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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8부두 한 번도 우리땅이 되지 못한 곳
입력 2019.05.08 (18:10) 수정 2019.05.09 (10:16) 뉴스9(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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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8부두 한 번도 우리땅이 되지 못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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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멘트]

 주피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부산항 제8부두는 한미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부산항 제8부두의 역사를 공웅조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감격스러운 해방.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던 동포들이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뒤에는 유엔군 병사들이, 전후에는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농산물과 축산물 등 각종 구호 물자가 부산항에 들어옵니다.

  대한뉴스[녹취]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농업협동조합에서 도입한 이 젖소는 희망하는 농민들에게 실비로 분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부터 군수물자가 드나들던 8부두는 1981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미군에 무상공여됩니다.

  주한미군의 무기와 각종 물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각종 한미연합훈련 때는 수만 명의 미군이 첨단 무기를 이끌고 입항했습니다.

  군대만 들어온 게 아닙니다. 제 8부두를 통해 미군과 함께 들어온 미국산 공산품은 국제시장과 서면공구상가 등으로 흘러들어 부산 경제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성역같았던 제 8부두에 비판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때를 같이합니다.

  미군들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는데도 소파, 즉 주한미군 지위협정에 따라 미군이 공무 중이라고 주장하면 우리가 수사도 처벌도 못하는 불평등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소파협정 때문에 199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 사법부가 재판권을 행사한 사건은 전체 미군 범죄의 1%가 채 되지 않습니다.

  김동윤/1990년대 학생운동 활동[인터뷰]
  "이런 사회 구조적 문제가 계속되다 보니까 미군들이 언제든지 한국 사회에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높아졌던 시기였고."

  대학생들은 부산항 제 8부두와 하야리아부대 등지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소파협정 개정을 외쳤습니다.

  최지웅/1990년대 학생운동 활동 [인터뷰]
  "미국이 무슨 말만 하면 부끄럽더라도 굴욕적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바꾸어서 평등한 한미관계 우리 말을 할 수 있는 한미 관계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파협정이 개정되고 하야리아 부대 땅도 돌려받았지만 부산항 제 8부두의 절반은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KBS뉴스 공웅조입니다.
  • [심층]8부두 한 번도 우리땅이 되지 못한 곳
    • 입력 2019.05.08 (18:10)
    • 수정 2019.05.09 (10:16)
    뉴스9(부산)
[심층]8부두 한 번도 우리땅이 되지 못한 곳
 [앵커멘트]

 주피터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부산항 제8부두는 한미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부산항 제8부두의 역사를 공웅조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감격스러운 해방. 다른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던 동포들이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뒤에는 유엔군 병사들이, 전후에는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농산물과 축산물 등 각종 구호 물자가 부산항에 들어옵니다.

  대한뉴스[녹취]
  "한미재단의 주선으로 농업협동조합에서 도입한 이 젖소는 희망하는 농민들에게 실비로 분양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전쟁 때부터 군수물자가 드나들던 8부두는 1981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미군에 무상공여됩니다.

  주한미군의 무기와 각종 물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각종 한미연합훈련 때는 수만 명의 미군이 첨단 무기를 이끌고 입항했습니다.

  군대만 들어온 게 아닙니다. 제 8부두를 통해 미군과 함께 들어온 미국산 공산품은 국제시장과 서면공구상가 등으로 흘러들어 부산 경제의 한 축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성역같았던 제 8부두에 비판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한 건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때를 같이합니다.

  미군들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는데도 소파, 즉 주한미군 지위협정에 따라 미군이 공무 중이라고 주장하면 우리가 수사도 처벌도 못하는 불평등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소파협정 때문에 199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 사법부가 재판권을 행사한 사건은 전체 미군 범죄의 1%가 채 되지 않습니다.

  김동윤/1990년대 학생운동 활동[인터뷰]
  "이런 사회 구조적 문제가 계속되다 보니까 미군들이 언제든지 한국 사회에서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높아졌던 시기였고."

  대학생들은 부산항 제 8부두와 하야리아부대 등지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소파협정 개정을 외쳤습니다.

  최지웅/1990년대 학생운동 활동 [인터뷰]
  "미국이 무슨 말만 하면 부끄럽더라도 굴욕적이라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바꾸어서 평등한 한미관계 우리 말을 할 수 있는 한미 관계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파협정이 개정되고 하야리아 부대 땅도 돌려받았지만 부산항 제 8부두의 절반은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KBS뉴스 공웅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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