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죽은 최초의 사망자, 농아 김경철

입력 2019.05.14 (21:55) 수정 2019.05.14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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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멘트> 
80년 5월 계엄군에게
처음으로 목숨을 잃은 시민은
듣지도 말하지 못하는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검시자료 속에는
총칼도 아닌 무자비한 구타가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5.18 39주년 연속기획
그 두 번째 순서로
최초 희생자인 김경철 씨의
죽음을 살펴봤습니다.

  김애린 기자의 보돕니다.

  
<리포트>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아들 김경철 씨를 찾은 임근단 씨.
     
   39년이 지났지만,
아들의 묘를 찾을 때면 
한 맺힌 눈물이 쏟아집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어쩌냐. 살고 싶어서.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김경철씨는
80년 5월 19일 금남로를 지나다
계엄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농아 장애인증을 내보이는 그에게  
군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다음날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낸 어머니는 온 몸이 멍든
아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없습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거짓말로 수 쓴다고 두드려 맞았다고 
그러기에 그 일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그 살고 싶어서 그 했던 그 머시기를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김 씨의 참혹했던 죽음은
당시 검시 기록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뒷머리와 왼쪽눈,
오른팔과 왼쪽어깨, 왼쪽 정강이부터
허벅지, 엉덩이까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멍이 들고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직접 사인은 뒷머리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입니다.  
     
<문형배 당시 참여 검시의>
소위 다발성 타박상이죠. 타박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사인을 타박사로 맞아서 죽었다고
할 정도라면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쓸 수 있겠죠.
     
   김 씨가 숨진 이후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백일 된 딸은 할머니를
엄마로 부르며 자랐습니다. 
     
   손녀를 반듯하게 키워낸
어머니 임 씨는 이제 아들을 위해
매일 옛 도청을 지킵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하루 속히 우리 뜻을 진상 규명이 되고 
도청도 복원되고 공법단체도 되고 
이런 것들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어요."  
     
   KBS뉴스 김애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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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아 죽은 최초의 사망자, 농아 김경철
    • 입력 2019-05-14 21:55:33
    • 수정2019-05-14 23:42:32
    뉴스9(순천)
<앵커멘트>  80년 5월 계엄군에게 처음으로 목숨을 잃은 시민은 듣지도 말하지 못하는   20대 청년이었습니다.   검시자료 속에는 총칼도 아닌 무자비한 구타가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5.18 39주년 연속기획 그 두 번째 순서로 최초 희생자인 김경철 씨의 죽음을 살펴봤습니다.   김애린 기자의 보돕니다.    <리포트>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아들 김경철 씨를 찾은 임근단 씨.          39년이 지났지만, 아들의 묘를 찾을 때면  한 맺힌 눈물이 쏟아집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어쩌냐. 살고 싶어서.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김경철씨는 80년 5월 19일 금남로를 지나다 계엄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농아 장애인증을 내보이는 그에게   군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다음날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낸 어머니는 온 몸이 멍든 아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없습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거짓말로 수 쓴다고 두드려 맞았다고  그러기에 그 일을 생각하면 목이 메고  그 살고 싶어서 그 했던 그 머시기를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김 씨의 참혹했던 죽음은 당시 검시 기록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뒷머리와 왼쪽눈, 오른팔과 왼쪽어깨, 왼쪽 정강이부터 허벅지, 엉덩이까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멍이 들고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직접 사인은 뒷머리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입니다.         <문형배 당시 참여 검시의> 소위 다발성 타박상이죠. 타박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죠. 사인을 타박사로 맞아서 죽었다고 할 정도라면 상당히 심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쓸 수 있겠죠.          김 씨가 숨진 이후 아내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백일 된 딸은 할머니를 엄마로 부르며 자랐습니다.           손녀를 반듯하게 키워낸 어머니 임 씨는 이제 아들을 위해 매일 옛 도청을 지킵니다.     <임근단 고 김경철 씨 어머니> "하루 속히 우리 뜻을 진상 규명이 되고  도청도 복원되고 공법단체도 되고  이런 것들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어요."            KBS뉴스 김애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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