?

하준이 사고를 계기로 지난해 4월, 국토부와 경찰청은 함께 '주차장 교통안전 개선대책'을 내놨습니다. 경사진 주차장에서는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고임목을 설치하고, 관리자는 안내 표지판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게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해 9월에는 개정된 도로교통법도 시행됐습니다. 고임목을 설치하고, 조향장치(핸들)를 가장자리로 돌려놓는 등 운전자가 직접 미끄럼 사고를 방지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고가 난 지 19개월.. 그렇다면 이제, 현장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다시 또 사고가 나면 바뀔 거예요"

하준이 어머니가 지난 2월 직접 촬영한 서울랜드. 어머니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사고가 난 서울랜드를 어렵게 다시 찾은 고 씨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지만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고, 안내문도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관계 부처에 또다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썼고, 전화를 하기 시작했지만, 돌아온 답변엔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받았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분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다시 또 사고가 나면 바뀔 거라고. 민원서 그만 보내라고."

사고 때만 '떠들썩'…기자가 직접 찾은 현장은 여전했다.

실제, 정부 대책이 나온 뒤 경찰청 단속 건수를 알아봤습니다. 국회 이용호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파악해보니, 전국에서 지난 1년간 운전자 14명만이 적발됐습니다. '경사진 곳'의 기준이 불명확하고, 단속도 어렵다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책 발표 이후 비슷한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경찰청 단속 건수
사고가 났던 놀이공원을 취재진이 찾아봤습니다. 고임목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이용자는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공원 주차장이 아닌 공원 안에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차장에선 경사가 있어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는 표지판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700여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에 세워진 표지판은 10여 개. 그마저도 운전석 쪽이 아닌 오른쪽에 설치돼 있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현장을 함께 찾은 전문가는 유명무실한 조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운전자에게 주의를 줄 수 있는 곳에 주의 표지판들이나 현수막들이 붙어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엔 운전자가 시인성이 크게 좋지 않아요."
(이윤호/안전실천시민연합 본부장)

이윤호 안전실천시민연합 본부장이 현장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준이 법'은 어디에? …1년 넘게 계류 중

지난해 1월, 서울랜드 같은 경사진 주차장에 안전 표지판 설치를 의무화하고, 어길 경우 이행 강제금까지 부과하는 이른바 '하준이법'이 발의됐습니다. 도로교통법 개정안과 달리 운전자뿐만 아니라 주차장 관리자에게도 의무를 지우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두 달 뒤 상임위를 통과했고 5월에는 법사위에 상정됐지만, 짧은 언급이 전부였습니다.

'유사한 다른 법안이 있다', '형벌이 제각각이다','규정을 맞추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언급 이후, 안건은 단 한 번도 논의되지 못한 채 1년 가까이 계류 중입니다.

"같은 사고로 떠나보내는 아이는 없게 하겠다고 하준이와 약속했죠."


고 씨는 최근 마음을 다시 다잡았습니다. 또 다른 '하준이'를 만들지 않겠다며, 하준이와 마음으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누구보다 연약한 아이들이 안전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재공론화를 다짐했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시설만이라도, 하다못해 사고가 났던 '서울랜드'라도 바뀔 수 있었으면 하는 게 하준이 어머니의 바람입니다.

"아이들은 너무 연약하잖아요.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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