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꽃가루 때문에 차가 불탄다고?…달콤 살벌한 베이징 꽃가루 이야기

입력 2019.05.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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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처럼 흩내리는 꽃가루

흡사 함박눈이 내리는 듯하다. 눈송이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한 꽃가루 속을 걷다 보면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바람에 일렁이는,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래서 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백의 솜털!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자꾸 비비게 된다. 목이 칼칼해지더니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발밑으로 바닥을 뒹구는 꽃가루는 좀 흉측해 보이기도 한다. 여기저기 뒹굴다 구석에 쌓인 모습을 보면 꽃가루가 많다 많다 이렇게까지 많을 수 있나! 새삼 놀라곤 한다. 따뜻하고 볕이 좋은 매년 이맘때 열어 놓은 창문의 방충망에 새하얗게 낀 꽃가루를 보면서 이 정도면 재난 수준임을 자각하게 된다.

꽃가루에는 식물성 유분(油分)이 들어 있어 작은 불씨에도 불이 잘 붙는다.꽃가루에는 식물성 유분(油分)이 들어 있어 작은 불씨에도 불이 잘 붙는다.

주범은 가로수. 담당자 처형설까지

베이징 꽃가루 주범은 중국에서 양뤼우쉬(杨柳絮)로 불리는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그중에서도 암그루이다. 지금은 애물단지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베이징 시 당국이 가로수로 선정했을 때만 해도 대접이 달랐다. 병충해에 강하고 성장 속도가 빠르며 무엇보다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이 뛰어나 가로수로 간택됐던 몸이었다. 도시화가 덜 됐던 그 당시만 해도 꽃가루가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꽃가루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알레르기는 물론 호흡기 질환과 안구 질환, 피부 질환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꽃가루는 특히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이나 엔진 주변에 많이 끼게 되는데, 꽃가루 자체에 식물성 유분을 함유하고 있는지라 작은 불씨에도 불이 붙어 수많은 자동차를 태우고 있다. 베이징에서 '가로수 담당자 처형설'까지 도는 이유다. 물론 처형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지만 말이다.

베이징 KBS 지국 옆 외교가의 백양나무가 몸통만 남아있다.베이징 KBS 지국 옆 외교가의 백양나무가 몸통만 남아있다.

식물 학대? 가지치기에서 생식 억제 주사까지

우리나라 산림청쯤 해당하는 중국의 원림녹화국(園林綠化局) 통계를 보면 2018년 말 기준으로 베이징시의 도심(5환 순환도로 안쪽)에만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암그루 28만4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지금은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가 이뤄지는 중이다. 소방 호스를 이용한 물대포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생식 억제 약물을 나무에 직접 주사하는 방식도 수년째 시행 중이다. 8만 그루 정도에 시행했는데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후문이다. 가지 치기도 이뤄지고 있는데, 거의 나무 몸통만 남겨놓고 다 잘라 버린다. 이미 베이징시에서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암그루를 새로 심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미세먼지->황사->꽃가루, 다음엔 오존!

베이징은 일 년 내내 공기가 좋을 때가 별로 없다. 11월부터 시작되는 겨울철에는 석탄 난방으로 인한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는다. 난방이 끝나는 춘삼월엔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사막화된 북서쪽으로부터 황사가 불어온다. 그리고 황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꽃가루가 도시를 뒤덮는다. 이게 끝이 아니다. 꽃가루가 사라질 즈음부터는 오존(ozone)이 밀려온다. 햇빛이 강한 날 대기 중의 산소와 자동차 배기가스의 질소산화물이 만나 형성하는 오존은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는 위험한 물질이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환경 재앙과 인간의 무지가 빚어낸 환경 재앙을 번갈아 맞닥뜨려야 하는 베이징이다. 그래도 그나마 꽃가루가 낫다. 최소한 화학 물질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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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꽃가루 때문에 차가 불탄다고?…달콤 살벌한 베이징 꽃가루 이야기
    • 입력 2019-05-08 07:00:08
    특파원 리포트
함박눈처럼 흩내리는 꽃가루

흡사 함박눈이 내리는 듯하다. 눈송이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한 꽃가루 속을 걷다 보면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바람에 일렁이는,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래서 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백의 솜털!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자꾸 비비게 된다. 목이 칼칼해지더니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발밑으로 바닥을 뒹구는 꽃가루는 좀 흉측해 보이기도 한다. 여기저기 뒹굴다 구석에 쌓인 모습을 보면 꽃가루가 많다 많다 이렇게까지 많을 수 있나! 새삼 놀라곤 한다. 따뜻하고 볕이 좋은 매년 이맘때 열어 놓은 창문의 방충망에 새하얗게 낀 꽃가루를 보면서 이 정도면 재난 수준임을 자각하게 된다.

꽃가루에는 식물성 유분(油分)이 들어 있어 작은 불씨에도 불이 잘 붙는다.
주범은 가로수. 담당자 처형설까지

베이징 꽃가루 주범은 중국에서 양뤼우쉬(杨柳絮)로 불리는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그중에서도 암그루이다. 지금은 애물단지가 돼버렸지만 1970년대 베이징 시 당국이 가로수로 선정했을 때만 해도 대접이 달랐다. 병충해에 강하고 성장 속도가 빠르며 무엇보다 이산화탄소 흡수 능력이 뛰어나 가로수로 간택됐던 몸이었다. 도시화가 덜 됐던 그 당시만 해도 꽃가루가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꽃가루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알레르기는 물론 호흡기 질환과 안구 질환, 피부 질환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꽃가루는 특히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이나 엔진 주변에 많이 끼게 되는데, 꽃가루 자체에 식물성 유분을 함유하고 있는지라 작은 불씨에도 불이 붙어 수많은 자동차를 태우고 있다. 베이징에서 '가로수 담당자 처형설'까지 도는 이유다. 물론 처형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지만 말이다.

베이징 KBS 지국 옆 외교가의 백양나무가 몸통만 남아있다.
식물 학대? 가지치기에서 생식 억제 주사까지

우리나라 산림청쯤 해당하는 중국의 원림녹화국(園林綠化局) 통계를 보면 2018년 말 기준으로 베이징시의 도심(5환 순환도로 안쪽)에만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암그루 28만4천 그루가 심어져 있다. 지금은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대가 이뤄지는 중이다. 소방 호스를 이용한 물대포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생식 억제 약물을 나무에 직접 주사하는 방식도 수년째 시행 중이다. 8만 그루 정도에 시행했는데 효과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후문이다. 가지 치기도 이뤄지고 있는데, 거의 나무 몸통만 남겨놓고 다 잘라 버린다. 이미 베이징시에서 백양나무와 버드나무 암그루를 새로 심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미세먼지->황사->꽃가루, 다음엔 오존!

베이징은 일 년 내내 공기가 좋을 때가 별로 없다. 11월부터 시작되는 겨울철에는 석탄 난방으로 인한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는다. 난방이 끝나는 춘삼월엔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사막화된 북서쪽으로부터 황사가 불어온다. 그리고 황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꽃가루가 도시를 뒤덮는다. 이게 끝이 아니다. 꽃가루가 사라질 즈음부터는 오존(ozone)이 밀려온다. 햇빛이 강한 날 대기 중의 산소와 자동차 배기가스의 질소산화물이 만나 형성하는 오존은 호흡기 장애를 일으키는 위험한 물질이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환경 재앙과 인간의 무지가 빚어낸 환경 재앙을 번갈아 맞닥뜨려야 하는 베이징이다. 그래도 그나마 꽃가루가 낫다. 최소한 화학 물질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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